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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압의 처형 (왕상 2:26-35)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제사장 아비아달을 제사장의 직분에서부터 파면시켜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와 요압 장군을 브나야로 하여금 죽이게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장 아비아달과 요압 장군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이 사람들은 아도니야를 도와주어서 반역을 꾀했던, 반역자 무리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아도니야가 여전히 왕권을 노리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된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처형했다고 하는 이야기,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었는데요. 그러니까 반역을 꿈꾸고 있는 왕이 되고 싶어 하는 그 아도니야 한 사람만 제거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날까요? 그게 아니라, 아도니야를 도와서 함께 반역을 도모했던 사람들도 같이 처형시키거나, 힘을 쏟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도니야도 처형을 했겠지만, 이제는 그 아도니야를 도와주었던 아비아달 제사장으로 하여금 더 이상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파면시켜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요압을 처형해서, 죽여서 그 반란의 씨앗을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오늘 그래서 요압을 솔로몬 왕이 죽이게 되었는데요. 이 요압에 대해서는, 사실 다윗 왕이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유언을 했던 내용 가운데 있습니다. 다윗이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뭐라고 유언을 했습니까? 열왕기상 2장 5절 6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백발이 평안하게 무덤으로 가지 못하게 만들라고 하는 이야기는 천수를 다하다가 그냥 자연스럽게 죽게 할 것이 아니라, 미리 죽이고 쳐 죽여서, 처단해서, 그 사람을 처단해 버리라고 하는, 그런 유언을 다윗이 솔로몬에게 했던 것이죠.


따라서 솔로몬은 그 다윗의 유언을 기억했을 것이고, 그리고 아도니야가 반역의 음모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아도니야를 처형한 다음에, 그다음 수순으로 이 요압 장군을 처형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요압은 아도니야가 죽게 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이 요압은 도망갔습니다. 어디로 도망갔습니까? 저 제단을, 제단으로 도망가서 제단뿔을 잡고 도망갔습니다. 아비아달을 파직했다고 하는 그 소식을 듣고서, 요압은 도망가서 제단 뿔을 잡았는데, 제단 뿔을 잡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가운데, 어떤 사람이 실수로 누군가를 죽였다고 한다면, 빨리 성소로 들어가서 거기에 있는 제단의 뿔을 잡으면, 그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법이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2절에서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만들어놓고, 만일 우리가 과실치사로 누군가를 죽였다고 한다면, 당시에는 이런 죽음이 일어났을 때, 그의 가까운 친척이 원수를 갚아주는 것이 하나의 법칙이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면, 그 일가친척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될 위험이 있을 경우, 빨리 도망가서, 도피성으로 도망가서 거기에 있는 제단뿔을 잡고 제단에 있으면, 그러면 법으로 보호해 주는 겁니다. 제사장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 사람을 절대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는 그런 법이 있었기 때문에, 이 요압 장군은 자기가 죽임을 당할 수 있겠다고 하는 위험을 감지한 다음에 어디로 도망갔는가?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도피성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제단 뿔을 잡은 것입니다. 그 제단 뿔을 잡고 나를 살려달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요압은 그렇게 제단 뿔을 잡으면 살 수 있습니까? 살지 못합니까? 살지 못해요. 왜냐 요압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고,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압은 다윗 시절에 아브넬이라고 하는 사람을 죽였고, 아마사라고 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개인적인 원한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이 두 사람을 죽인 것이죠. 이스라엘 민족의 아주 위대한 장수였던 아브넬과 이스라엘 민족의 아주 유명한 장군이었던 아마사라고 하는 두 사람을 그렇게 제거해서, 그가 요압 장군이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요. 그러한 죽음에 대한 형벌을 결국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열왕기상 2장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몇 가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첫 번째 우리가 묵상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죄는 반드시 처벌을 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죄는 처벌을 받습니까? 안 받을 수도 있습니까? “받는다”라고 생각을 하셔야 돼요. 지금까지 요압은 악을 행했으면서도, 용케 잘 지내왔습니다. 아브넬이라고 하는 죄 없는 사람을 죽였고, 아마사라고 하는 죄 없는 사람을 죽였는데, 그 죄를 저질러 놓고도, 요압이라고 하는 사람은 용케 목숨을 부지하면서, 이스라엘 나라에서 그런대로 잘 지내왔던 것이죠. 하지만 솔로몬이 왕이 된 다음에, 결국 이 요압의 죄는 솔로몬이 다스리게 되었고, 결국 요압의 죄에 대한 대가를 솔로몬 왕이 판결을 내려서, 그 요압을 죽이게 됨으로 말미암아, 요압은 자신이 행한 악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가 얻어야 될 교훈이 무엇인가? 악한 일은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다. 악한 일은 반드시 처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만두지 아니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미워해도 될까요? 이것을 미워해도 될까요? 안 돼요 왜 안 돼요?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욕심을 부리고 탐욕을 부리며 살아도 괜찮을까요? 안 돼요. 우리가 행하는 그 모든 악한 일들이 결국 심판을 받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오늘 요압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겁니다. 