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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툼을 일으키는 자 (잠 16:27-30)

누가 불량배인가?

오늘은 잠언서 16장 27절에서부터 30절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6장 27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 불량한 자가 악을 꾀한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불량한 자”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불량한 자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불량한 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어떤 단어인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벨리알”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이 벨리알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무가치한 자, 무가치한 것, 쓸모없는 것, 또는 사악한 것, 혹은 건달, 불량배, 이런 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벨리알”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어 단어 벨리아를 구약 성경에서는 불량한 자, 사악한 자, 무가치한 자 이런 식으로 번역하고 있는데요. 신약 성경에서는 번역하지 않고 그냥 “벨리알”이라고 음력해 놓았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5절의 말씀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요. 여기서 벨리알이라고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무가치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악한 건달이며 불량배를 가리켜서 벨리알이라고 하는 것인데, 고린도후서 6장 15절에서는 바로 사탄을 가리키는 말로, 악한 사탄을 나타내는 말로 벨리엘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잠언서 16장 27절에서 불량한 자가 악을 꾀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아주 사악한 자, 나쁜 자, 정말 아무 쓸모없는 그런 사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악한 자가 누구냐? 사악한 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문제만 일으키고, 그렇게 사악한 일을 행하는 자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악한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악한 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사악한 자, 대책이 불량한 자, 사악한 자, 무가치한 자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 바로 불량한 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불량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벨리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지 않으시죠? 우리는 그렇게 벨리알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불량한 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불량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그런 공통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모르는 채, 내가 벨리알 짓을 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기가 벨리알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불량배와 같은 짓, 사악한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나는 선한 일을 하고 있다. 오히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라고 착각하면서 그렇게 벨리알 짓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있다고 한다면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상황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교회를 핍박하는 나쁜 사람이었던 것이죠. 오늘 히브리어 단어로 말하자면 벨리알과 같은 그런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그런 벨리알 짓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정말 나쁜 짓을 하고 싶어.” “나는 사악한 짓을 하고 싶어.” 하면서,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가운데는 “나는 의로운 일을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며,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가운데 벨리알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러한 모습이 우리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의롭게 행동하고 있고, 내가 지금 선하게 행동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내가 의롭고 선한 것이 아니라, 벨리알 짓을 하고 있는 그런 경우는 아닌지, 우리 자신을 언제나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잠언서 16장 27절의 말씀을 묵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잠언서 16장 27절에서 하는 말이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불량한 자가 누구냐? 불량한 자는 어떤 사람이냐?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27절의 말씀을 보면, 누가 악한 자인가? 누가 벨리알인가? 바로 “악을 도모하는 사람이 벨리알이다”라고 하는 아주 간단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겁니다. 정말 간단한 것이죠. 누가 불량배인가? 누가 악한 자인가? 누가 사악한 사람인가? 누가 벨리알과 같은 사람인가?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 악하면 벨리알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 악하면, 그 사람은 불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행하는 행동이 선하고 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불량배인가 아닌가를 따질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사람이 교회를 다니고 있느냐? 다니고 있지 않느냐에 따라서 불량배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고상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가? 천한 일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불량배가 아닌가를 나눌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직분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 저 사람은 불량배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저 사람이 명문가문에서 태어났는가? 그냥 흙수저 출신인가에 따라서, 이 사람은 의로운 사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 불량한 일이라고 한다면, 악한 일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불량배인 것이고,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 의롭고 선하면, 그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간단하죠? 