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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인가? 탐욕인가? (잠 16:26)

오늘 우리는 잠언서 16장 26절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데요. 잠언 16장 26절 1절 말씀을 읽었는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렇게 감이 오십니까? 좀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십니까? 고되게 일하는 자는,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쓴다”? 왜 고되게 일하는 사람이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쓴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우리 한국말로 번역된 이 성경 말씀만 보아서는, 이 말씀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원문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좀 이해가 안 될 때는 쉬운 히브리어를 한번 들여다봐야 되겠죠? 그래서 한번 들여다보니까, 히브리어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네페쉬 아멜 아무라 로 키 아카프 알라이우 피후”라고 하는 그런 문장인데요. 영혼, “네페쉬”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라고 하는 말이고, “아멜”이라고 하는 것은 일꾼이라고 하는 말이고, “아멜”과 비슷하죠. “아므라”라고 하는 것은 “그가 일한다”라고 하는 말이고요. “로”는 “그것을 위해, 그를 위해, 그것을 향해” 이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키” 왜냐하면, “아카프” 다그친다, 압박을 가한다, 누른다, 그런 의미가 되겠고요. “알라이우”는 “그를, 그에게”라고 하는 말이고, “피후”라고 하는 것은 “그의 입은”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번역을 해보면, 어떻게 번역이 되냐면, “일하는 자의 영혼은 그것을 위해서 일한다. 왜냐하면 그의 입이 그를 다그치기 때문이다.”로 번역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히브리어 문장을 개역개정 성경, 우리가 읽은 이 성경에서는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라고 번역을 해놓았고요. 표준새번역이라고 하는 성경에서는 어떻게 번역을 했냐면, “허기진 배가 일하게 만들고, 그 입이 사람을 몰아세운다”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표준 세 번역의 번역도 사실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같은데요. 그래서 한번 그냥 사역을 해본다고 한다면, 맨 밑에 있는 번역이 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네페쉬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라고 하는 말인데, 일하는 자의 영혼이라고 번역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혼이라고 하는 말은 그냥 사람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해도 됩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은 무엇을 위해 일한다? “자신을 위해 일한다.” “그것을 위해 일한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이냐? 그냐? 뒤에 나오는 “입”을 받는다고 한다면, “자신의 입을 위해서 일한다”로 번역할 수가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입이 그를 압박하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잠언서 16장 26절의 말씀의 의미가 뭐냐면, 이 입이 사람을 이렇게 강요하기 때문에, 입이 사람을 몰아치기 때문에, 자꾸만 압박하기 때문에, “그 입을 위해서 사람이 일을 하게 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식욕이라고 하는 말이 사실은 없지만, 그 식욕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이 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입이라고 하는 게 무슨 무엇을 나타내는 말이죠? 먹고 싶은 것, 배고픔,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배가 고파서 무엇인가를 먹고 싶은 그런 식욕이 있을 때, 입에 욕망이 있을 때, 그 욕망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 그 사람을 자꾸 충동질해서, 입이 동기가 돼서, 그래서 그 일 하는 사람이 자신이 먹기 위해서 자신이 먹고 그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 사람이 일을 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한다고 한다면, 식욕이, 사람에게 무엇인가 배고픔이 있고 허기짐이 있는데, 그 허기짐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 허기짐을 해결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게 된다. 사람들이 왜 일을 하는가? 사람들이 왜 움직이는가? 왜 활동을 하는가? 무엇인가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을 하고 수고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다 허기짐이 있습니다. 배고픔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허기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래서 무엇인가를 사 먹을 수 있게,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이 일을 한다고 하는, 그런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한 말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먹을 것만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고, 사실은 모든 종류의 욕망, 모든 종류의 욕구를 다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종류의 욕구가 있는 것이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는 정말 다양합니다. 매슬로우(Maslow)라고 하는 학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섯 단계의 욕구가 있다고 하는 이론을 발표해서, 이 매슬로우의 5가지 욕구론이 아주 유명한데요. 많이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제일 기초적인 욕구는 무엇인가? 식욕, 무엇인가를 먹고자 하는 욕망, 성욕, 수면욕, 배설욕과 같은 가장 기초적인 욕망이 있는 것이고, 그것에서부터 욕구가 충족이 되면, 그다음의 욕구를 갈망하게 되는데, 위험과 고통으로부터 회피하고자 하는 욕구, 안정하고자 하는 그런 욕구가 있는 것이고, 그 욕구가 해결되면 그다음에는 애정의 욕구, 친화 소속감의 욕구들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충족이 되면 이제는 사람들로부터 승인을 받고 존경을 받고 지위와 명예를 얻고자 하는 그 명예 욕 같은 것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그것마저도 충족이 되면 맨 최고 단계의 욕구가 무엇인가? 자아실현의 욕구 그래서 자기 자신의 사람 됨됨이를 성취하고자 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있는 다양한 욕구가 단계별로 충족을 시켜 나가면서, 그런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런 욕구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죠. 