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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입은 자 (눅 1:26-38)

내일이면 성탄절입니다. 기억하고 계십니까? 내일이면 성탄절인데, 진짜 예수님의 생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진짜 생일을 우리가 알 수가 없고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이 예수님의 진짜 생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1년에 한 번 정도 예수님의 나심을 생각하기도 하고, 또한 축하하고 감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전에는 성탄절 하면 너무나도 참 행복했고 기뻤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길거리를 걸어가면 캐럴이 울려 퍼졌었고, 또한 성탄절이 되면 새벽송을 돌면서 노래를 부르고, 또한 반갑게 맞이해 주는 가정에서 주는 오뎅과 또 하나 떡볶이 이런 것들을 먹으면서, 행복하게 지내다가, 12월 25일 성탄절 예배를 피곤하지만 정말 행복하게 드렸던 그런 추억들이 아주 새롭게 또 생각이 납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들이 다 바뀌어져 버렸고, 이제는 그러한 것을 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오게 된 것이죠. 변화라고 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 옛날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는 것은 좋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과거에 그 상황 가운데만 머무는 것은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우리는 탄력적으로 변화해 나가야 되는 것이고요.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서 성탄절 문화도 조금씩 조금씩 창의적으로 탄력적으로 개발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과거의 것들만을 다시 또 생각한다고 하면, 그것은 오히려 도태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성탄절의 본질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고, 또한 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은 우리가, 또한 사랑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전하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 본질을 축하하고 또한 기념하기 위해서 했던, 여러 가지 문화나 여러 가지 행사들은 사실은 시대에 따라서 바뀌게 되어 있고, 변화되게 되어 있고, 그래서 시간이 지나게 되면 더 이상 다시 그런 일들을 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새롭게 이 시대에 맞는 창의적으로 탄력적으로 새로운 성탄절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함께 친하게 교제하던 어떤 목사님이 있는데요. 그 목사님이 올린 글을 보니까 이런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어느 날 스타벅스 카페에 앉아서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떤 꼬마 아이가 다가와서 무엇인가를 내밀고 가더랍니다. 조그마한 성탄 카드를 받게 되었는데요. 그 성탄 카드 안에는 스타벅스 카드가 들어 있었어요. 이렇게 스타벅스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그 돈이 들어있는 카드가 하나 들어 있었고, 그리고 성탄절 카드에 무엇이 쓰여 있었냐면,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금년에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의미 있게 기다리며, 어떻게 축하하고 기다릴까 생각하다가, 금년에는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에게 크리스마스의 따스함을 나누어 주면서, 성탄절을 기념하고 기다리기로 작정했습니다. 당신과 같이 소중한 사람에게 이것을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빈다고 하는 그런 짧은 메시지와 함께, 그 카드를 받고 나서 목사님의 마음이 너무나도 따뜻해지고 너무나도 좋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미국이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죠. 우리나라에서 하면 웬 이상한 사람인가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기보다, 예전에 했던 것들을 또다시 반복하려고 하고, 그것이 반복되지 아니하면 절망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창의적으로 찾아서, 새로운 크리스마스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좋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매년 성탄절쯤이 되면 우리 교회 교우들이 이제는 라면 한 박스라도 가지고 와서,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전달해 주는 일들에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러한 일들을 하나의 우리 교회의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또한 우리 각 가정들에서 개인들마다 어떻게 하면 성탄절에 그 좋은 그 의미를 다시 살릴 수 있을지, 각자 좋은 그런 문화들을 만들어 나가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소위 “수태고지”(annunciatio)라고 하는 그런 본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이제 메시아를 잉태하게 될 것이다. 메시아를 수태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해서, 이 본문을 가리켜서 “수태고지”라고 합니다. 수태할 것을 고지했다고 하는 것이죠. 천사는 어느 날 갑자기 마리아라고 하는 한 여인에게 한 처녀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처녀는 어떤 처녀였을까요? 그냥 평범한 한 여인이었습니다. 아주 뛰어난 가문에 아주 뛰어난 어떤 업적을 이룬 대단한 어떤 한 사람에게 천사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당시에 널려 있던 수많은 그런 처녀들 가운데 한 여인에게 나타나서 천사가 이 말을 전해준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이죠. 우리와 똑같은 마리아에게, 우리와 똑같이 그냥 평범한 그 한 여인에게, 이 천사가 나타나서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준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했던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는 메시아가 온다고 하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간절히 기다려 왔습니다. 왜 메시아를 기다렸을까요? 