아주 쉽습니다.   그런데 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악을 행하는 자가 사악한 자, 불량배, 벨리알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그 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악이 어떤 것이 악이죠? 어떤 것이 나쁜 짓입니까? 우리의 생각에 악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거나, 사기를 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입혀야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오늘 잠언서 16장 27절 뒷부분에 보면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패역한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인데,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 악한 자의 입에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악은 어떤 것이 악인가? 남을 죽이고 남의 것을 빼앗고 사기치고 피해를 입히고 하는 그런 적극적이고 아주 사악한 일들이 그것만이 악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오늘 잠언서 16장 27절 말씀 가운데는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선한 말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말이 악한 말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하는 말은 참 놀랍게도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말을 하면서 그 심각성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냥 아무런 감정 없이, 아무런 악의가 없이 내뱉은 말인데, 사실은 그 말이 다른 사람들의 그 심장을 짜내버리고, 죽여버리고, 그 사람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히는 아주 심각한 공격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할 때가 많이 있는 것이죠. 내가 장난으로 했던 말 한마디가, 내가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냥 내뱉었던 그 말 한 마리가, 그리고 비웃거나 비아냥거리고 수군거렸던 그 말이, 많은 사람들을 고통 가운데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냥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했던 말인데, 사실은 그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그 말을 잘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그 사람이 불량배라. 그 사람이 불량배고 그 사람이 악을 행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바로 벨리알이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음주운전을 하는 경우를 보면은요. 음주 운전하는 사람은 자기가 운전을 한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냥 운전합니다. 그냥 나는 술 한두 잔 마셨을 뿐이고, 나는 충분히 운전해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운전대를 잡는 것이죠. 하지만 그 운전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엄청난 일이 결과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중경상을 입고, 사망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말도 사실은 우리가 제어하지 못하고, 우리가 컨트롤하지 못해서, 그냥 내뱉었던 그런 말들이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있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치명상을 입혀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불량배요. 바로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오늘 잠언서 16장 27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서 아주 신중해야만 하는 것이고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수근수근거리고 중상모략을 하고 험담을 하고 가십을 하는 것이 그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불량배의 짓이고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엄청나게 큰 죄악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장 29절에서부터 32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행하는 아주 사악한 죄의 이름들을 열거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라고 한탄하고 있는 것이죠. 수근수근거리며 다른 사람들을 험담하고 비방하고 뒤에서 욕하고, 그래서 가십을 해대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 그냥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냥 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이 아니라, 사실은 살인죄와 똑같은 사기죄와 똑같은, 아주 심각한 죄에 해당하는 것이며,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로마서 1장 가운데서 말씀해 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0절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내가 갈 때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바울 사도는 수근수근거리는 이것이 아주 심각한 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그러한 일을 할까 봐 두려워한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하는 그 말 하나가 괜찮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를 패역한 자로 만드는 것이고, 불량대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행해왔다고 한다면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했던 그 잘못에 대해서 뉘우칠 뿐만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일을 똑같은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결심과 다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잠언서 16장 2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27절에서 나온 이야기를 계속해서 연결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인데요. “패역한 자가 다툼을 일으킨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패역한 자가 어떤 뜻이죠?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패역한 자라고 하죠?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스르는 사람을 가리켜서 패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패역한 자가 누굽니까? 패역한 자가 누구냐면, 바로 27절에 나왔던 바로 그 사람이죠. 불량한 자죠. 불량한 자요. 쓸모없는 자요. 무가치한 자요. 