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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 이국진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대 영어역본에서는 주로 “상대방이 저지른 악한 일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번역한다. NIV 성경에서는, “사랑은 잘못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으며”(it keeps no record of wrongs)라고 번역했다. NLT 성경에서도, “사랑은 부당한 취급을 당한 기록을 남기지 않으며”(it keeps no record of being wronged)라고 번역했다. 한글 성경 중에서도 쉬운성경과 표준 새번역 성경은, “사랑은 원한을 품지 아니하며”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번역은 직역이 아니라 의역이지만, 본문의 의미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가 잘못했던 것에 대한 기억도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린다고 할 때, 우리들의 마음속에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첫 번째 질문은 과연 우리가 잊을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가능성(possibility)의 문제이다. 우리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리지 않은 이상 과거의 기억을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잊겠다고 의지적으로 결심한다고 해서, 잊어질 수 있는가? 잠시 잊고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기억을 되살리는 일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만나게 되는데, 과연 기억하지 아니할 수 있는가? 레이코프의 말대로,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더 생각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이러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는 것이란 단순히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언 17:9)는 말씀처럼, 다른 사람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여전히 마음속에서는 생각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이 가진 어쩔 수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이 했던 잘못에 대해서 다시는 언급하지 않을 수는 있다. 상대방이 저질렀던 잘못을 언제나 들추면서, 그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도록 만드는 것은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 이 말씀과 배치되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과연 잊는 것이 현명한 것인가 라고 하는 정당성(legitimacy)의 문제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 말라”고 권고하기 때문이다. 시라큐즈에 있는 뉴욕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토머스 샤츠는 “어리석은 자는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는다. 순진한 자는 용서하고 잊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고 말했다. 1 영국의 핀츨리에 있는 유대인 박물관에는 제니 슈톨츠버그의 세라믹 신발 작품이 있는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간 유대인을 기리고 있다. 그 작품의 이름은 “기억의 신발들”이다. 역시 이곳에도,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아라”라고 써 있다. 이 시대의 현자들은 모두 잊지 말라고 하는데, 과연 상대의 잘못을 잊는 것은 현명한 일일까?

정답은 “잊으면서 잊지 말아야 한다”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왜 과거에 그러한 불행한 일이 있었는가를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역사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학살을 잊지 말자고 하는 것은, 다시는 역사상에 홀로코스트와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는 “잊지 말자, 6.25. 상기하자, 6.25”라는 구호를 들으며 자랐다. 역시 이 말의 의미는 동족이 서로 총칼을 들이대고 싸웠던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내가 남의 보증을 섰다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한다면, 그러한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이런 교훈을 잊는다면, 낚시 미끼를 물었다가 풀려났던 물고기가 다시 낚시 미끼를 무는 격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잊어야 한다고 했을 때에는, 과거의 잘못이 미래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했지만, 다시는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린다면, 그를 진정으로 용서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관계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과거의 악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를 기억하지만 독일 사람들과 교제를 끊은 것은 아니다. 일본이 과거에 우리 민족에게 행했던 잘못된 역사를 기억해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본차를 구매하지 말아야 하거나, 일본어를 멀리하거나, 일본과는 상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우리 사회에서 이런 식으로 반일감정을 가지고 대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안타까운 일이며, 역사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우고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왜 우리가 불행한 과거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역사 속에서 배우면서, 그러한 불행한 과거가 다시 되풀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힘을 기르면서, 일본과 함께 교류할 수 있을 것이다. 6.25와 같은 불행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러한 과거가 미래를 위한 평화공존의 체제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두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제는 서로 대화하며 평화를 구축하고 경제적인 협력과 민족공존의 발전적인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도록 용서와 화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가 바로 그랬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겨가지고 집을 나갔던 아들이, 이제는 빈털터리가 되어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외면하지 않았다. 아마 한국 아버지라면, 호통을 치고 집에 들이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사랑이 풍성한 아버지이다. 그래서 로이드 오길비(Lloyd John Ogilvie) 목사님은 누가 방탕한 사람인가(Who is prodigal?)를 묻고, 그것은 바로 아버지라고 대답했다. 2)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사랑은 결코 절제되어 있지 않다. 마음껏 사랑을 베풀어주는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아직 멀리 보이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 나아갔다. 그리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종들에게 명하여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것은 곧 그 아들을 상속자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들의 귀환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다.

왜 아버지는 배알도 없이 아들을 기쁘게 맞이하는가? 그 아들이 유산을 미리 챙겨가지고 집을 나간 과거를 잊었는가? 당시의 문화적 관습에 의하면,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배은망덕한 아들의 행동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는가? 분명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거의 일이 탕자를 맞아들이는데, 방해로 작용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이미 깨끗이 잊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이다(베드로 전서 4:8).

하지만 큰 아들은 과거를 하나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반응은 싸늘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을 가리켜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아들”이라고 지칭했다. 과거의 죄를 기억하니, 그에게 금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힌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는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사랑은 과거에 저지른 악행을 잊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부부싸움을 하다보면, 아내들은 남편이 신혼 초부터 섭섭하게 했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 따져들기 시작한다. 같이 살아오면서 잘한 것도 많은데, 그러한 기억은 말하지 않고, 섭섭한 기억을 줄줄 내어 놓는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편들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잘못만을 기억하는 못된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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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 읽기 – 왜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잊을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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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Thomas Szasz, The Second Sin (Anchor Press, 1973). “The stupid neither forgive nor forget; the naive forgive and forget; the wise forgive but do not forget.”[]
  2. Lloyd John Ogilvie, Autobiography of God (Regal Books,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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