남의 것을 착복하고 부당하게 취하고, 남의 것을 빼앗고 악을 행하는 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는 우리 어떻게 될지는 우리가 모르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교훈으로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오면서 그렇게 공의롭게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나요? 받지 않는 것 같은가요? 받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쁜 짓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미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게으르게 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사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사명을 무시하면서 사는 거예요. 왜? 괜찮네!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아도 아무 문제없네. 악을 행해도 오히려 더 잘 사네. 악을 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 그런 현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 죄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구나.”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고,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고, 총칼로 무참히 짓밟아버리면서, 그렇게 악을 행한 사람이 여전히 권력을 주고 여전히 떵떵거리며, 그 후손들은 아주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는 겁니다. 악한 자들이 오히려 잘 되고, 그리고 선한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는 그런 불합리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들을 바라볼 때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거죠. 선을 행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데, 선을 행해도 아무런 보상이 없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데, “의롭게 살아도 소용이 없구나”라고 하는 그런 자괴적인 생각들이 드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는 데도 떵떵거리면서 잘 살고 있고, 오히려 잘 나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은 자꾸만 흔들리고 있는 겁니다. “의롭게 살아봤자 소용이 없구나,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구나”하는 그런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장악할 때가 많이 있는데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결국 악을 행한 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주관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말씀,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부터 1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착한 일을 하는 게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결과가 있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요압이 처형을 당하는 그 끔찍한 장면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우리가 신실하게 오늘 하루 오늘 하루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근 저는 아주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성적인 문제를 인해서 결국 발각되어서 물러나게 되었다고 하는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문제를 저질렀던 것이 발각이 되어 물러났다고 하는 소식이죠. 이 소식을 들으면서 저는 성탄의 의미를 더더욱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가? 왜 만왕의 왕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야만 했는가? 그것은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고,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회만 되면 언제든지 쓰러질 수 있고, 언제든지 넘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기에,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이죠.


또 하나 생각했던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악을 행하면, 결국 심판이 있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왜 망각하면서 살았을까? 잘못을 하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왜 망각하며 살았는가? 성경은 그렇게 경고하고 있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을 거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모른 척하면서 애써 외면하면서 살았는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고, 무서운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왜 모르면서 살았는가?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고, 이 세상에서 밝혀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성공한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하루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솔로몬은 모든 죄인을 처벌하지 않았을 겁니다. 요압은 처벌했지만, 요압과 비슷한, 그리고 그 주변에 요압보다 더 나쁜 죄를 짓고, 아니면 그와 비슷하거나 덜 지은 수많은 죄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있었지만, 그 모든 죄인들을 다 처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넘어가는 이유가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가르침은 최후에 심판이 있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결단을 매일매일 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솔로몬이 요압을 처형한 것이 잘한 일일까? 혹은 옳지 못한 일이었을까?”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위인들의 행동이 모두가 다 옳은 것이라고 하는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 예를 들면 다윗이 있을 수 있겠고, 아브라함이 있을 수 있겠고, 바울 사도와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겠고,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정말 믿음의 사람들이 행한 행동들은 다 옳은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조건 본받아야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은 누구냐면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와 똑같이 실수도 많고, 잘못도 행하고, 악을 행할 수 있는 판단을 바르게 하지 못할 수 있는 그런 연약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죠.   