그것은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외제의 압박 속에서, 압제 속에서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그런 인생들이기 때문이죠. 무엇인가 소망은 있는데, 꿈은 있는데 이루어지지 않고, 고통 가운데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그런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아는 정말로 필요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누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없는가? 누가 나의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그런 위대한 인물이 없는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그런 이스라엘 민족에게, 천사는 나타나서 바로 그 메시아가 오게 되었다고 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옛날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해 주셨던 바로 그 메시아인 것이고, 아니 아담과 하와가 타락해서 이제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하와의 후손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그래서 너희를 구원해 주겠다고 했던 그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이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런 놀라운 메시아가 온다고 하는 약속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누가복음 1장 32절에서부터 33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그 옛날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에는 강대국이 되었고, 호화찬란했었고 영광스러운 나라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초라한 민족이 되어버렸던 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이제 다윗의 아들을 통해서 이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 주실 거라고 하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 것입니다. 메시아가 와서 이제는 모든 고통을 없애고 영광스러운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 하는 그런 약속을 해 주셨으니까, 좋은 소식입니까? 나쁜 소식입니까? 좋은 소식인 것이죠.


그런데 천사가 전한 소식은 또 하나의 소식이 있습니다. 두 번째 소식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데 그 메시아가 어떻게 우리 가운데 오는가? 바로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올 거라고 하는 예언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1장 31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메시아가 온다고 하는 소식은 너무나도 좋은 소식인데, 그 메시아가 누구를 통해서 와요? 나를 통해서 온다는 거예요. 내가 임신하는 것을 통해서 메시아가 온다고 하는 그런 충격적인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요. 이 말을 마리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겁니다. 왜냐하면 처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결혼한 사람이 아니라 아직 동정녀이고, 아직 결혼하지도 아니한 그런 한 소녀가 그렇게 아이를 낳게 될 거라고 하는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메시아가 온다고 하는 사실은 좋고도 기쁜 소식인데, 그런데 하필이면 나를 통해서 오게 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주저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마리아가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복음 1장 34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난 결혼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처녀예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런데 이 마리아가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처녀가 임신할 수 있는가? 그 가능성,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사실은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그걸 내가 못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발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자꾸만 이런 질문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이죠.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이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천사는 이런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5절에서부터 37절의 말씀에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이 없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미루신다고 한다면, 반드시 이루실 거라고 말씀해 주었는데, 이 대답을 들은 마리아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것을 감당하겠다고, 그런 마음이 금방 들었을까요? 오히려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두려울 거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처녀가 아이를 잉태한다고 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좋은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런데 그 당시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유대의 땅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마리아에게는 이미 약혼한 남자가 있어요. 몇 달 뒤면 이 남자와 결혼하기로 돼 있어요. 요셉이라고 하는 청년과 결혼해서, 그저 꿈을 꾸는 것이 무슨 꿈을 꾸고 있습니까? 뭔가 대단한 꿈이 아니에요. 뭔가 엄청난 일을 이루겠다고 하는 꿈이 아니라, 그저 이 남자와 함께 그저 조용하게 서로 사랑을 나누며, 그저 가정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소박한 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다 깨지는 거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처녀가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마리아가 이 천사의 말을 그대로 수용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죠.


