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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잊을 수 없는가?

– 이국진

사랑은 한번 용서했으면, 더 이상 그 잘못을 기억하지 않고 잊는 것인데, 왜 우리는 용서해 주었으면서도 과거의 잘못을 결코 잊을 수 없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용서를 너무 쉽게 해주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용서를 해주어야 한다고 하지만, 값싼 용서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쉽게 용서를 해 준 다음에, 나중에 후회하는 것이다.

한국 영화 [밀양]에서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고 죽인 학원선생에 대하여, 주인공 신애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마음으로 용서해 버렸다. 가해자가 잘못을 뉘우치는 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자신이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하는 이유만으로,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가해자를 만나기 전에 마음으로 용서했다. 그러할 때 주인공 신애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죽고, 오로지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가는 소망의 근거가 되었던 자식이 죽었을 때 가졌던 그 충격과 좌절감이 신애를 누르고 있었으나, 그가 마음으로 용서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될 때 그는 마음의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용서는 속박당하던 자를 자유로이 풀어주는 것인데, 바로 그 속박당하는 자가 자기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던 코리텐 붐(Corrie ten Boom)의 말처럼, 신애는 가해자를 마음속으로 용서할 때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쉽게 해준 용서는 자신이 해방감을 누리기 위한 용서일 뿐이지, 결코 진정한 용서는 될 수 없다. 신애는 감옥에 찾아가 만난 가해자의 입에서 이미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받았으며, 신애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가해자로부터 철저한 회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해버린 용서는, 가해자가 죄책감으로 피해자 앞에서 떠는 그 모습을 보지 않을 때마다 열 받게 되어 있다. 이미 마음으로 용서한 줄 알았고,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평화를 누렸고, 이미 마음속에서는 그 일을 까마득히 잊은 줄 알았는데, 뻔뻔한 가해자를 바라볼 때마다 분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용서하고 한번 용서했으면 다시는 그 잘못을 생각하고 또 악한 감정을 갖지 않기 위해서, 철저하게 죄를 다루는 일이 필요하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했다. 고린도 교회에 악을 행하는 자가 있었다. 그때 바울 사도는 그 사람을 그냥 용서하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고 지나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그 사람을 징계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그 사람을 징계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였다. 그러자 그때 바울 사도는 그를 용서해 주고 받아주어야 한다고 다시 편지한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너무 근심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위로해 주고, 다시 교회의 정회원으로 받아주어야 한다고 하였다(고린도 후서 2:5-11).

죄를 철저하게 다루지 않고, 진정한 회개가 없는데도 대충 용서해 버리면, 결국 죄를 키우게 될 뿐만 아니라, 이는 무책임한 것이 된다. 그리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다시 그 죄를 들먹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죗값을 두고두고 치르게 해서는 안 된다.

놀랍게도 우리 교회 내에서 영적인 지도자들의 타락하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보게 된다. 성적인 타락이나 물질적인 타락을 영적인 지도자가 범하는 일이 있다. 영적인 지도자를 넘어뜨리는 것이 훨씬 더 파급 효과가 크기 때문에 사탄이 온갖 공격을 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때 교회 내에서 은혜파와 율법파로 나뉘게 되어 서로 싸우는 모습을 쉽게 목격하게 된다. 은혜파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며, 누구나 다 죄인인데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율법파는 지도자는 더욱 엄격한 윤리적 기준에 맞아야 한다며, 무조건 용서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두 가지 입장이 맞는 면이 있는 반면, 잘못된 면이 있다.

율법파의 경우 과연 내가 그 영적인 지도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런 주장하는 지 살펴보아야 한다. 때로는 인간적인 실망감 때문에 악한 감정을 가지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징계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살리고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율법파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은혜파는 철저한 회개가 뒤따르지 않고, 그러한 잘못에 대한 적절한 징계가 없이 무조건 용서해주는 것이 결코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밀양]의 주인공 신애의 잘못을 실제로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 죄에 대한 징계를 철저하게 행함으로 인하여,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철저하게 회개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회개하였다면, 이제는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고, 언급하지 않고 형제로 받아주어야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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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이 말은 다시 타락했던 목사가 다시 목사의 직분을 수행하도록 회복시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목사의 직분은 외인으로부터도 칭찬받는 자 중에서 해야 할 것이니, 이제는 목사의 직분을 행하게 하는 것보다는 다른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옳다. 다만 그렇게 타락했던 자를 교회에서 축출할 것이 아니라, 형제로 다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목사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니, 사람이 정죄할 수 없고, 하나님의 처분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에게 권징(discipline)하는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장로교회의 경우, 목사의 치리기관인 노회에 보고하여 징계를 받게 하고, 목사의 직분을 빼앗는 것이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권징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목사의 권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거짓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며, 만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면, 징계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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