우리는 늘 사람들을 평가할 때 이분법적으로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이 사람은 유익한 사람인가? 유익하지 못한 사람인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이고 사실은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상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은 정말 엄청나게 복잡한 것이죠. 장점이 있는 그 사람에게서 악한 모습이 있을 수 있고, 악한 줄로만 알았던 그 사람에게서 장점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단순하게 악인과 선인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면도 있고 선한 면도 있고, 장점도 있는가 하면 단점이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이 다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가? 그 사람의 어떤 점을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인가? 장점을 보아야 합니까? 단점을 보아야 합니까? 무엇을 봐야 되죠? 장점을 봐야 해요! 단점을 보면 싫어지고 미워해지고, 그리고 가까이할 수 없고, 결국은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아무런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점들이 많이 있지만, 그 사람의 장점들을 보고, 그 장점들을 우리가 인정해 주고, 그리고 함께 일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떤 관점을 회복해야 되는가? 항상 장점을 보는 그런 관점을 가져야 돼요. 장점! 저분의 장점은 무엇일까? 저분의 장점은 무엇일까? 저분의 장점은 무엇일까? 무엇이 장점인가를 봐야 되는 거예요. 장점인가를 보면 행복해져요. 장점을 보면 너무나도 기뻐요. 그런데 단점을 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남편은 이것도 나쁘고 저것도 나쁘고, 저것도 나쁘고 “다 싫은 것만 있다”라고 생각하면, 그 가정이 온전히 세워질 수가 없는 것이죠. 장점을 봐야 되는 것이 맞습니다. 부모는 아이들을 보면서 장점을 봐요. 어린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어린아이에게 무슨 장점이 있어요? 장점이 아무것도 없어요. 말을 할 줄 압니까? 똥오줌을 가립니까? 스스로 뭘 먹을 수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저 할 수 있는 것이 울고 먹고 싸고 하는 것밖에 모르는 그 아이를 보면서, 부모는 무엇을 보는가? 장점을 보는 거예요. 아이가 울면 이 녀석의 목소리가 크구나. 성악가가 되려고 그러나? 세상에 무슨 거기서 성악가가 나오나요? 이 아이의 눈망울이 그냥 총명하게 보이면, 이 아이가 공부를 잘하려고 그러나? 장점을 보고 그 아이를 길러내는 것이죠. 사랑이 없는 사람은 단점만 보고 깎아내리고 무시하고 그리고 배척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가져야 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단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보게 해 주옵소서. 좋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번 다시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요압이 잘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 요압이 잘못했다고 하는 그 단점을 보고, 요압을 죽여버린 것이 잘한 일일까요? 그것은 실수한 일일까요? 요압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잘못한 점도 있지만, 그러나 그 요압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요, 무사이기 때문에, 이 사람을 잘 활용해서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의 국방을 강화시켰다고 한다면, 어쩌면 더 좋은 나라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사울이라고 하는 왕은 다윗을 보면서 다윗의 장점을 본 것이 아니라, 다윗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단점만을 보고, 다윗을 내치기 시작했고, 다윗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유익들을 다 모조리 발로 차버린 것이 사울왕의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과연 솔로몬이 요압을 죽여버린 것이 잘한 일일까요? 잘못한 일일까요? 그걸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 있는 사람들을 다 쳐내기 시작하면, 행복한 세상이 오는가? 행복한 세상이 오지 않는 거죠. 저 사람은 이것 때문에 미웠으니까 저 사람은 탈락, 저 사람은 이것이 단점이니까 이것도 탈락. 그래서 단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둘씩 다 탈락시켜 버리고, 오로지 장점만 있는 사람들만 모아서, 그래서 우리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하면, 그러면 정말 우리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요? 안타깝게도 우리 기독교 내에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인데요. 우리가 고상한 신앙 철저한 믿음을 고수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흠이 있고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잘못된 게 있으면, 그 사람을 무조건 이단 판정해 버리는 겁니다. 저 사람은 이단이야. 저 사람은 잘못됐어. 그러면서 자꾸만 비난하는 것이죠. 저기 저 신사 참배한 사람들, 저 사람들은 땡이야. 저 사람은 타협주의자야. 땡이야. 오로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 우리끼리 정말 믿음의 사람들을 정말 순수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정말 순수한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하는 열망을 가진 순수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순수한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태도냐? 바람직한 태도냐?”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면 전혀 성경적이지 못한 태도일 뿐입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였을 뿐이고, 결국 망하는 길로 가는 길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순수한 신앙, 우리들이 정말 철저하게 개혁주의 칼빈주의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겠다고 외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칼로 쳐내는 그런,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어요. 