만일 이런 욕구가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잘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뭐예요? 사람들이 우리 자녀들이 좀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는데, 우리 자녀들이 열심히 살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욕구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야, 이것 좀 해봐라.” 그러면 “별로 난 그걸 원하지 않아요.” “내가 왜 성공해야 되는데? 내가 왜 좋은 대학 가야 되는데? 내가 왜 저걸 해야 되는데?” 아무런 목표 의식도 없고, 아무런 열망도 없는데, 그 아이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하면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욕망이 있는 아이들은 공부를 합니다. 부모가 공부를 시키지 않아도 부모가 다그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아이들과 경쟁을 하면서, 내가 저 아이를 이기고 싶다고 하는 그런 욕망이 있고, 내가 저 아이보다 더 뛰어나서 더 좋은 평가를 얻고 싶다고 하는 그런 욕구가 있을 때, 아이들은 말하지 않아도 가서 도서관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죠. 열심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그 동력이 어디에 있는가? 그 동력은 우리들에게 채워지지 않는 갈망, 우리들에게 채워지지 않는 그 욕구들이 있기 때문에, 그 욕구에 의해서 우리들은 움직이게 되어 있고 일하게 되어 있고, 우리가 그래서 그것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 어쩌면 우리가 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말을 끌고 강물에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그 말로 하여금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 물을 마시려고 한다면 갈증이 있어야 물을 마시는 것이지, 억지로 끌고 갔다고 해서 그 말이 물을 마시지 않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사실 우리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쳐야 할 때, 믿음을 전수해야 될 때, 그 아이들을 억지로 교회 안에 데려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들이 믿음에 대해서 어떤 갈망을 가질 수 있도록, 이 아이들의 갈망을 열어주고, 이 아이들이 영적인 욕구가 생길 수 있도록, 그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인도해 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교훈으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냥 우리 예전에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할 때는 그냥 억지로 데려다가 끌어다 놓고, 그래서 찬송 부르게 하고, 성경 암송을 하게 하고 해서, 그렇게 하면 아이들에게 믿음이 들어갈까 생각했는데, 대부분 많이 실패했던 이유가 무엇이냐면, 아이들에게 전혀 갈망이 없는데, 영적인 갈급함이 전혀 없는데, 그런데 교회 안에 끌어다 놓으니까, 그냥 지겹기만 하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그 단계까지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믿음을 제대로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이 아이들의 영적인 갈망들을 일으키고, 영적인 호기심과 그리고 주님을 찾게 만드는 그런 갈망들을 자극시켜 줄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찾아보는 일들이 중요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들에게는 이러한 허기짐이 있기 때문에, 배고픔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움직이게 되고 무슨 행동인가를 하게 된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 사람들에게 욕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까? 욕구가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일까요? 종종 종교에서는 욕구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특히 불교와 같은 종교에서는 욕구라고 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불교와 비슷한 류의 그런 종교 자신을 비우려고 하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종교에서는, 그 종교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갈망들,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욕구 자체들을 수련을 통해서 없애버리는 것, 그것이 종교적인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산속에 올라가는 것이죠. 출가해 버리는 것이죠. 이 세상 속에서의 그 삶을 다 떨쳐내 버리고, 인연을 다 끊어버리고, 오로지 산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참선을 하면서, 도를 닦으면서, 그래서 내 마음속에 있는 그런 어떤 조그마한 욕망, 조그마한 그 욕심, 이런 것들을 다 다 씻어내 버리고, 그래서 완전히 내 마음속에서부터 그런 욕망 욕구 갈망 이런 것들을 완전히 없애버리게 될 때, 우리가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보고 있고 그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인 것이죠. 우리의 욕망 자체를 없애버릴 수가 있겠는가? 없애는 것이 가능한가? 사실은 가능하지가 않아요.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늘 부족한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부족한 것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은 그 부족한 것을 채워보고 싶은 갈망들이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러한 그 욕심을 완전히 내버려서, 없애버린다고 하는 그 목표는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목표도 아닌 것이죠. 과연 욕망을 없애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욕망이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라고 욕망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욕망 자체를 없애버려야 된다고 그렇게 목표를 삼았는데, 사실상 그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이냐고 하면 나쁜 게 아니에요. 욕구 자체가 나쁜 것이냐?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과도한 욕심, 정말 부당한 욕심 같은 것들은 결국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는 있겠지만, 과도한 욕심과 과도한 욕구는 결국 불평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되겠지만, 그러한 과도한 욕심이 아니라 적절한 욕망, 적절한 욕구 그리고 하나님의 그 테두리 안에서 가지게 되는 그런 갈망 같은 것들은 나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한 욕구를 없애버리는 것보다는 적절한 욕구를 통해서, 그 욕구를 적절하게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고,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죠.