예전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밀레니엄 극장이라고 하는 곳이 있었는데요. 필라델피아 인근에 아주 허허벌판에 크게 지어놓은 뮤지컬 극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극장은 1년 내내 성경에 나온 주제로 뮤지컬을 만들어서, 브로드웨이 뮤지컬 이상으로 엄청난 뮤지컬을 하는 곳이어서, 전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매번 구경을 하기 때문에, 매회 매진이 되는 그런 엄청나게 유명한 그런 뮤지컬을 하는 그런 극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본 뮤지컬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Jesus. 예수님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을 봤는데, 바로 이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님이 탄생하는 그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마리아가 천사가 만난 것을 가지고, 너무나도 흥분이 되고 너무나도 좋아서 천사를 만났다고 하는 것이 그게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정말 엄청난 경험을 했던 이 마리아가 당장 누구에게로 좇아가냐면 요셉에게 좇아가서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요셉, 요셉, 내가 천사를 만났어.” 내가 천사를 만났어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천사가 말이야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고, 내가 아기를 가지게 될 거래. 흥분 가운데 기뻐서 막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순간에 요셉의 반응이 무엇이었냐면,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wait a minute. wait a minute. wait a minute. 나 좀 생각해 볼게. 나 좀 생각해 볼게.” 하면서 그냥 가버리는 거예요. 그것을 본 마리아가, 그 요셉이 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뛰어들어 저쪽으로 들어가는 그 장면을 묘사해 주었는데요. 물론 뮤지컬을 만든 그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든 장면이죠. 근데 그 장면을 보면서 아주 강하게 제 마음 가운데 그 장면이 남게 되더라고요. 이런 거였겠구나. 마리아가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요셉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에 대해서 “이런 느낌이었겠구나”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됐는데요.


사실은 요셉이 그렇게 한 것이 말했다기보다는 아마 마리아가 먼저 그런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천사님, 뭐라고요? 아니요. 그러면 안 되죠. 내가 애기를 밴다고요? 안 돼요.” 그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엄청난 충격적인 이야기가 바로 천사가 전해준 두 번째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 누가복음 1장 38절의 말씀을 보면 마리아는 받아들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성경은 모든 과정을 다 일일이, 사람들의 심리 상태까지 일일이 묘사하는 소설이 아니라, 아주 간단하게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천사가 말을 하고, 그리고 마리아가 이 대답을 하기까지의 어떤 고민과 갈등이 있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해 놓고 있지 않지만, 아무튼 마리아는 이 천사의 말에, “주의 여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을 하면서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죠.


어떻게 마리아는 이런 충격적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까요? 감당하기 어려운 그 무거운 짐을 어떻게 마리아는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지, 우리가 추측해 보자고 한다면, 그 이유는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거라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누가복음 1장 28절의 말씀을 보면 천사가 나타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죠.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천사가 들려준 이 말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말은 없습니다. 천사가 들려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말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그 어떠한 장애물도, 어떠한 고난도, 어떠한 힘든 그 일들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만일 내가 내동댕이 쳐져 있고, 나 혼자 그것을 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감당할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주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따라서 우리가 길을 가는 가운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그런 길을 간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리를 사랑하사, 목자, 그 사랑하시는 그 목자가 우리를 위하여 선하신 길로 좋으신 길로, 결국에는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길을 걷는 동안에, 어떠한 어려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담대하게 믿음으로 갈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있다고 한다면 전혀 두려움을 느낄 수 없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고,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마리아가 만나는 그 어떠한 상황도, 이제 마리아가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게 될 어려움이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예수를 향해서 동네 사람들이 저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저 호래자식이라고 욕하고,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을 것이고, 저 근본을 모르는 자를 낳은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뒤에서 쑥덕쑥덕 거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야 되는 그 고통이 있다고 할지라도, 새로운 세상이 나를 향해서 돌을 던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한다면 걱정할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마리아가 순종하며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이 마리아가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1장 28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주의 여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자기가 누구인가? 나는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오, 내가 하나님께 속한 바 되었다고 하는,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믿음으로 이 힘들고 어려운 사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죠.   