그것이 정말 순수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정말로 진정으로 바른 신앙이 아니라, 그건 바리새파적인 신앙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겁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죄인을 품으셨어요. 세리를 품으셨어요. 창기들을 품으셨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쳐서 함께 일하게 만드신 것이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베드로와 같이 정말 여러 가지 단점들이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했던 흠이 많고, 정말 자격이 불충분한, 너무나도 무자격인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부탁하시며, 교회를 맡기신 것이고, 교회를 핍박하며, 그래서 교회를 박살 내려고 했던 바울도 부르셔서, 그래서 주님의 교회를 일으키게 만드시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한 번 더 질문을 던져보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과연 솔로몬이 요압을 죽인 일이 잘한 것일까 못한 것일까?   결론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품으라고 하는 말씀도 있지만, 동시에 쫓아내라고 하는 말씀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11절에서부터 13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 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성경에는 내쫓으라고 하는 말씀도 있어요. 더군다나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하신 말씀 가운데 계시록 2장 20절 말씀 가운데서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 교회 내에 있는 가짜 선지자 이세벨을 내치지 않고, 쫓아내지 않고, 그냥 미적거리면서 내버려 두었던 그것을 주님께서는 그건 잘못한 것이다. 쫓아내야 했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어려워요. 어떤 때는 쫓아내야 하고, 어떤 때는 품어야 해요. 어떤 때는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장점을 보면서 품어야 할 때가 있는 겁니다. 어떤 때는 그 사람의 그 단점 때문에 품을 수 없고 쫓아내야만 하는 때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압도 마찬가지인데,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거예요. 잘했어요? 못했어요? 잘했을 수도 있고, 못했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품어야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밀쳐내야 되고, 잘라내야 되는 그것을 결정하는 게 지혜예요. 의사 선생님들을 보니까, 지혜로워서, 그걸 결정하더라고요. “환자님, 선생님, 이것은 잘라내야 되겠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이것은 그냥 수술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둡시다.” 잘라내야 될 때와 붙여놓아야 될 때, 잘라내지 않아야 될 때를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한 거예요. 그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데, 그래서 오늘 우리가 또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여, 지혜를 주옵소서.” 정말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 있는데,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실제 우리의 교회 가운데서, 실제 우리의 가정 가운데서, 실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적용해 나가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고, 그것은 정말 지혜가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엎드리고 또 묵상하고 고민하고 또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되고, 우리가 함께 지혜를 모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야고보서 1장 5절의 말씀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의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말씀해 주셨는데, 오늘 우리가 기도하면서 지혜를 주옵소서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솔로몬은 어느 순간에는 용납, 어느 순간에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실 두 가지 다른 처분을 한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아비아달 제사장은 죽이지 않았어요. 그냥 그 사람의 직분만 파면시키고,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요압은 죽이는 처형하는 일을 감당하게 된 것이죠.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가 안아야 될 때와 껴안아야 될 때와 멀리해야 될 때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요압은 제단 뿔을 잡았지만, 그 제단뿔 때문에 요한이 목숨을 건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 제단 뿔을 잡고 있으면, 목숨을 살릴 줄 알았는데, 그 제단 뿔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처형을 당한 것이죠. 그런데 오늘 우리들도 비슷한 것을 붙잡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잡으면 나를 살려줄까? 이것을 붙잡으면 내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들이 많죠. 그게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우상인 것이죠. 돈을 잡으면 그 돈이 나를 살려줄까? 성공이 나를 살려줄까? 어떤 명예가 권력이 혹은 정치가 혹은 이 세상의 것들이 우리 자식이 나를 살려줄까? 우리가 붙잡지만, 사실은 그것들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죠.   그런데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를 잡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허망한 제단을 잡고 살려고 하지 말고, 허망한 돈 붙잡고 살려고 하지 말고, 허망한 이 세상의 것들을 붙잡고 살려고 하지 말고,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병든 손 내밀어라.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아픔을 아픔의 손을 내게 내밀라. 그러면 내가 너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워낙에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우리의 참된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붙잡으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성탄의 시즌, 우리들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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