건달 불량배와 같은 자가 패역한 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바로 그러한 자가 그 입에 불과 같은 것이 있는 그런 악을 품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그 가지고 있는 그 불과 같은 입술에 불과 같은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다 다툼을 일으키게 만들고, 친한 벗을 이간시켜버리고, 말로써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표현이 약간 다르지만 27절에서 나온 말씀과 바로 똑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불량배 패역한 자가 무슨 일을 하는가? 다툼을 일으키고 이간질을 하고 싸움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무엇으로? 말로써 그렇게 한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간질하고 편을 가르고 싸우게 만들고 분쟁하게 만들고 하는 일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해하게 만들고 서로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가 되게 만들고, 같이 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의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가? 마태복음 5장 9절의 말씀에 보면 화평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화목하게 만들고 서로 사랑하게 만들고, 갈라졌던 사람들을 다시 친하게 만들고, 사랑으로 하나 되게 만드는 그런 일을 해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고, 그런 일을 해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서로 이간질시키고, 말로써 편을 가르고, 그래서 서로 미워하게 만들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누구의 자녀예요? 사탄의 자녀가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패역한 그런 일들을 할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해하도록 만드는 일들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 19절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아멘. 오늘 우리들에게 어떠한 직분을 맡겨주셨다고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으셨어요? 옆에 사람 보고 얘기해 봅시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으셨군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은 누구만 하면 돼요? “목사님만 하면 돼요”가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겨주셨어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또한 화목하는 직분을 주셔서,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고 헤어졌던 사람들을 다시 연결시키고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그런 화목의 도구로 우리를 불러주셨으니, 우리의 입술을 사용하여 정말 수많은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일에 앞장서야지, 뒤에서 가십을 하면서 수군수군거리고 “세상에 저런 사람의 단점 알아?” “저 사람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아?” 자꾸만 나쁜 이야기만 하면서, 그래서 갈라버리고 사람을 매장시켜 버리고 편 가르기를 하고, 그래서 수근수근거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가 믿음의 그 직분들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성도님들을 보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수행하고 싶어 하셔요. 우리 성도님들을 보면, 그렇죠. 어떻게 하면 서로 사랑하게 만들까?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 만들까? 서로 화목하게 하는, 내 말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게 만드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하는 갈망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요. 그런 갈망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갈망이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지혜가 부족해서, 나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인데, 오히려 그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리고 정말 일어서지 못하게 충격적인 그런 말들을 하는 경우가 상처를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새로운 교우를 향해서 너무나도 반가운 새로운 교우가 왔다고 하는 사실에 너무나도 반가워서 막 이야기를 합니다.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던 사람이 오래간만에 나온 것을 보고 반갑다고 너무나도 기뻐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말하는 그 말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마음, 제가 분명히 그 사람의 마음을 아는데, 그 사람은 사랑의 말을 하고 싶었을 거예요. 그 사람은 정말 반갑다고 표시하고 싶었을 거예요. 그 사람은 정말 따뜻한 마음으로 접근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툭 내던지는 이야기가 그 사람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서 그 말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목격하는지 몰라요. 너무나도 안타깝죠.

어떤 성도님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마음에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봤더니 누가 무슨 말을 해가지고 시험에 들었대요. 누가 무슨 말을 해가지고 정말 괴롭대요. 너무나도 화가 난대요. 그래서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화나게 하는 말을 했을까? 시험에 드는 말을 했을까? 가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봤더니, 그 사람은 나쁜 의도로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그냥 장난으로 이야기한 거고, 그냥 친하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서 이야기한 것이고, 농담을 이야기한 것이고 한 것인데,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너무나도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충격적인 그런 너무나도 큰 아픔을 준 그런 말을 해버린 경우들을 얼마나 많이 교회 내에서 만나게 되는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그런 게 아니고, 제가 그래요. 말 한마디 하면 좀 좋은 말이 나와야 되는데, 상처를 주는 말이 나올 수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말이 내가 원하는 그런 갈망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용기를 북돋어주고, 그래서 서로를 연결시켜 주고 서로가 사랑하게 만드는 그런 따뜻한 말을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배울 게 아직도 너무나 많아요. 하지만 몇 가지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한다면 첫 번째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지 말고, 한 번 더 곰곰이 더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아서, 혹시라도 이 말이 내 의도와는 정반대로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은 아닐까 또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라고 그랬죠? “더디 하라.” 