오늘 잠언서 16장 26절에서 하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우리는 왜 행동을 하는가? 일꾼이 왜 일을 하는가? 일을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배고픔 때문에 일을 한다는 겁니다. 입 때문에, 자기의 입이 자기를 이렇게 압력을 넣기 때문에, 동기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일을 한다는 것이죠. 배고픔이 없으면 일을 하겠어요? 안 하죠. 배고프지 않은데, 왜 일을 하겠습니까? 돈이 많은데 왜 일을 하겠습니까? 남의 눈치 봐가면서, 왜 일을 하겠습니까? 남들한테 싫은 소리 들으면서, 왜 일을 하겠습니까? 싫은 소리 들으면서도, 참으면서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한 것이고, 그것을 채워서 우리 자녀들을 먹여야 될 필요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을 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욕구 자체가 나쁜 것이냐 하면, 나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하는 게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적절한 욕구 그리고 그 적절한 욕구를 채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죠. 식욕이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좋은 거예요. 왜 식욕이 당깁니까?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있는데, 그 영양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식욕이 생겨나서, 그래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먹게 만들고, 그 식욕에 따라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먹게 되었을 때, 그 음식이 우리들에게 공급이 되어서, 부족했던 그 영양분들을 공급해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식욕인 겁니다. 그러니까 식욕이 있는 게 정상이에요? 나쁜 거예요? 정상이에요. 아침에 배고픈 거 정상이에요. 점심때 배고픈 거 정상이에요. 저녁때 배고픈 거 정상이에요. 그 식욕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먹을 수 있는 그 동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무엇이 문제입니까? 식욕이 없는 게 문제예요.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는 식욕이 없는 분들이 계셔요. 그 식욕이 없으니까, “목사님, 제가 식욕이 없어졌습니다. 제가 이런 고상한 단계에 올라갔습니다”라고 말하시는 성도님은 한 분도 없습니다. 식욕이 없으면 저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제가 요즘 식욕이 없어요.” 근심하게 되는 거죠. 식욕이 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아주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죠. 잠언서의 말씀은 이렇게 우리가 무엇인가 갈망이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식욕은 우리가 음식을 먹고 섭취하고 영양을 공급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된다고 하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언제 문제가 되는 것이죠? 과식하게 되면, 엄청나게 막 스트레스받아가지고, 막 먹는 거 있잖아요? 스트레스받아가지고 먹는 걸로 해결해야 되기 때문에, 막 먹어서, 그래서 우리에게 적절하게 필요한 영양 공급이 아니라, 과도하게 영양분을 공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몸이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폭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결국 이 세상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적절하지 않은 욕구에 있는 것이지, 욕구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닌 것이죠.