만일 마리아가 이 순간에 그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그래서 그 사명을 거부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올 수 있었을까요? 이 역사에서 만일이라고 하는 가정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만일 마리아가 이 사명을 거역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메시아가 올 수 있을까요? 그래도 오시기는 오셨겠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마리아가 아니면 다른 여인을 통해서라도 오게 하실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은 실패할 리가 없기 때문에 오시겠지만, 그러나 마리아는 그런 위험과 비난과 고통을 감수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 메시아가 온다고 하는 것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 온다고 한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놀라운 그런 위치로 가게 된 것이죠. 중세시대 때 가톨릭 교회에서는 마리아를, 가톨릭 쪽에서는 마리아를 너무 높이다 보니까, 마리아를 어떻게 불렀냐고 하냐면,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렀어요. 예수님을 낳았으니까, “하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라고 불렀는데요.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나님을 낳은 자”라고 하는 그런 의미죠. 그만큼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메시아를 기대하면서도, 그 메시아가 나를 통해서 온다고 한다면 거부하기를 원하는 게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꿈을 꾸지만 그 꿈을 위해서 희생을 치러야 하고, 그리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면, 그 꿈을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는 게, 우리들의 연약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명을 피한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은 우리를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놀라운 영광으로 인도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수고하고 땀을 흘린 자에게 그만큼의 열매가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며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죠. 내가 그 사명을 회피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면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한다면,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고난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고, 사명을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죠. 사명을 회피하면서 꿈만 꾸는 것은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서, 그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냥 거저 주시는 것을 그렇게 기대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런데 내가 수고도 하지 아니하면서, 내가 땀을 흘리지 아니하면서,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얻겠다고 하는 그런 얌체적인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고, 우리가 수고하지 않았지만, 그 열매를 먹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일 수 있겠으나, 또한 우리가 땀을 흘리면 흘린 만큼 먹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시편 128편 1절 2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요. 우리가 수고한 대로 땀을 흘린 대로 그 열매를 얻는 것이, 그것이 내가 잘 나서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게 은혜요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가 있을 때, 그 앞에서 머뭇거리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앞에서 두려워하면서 무서워하면서, 그냥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서 있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믿음으로 고백해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됩니다. 주여 주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 그런 고백이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놀랍기도 하고 감사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명을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저 영원한 형벌 가운데서 건져내기 위해서, 누가 이 세상에 내려와서 누가 십자가를 지고 누가 이 우리 자녀들을 구원할 것인가? 우리 주님께서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 계시면서, “나 몰라라. 저 더러운 인생들 손에 내 더러운 거 묻히기 싫다.” 하면서, 저 하늘 보좌에서만 편안하게 계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급한 상황을 보시고 주님께서 이 땅 위에 내려오신 것이죠. 주님께서 내려오시되 어떻게 내려오셨는가? 저 하늘의 영광, 저 하나님의 모든 권세 다 비워내시고, 아무런 힘도 없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마리아가 예수님 아기 예수님을 안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 그 옆에 요셉이 바라보고 있고, 수많은 가축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목자들이 와서 경배하고 동방박사들이 와서 예배하고 있는 선물을 드리고 있는 그 그림 성화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성화를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너무나도 따뜻하다. 너무나도 참 좋다. 그런 마음이 드셨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는데요. 사실 예수님으로서는 전혀 따뜻한 장면이 아니었던 것이죠. 왜냐하면 저 높고 높은 곳에서 만유의 왕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악의로 모습으로 오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다 비워내시고 자기를 낮추어 종의 형체를 가져 완전히 자신을 비우시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리아가 모든 것을 다 해주어야만 하는 그런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와서 누워 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고난의 모습입니다. 마치 천하장사가 손발이 다 잘려버리고 병상에 누워서 그냥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그러한 비참한 모습의 그 장면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 사명을 가지고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마음속에 기억하면서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그 받은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은혜가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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