빨리 생각나는 대로 그냥 얘기하지 말고, 한 번 더 곱씹어보고 또 생각해 보고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이 과연 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을지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말을 해라. 가르치고 있으니까, 정말 말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해 보고, 말하기 전에 10번 생각해 보고, 말하기 전에 또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고, 가까운 친구에게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이 들까? 물어보기도 하고 해서, 정말 신중하게 말하는 그런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좋을까? 칭찬하는 말을 해야 되겠죠. 장점을 찾아서 그 사람의 장점들을 보고, 단점을 보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보고 칭찬해 줘야죠. 누군가 무슨 말을 하면, 그것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거 잘못됐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자꾸만 지적하는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그리고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칭찬하는 말을 할 때,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그 사람의 장점 자체를 칭찬하는 그런 세심한 칭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그 사람의 말에 공감해서 함께 진정으로 기뻐해주고 함께 진정으로 슬퍼해 주어야 하겠죠. 그 사람의 그 선한 의도를 보고 인정하고 공감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함부로 농담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특별히 농담하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농담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예는 거의 보지 못했어요. 농담하는 것은 100% 손해만 보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농담을 그냥 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특별히 새 교우가 왔는데 농담을 막 해가지고, 새 교우가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그래서 교회에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몰라요. 농담을 함부로 할 것이 아니라, 농담을 하는 것은 본전 찾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정말 신중하게. 특별히 농담이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남을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리는 것을 통해서 농담을 할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인데, 백해무익한 농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다섯 번째로 평상시에 내가 이 사람과 얼마나 친한 관계였는가를 먼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전혀 친하지도 않은데 내가 벌써 친해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말을 해버린다고 하면, 결국 받아들이는 자는 엄청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친함의 관계를 분명하게 기억을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친함의 관계를 넘어서서 더 친한 말을 하려고 한다고 하면, 결과적으로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겁니다. 이 외에도 아마 여러 가지 지혜로운 방법들이 있을 것 같은데 좀 알려주세요. 어떻게 하면 말을 좀 잘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정말 우리들의 말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정말 따뜻하게 좋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 좋은 지혜들을 좀 알려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잠언서 16장 29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좋지 아니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포한 사람이 패역한 사람이고, 패역한 사람이 불량배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악한 사람들은 말로써 그렇게 나쁜 짓을 할 뿐만 아니라, 29절의 말씀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그 사람은 그 이웃들을 꾀어서 좋지 아니한 길로 인도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말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자신의 말에 동조하게 만드는 것이죠. 같이 수근수근거리면서 함께 말로써 죄를 짓자고 그렇게 이끌어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인데요. 그러한 유혹들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러한 일에 동조해서는 안 되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끌어들이면서 악을 행하자 할 때, 그것이 행동을 통해서든 말을 통해서든 나쁜 일을 하자고 우리들을 포섭해서 함께 악을 행하자고 할 때,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속아 넘어간다고 하면, 이 사람을 따라간다고 하면, 나도 불량배가 되는 것이구나, 나도 건달이 되는 것이구나, 나도 벨리알이 되는 거구나 깨달아서, 그렇게 이웃을 꾀어 좋지 아니한 길로 가려고 할 때, 우리가 단호하게 거절해야 되는 것이죠. 악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가지 않아야 되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잠언서 16장 30절 말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눈짓을 하는 자는 패악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눈짓을 하는 걸 통해서 패악한 일을 도모하기도 하고, 입술을 닫는 것을 통해서 악한 일을 이루기도 한다는 것인데, 반드시 입술을 닫고 눈을 눈짓을 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짓을 다해서 악한 일을 하는 것이죠. 강포한 자, 패역한 자, 불량배와 같은 자들이 악을 행할 때 눈짓을 하든 손짓을 하든 발짓을 하든 입을 벌리든 입을 닫든 눈을 크게 뜨든 입을 크게 뜨든 귀를 열든, 무슨 짓을 하는 손짓, 발짓을 하든 어떤 짓을 하든지 그 패역한 일, 악한 일을 하자고 그렇게 달려들게 될 때에, 우리는 그러한 유혹에 넘어갈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선한 길로 우리가 불량배의 길로 가지 않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넘어갑니다. 좋은 이야기보다는 나쁜 이야기에 더 귀가 솔깃하게 되어 있고, 선한 일을 하는 것보다는 악한 일을 하자고 하는 일에 우리는 더 쉽게 끌려가기가 쉽습니다. 그게 우리들의 연약함이죠. 우리의 부족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면, 다시 한번 주님의 자녀가 되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고 주의 사랑을 전하며 정말 선한 길로 의외의 길로 걸어가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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