남녀 간의 사랑도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옛날에는 교회에서 연애한다고 하면, 막 어떻게 했어요? 옛날에는 교회에서 왜 연애하냐고 하면서, 죄인 취급하면서, 막 혼냈어요. 제가 이번에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목사님 어떤 부부의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요. 교회 안에서 사귀게 돼가지고, 목사님한테 가서 “목사님, 우리가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얘기를 했더니, 그 목사님이 그 두 사람을 세워놓고, 한 2~3시간 동안 교회에서 왜 연애를 했느냐고 엄청나게 막 혼을 굉장히 많이 받아서, 그래서 정말 너무나도 힘들었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하는 그런 목사님 사모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나쁜 게 아니고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정당한 테두리 안에서의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거예요. 바람직한 것이고 고상한 것이고 행복한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랑이 어디서 문제가 돼요? 그 적절한 테두리 밖으로 사랑의 욕망이 밖으로 튀어나갈 때 문제가 되는 것이죠. 부부 사이에 그 적절한 관계를 넘어선 남녀 간의 사랑이 문제가 되는 것이고, 잘못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욕망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남녀 간의 사랑이 적절한 테두리 안에서는 복된 것이고, 사실은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방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물질에 대한 욕망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을 더 많이 갖고 싶다고 하는 것, 물질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나쁜 것일까요? 좋은 것일까요? 괜찮은 것인가요? 아니면 악한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수많은 종교를 통해서 들려주는 얘기가 무엇이냐 하면, 물질 자체는 나쁜 것이다. 물질은 나쁘기 때문에, 소유를 아예 없애버리는,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이 그게 가장 고상한 것이고, 물질이 없이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갈망해야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절대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죠. 우리가 수고하고 애를 써서 그래서 열매를 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며, 우리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당연히 우리가 수고하고 애씀으로 무엇인가를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악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물질에 대한 욕망도 어디서 문제가 됩니까? 과도한 욕심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내가 열심히 일을 하고 수고하고 애써서 그래서 정당한 것을 얻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고, 칭찬받아야 될 것이고, 박수를 받아야 될 것이지만, 그러나 과도한 욕심 때문에 내가 수고하지 않은 것들을 속여서 빼앗거나, 남의 것을 탈취하거나, 여러 가지 다른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들면서 그래서 내가 많은 불을 취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정상적이고 괜찮은 욕구는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것이고, 그러나 잘못되고 과도한 욕구는 탐욕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데, 잘못된 방식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죠. 정상적인 욕구는 우리를 발전시키고 우리를 만족시켜 줄 것이지만, 그러나 과도한 욕구는 우리를 파멸시키고, 결국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분별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적절한 그리고 정상적인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그 은혜의 테두리 속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탐욕으로 과도한 방법으로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해서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무한대로 탐욕을 부리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탐욕을 가리켜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죠? 우상숭배와 같은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데,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물질을 우상으로 섬겨서, 그래서 하나님의 법칙을 어겨가면서까지 물질을 취하려고 하는 그 탐심은 “그게 바로 우상숭배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당하게 수고하고 애쓴 결과가 아니라,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그런 탐심들은 악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아는 모든 것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실 만한 일인가? 분별해 가면서,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달란트대로, 그 하나님의 축복의 테두리 안에서, 바른 성취들을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탐욕을 부리다가 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되는 것이죠. 제일 처음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하와와 같은 사람이죠. 하와는 선악과를 탐냈어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탐낸 것이죠. 이미 하나님께서 충분히 많이 주셨는데, 그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고, 자족할 줄 모르고,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그 열매를 탐욕으로 바라보아서, 그것을 취한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는데, 결국 그 하와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는 그런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나아만 장군에게 좇아가서, 거짓말을 해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챙겨 받았던 엘리사의 종도 역시 탐심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수고하며 땀을 흘린 것이 아니라, 거짓말로 남의 것을 탈취했던 그 엘리사의 종은 탐심을 부린 거였고, 그 탐심을 부린 결과, 그는 옷을 얻고 달란트를 얻은 줄 알았는데, 결국 나만의 가지고 있었던 나병까지 얻게 되는 그런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제사장으로서 그 성전에서 나오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 권한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성전에서 나오는 음식들을 먹는 것, 적절한 그 하나님의 법 테두리 안에서 먹는다고 한다면 괜찮았어요. 먹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오히려 제사를 폄훼하면서,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먼저 가서 가져왔고, 자기들이 욕심을 부려서 잘못된 이득을 취하려고 했을 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사무엘 상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갈망, 욕망 이런 것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바른 갈망인가? 판단해 보아야 하는 것이고요. 그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과도한 욕심에 탐욕에 빠지지 아니하도록, 우리 자신을 잘 제어할 필요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자족하는 마음을 배워야 하는 것이죠. 디모데전서 6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러니까 자족하라고 하는 말씀은 그냥 적당히 최선을 다하지 않으며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보면서 그리고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수고했다고 한다면, 그 얻은 것으로 감사하면서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함에도 처할 줄 알고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또한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의 탐욕이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악한 일을 하게 만드는 그런 죄악의 길로 달려가는 그러한 우리 인생이 되지 않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왜 움직이는가? 갈망 때문에 움직입니다. 우리의 입이 우리를, 우리의 입이 무언가를 먹고 싶은 그 식욕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게 만들고 일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그 동기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가 그 입에 입이 우리를 식욕이 먹고자 하는 그 욕망 갈망, 이것이 과연 정당한 갈망인지 아니면 과도한 탐욕인지 분별해 가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거룩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주관합니다.


때로는 이 세상 가운데서 과도한 탐욕을 부려서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도 많이 보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쫓아가면서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신분을 보면서 겸손하게 겸손하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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