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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마 1:1,17)

우리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메시아에 대한 갈망들이 있습니다. 소망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고, 갈망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그 시원한 해결, 시원하게 우리들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줄 슈퍼맨 그런 존재들을 늘 꿈꾸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영화 같은 것을 보면, 그런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그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그런 영웅들에 대한 영화들이 종종 나오는 것이죠. 슈퍼맨도 나오고 원더우먼도 나오고 또 스파이더맨도 나오고 배트맨도 나오고 여러 가지 그런 메시아들을 그리게 되는데요. 왜냐하면 우리의 상황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이런 고통스러운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해결해 줄 그런 영웅이 없는가? 참 난처하고 고통스러운 이 상황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줄 무슨 아주 신박한 해결책이 없는가? 이런 것들을 늘 꿈꾸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늘 기대하고 있는 그 메시아들은 진정한 우리들의 메시아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늘 정치 지도자에게 우리의 소망을 걸곤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소망을 거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어쩌면 참 이 정치라고 하는 것은 종교보다도 더 중독성이 있고, 아주 강하게 우리들을 끌어당기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리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 정치의 영역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줄 어떤 지도자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거를 하게 되면 자기가 지지했던 그 정치 지도자가 당선이 되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요. 너무나도 하루 종일 기뻐하면서 웃고 막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데, 그런데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당선이 되면, 우울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소망을 그런 정치 지도자에게 거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정치 지도자들이 우리들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해 주느냐 하면, 해결해 주지 못해요. 늘 실망하고, 참 이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저런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하면서, 그래서 당선이 됐지만, 그러나 전혀 해결이 되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서 또 실망하고 또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해줄 줄 알았던 지도자가 오히려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 옛날 독일에서는 히틀러라고 하는 정치 지도자가 등장을 했습니다. 그 히틀러라고 하는 시대에 정말 사악한 지도자가 어떻게 독일의 지도자가 됐을까요? 그것은 그 독일 사람들의 마음을 그가 만족시켜 줄 만한 연설을 했기 때문인 것이죠. 이 나라에서 좌파들을 몰아내고 또 유대인들을 몰아내겠다고 하는 그 말에 열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지만, 결국에는 좋은 세상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모든 사람들을 정말 파멸로 이끌게 만드는, 정말 잘못된 지도자의 출연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우리의 소망과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예들을 우리는 정치 지도자에게서 많이 보게 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는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처녀 총각들은 나의 이 삶을 구원해 줄 백마 탄 멋진 왕자님이 나타나기를 소망하는 거죠. 그 옛날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하게 되면서, 그래서 비참한 인생이었던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줄 그런 왕자와 결혼하는 것을 꿈에 그리면서, 배우자가 내 문제를 해결해 주고 정말 행복한 삶을 살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결혼들을 합니다. 그런데 금방 깨지죠. 금방 깨졌습니다. 아 배우자가 나의 소망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오히려 참 골칫덩어리라 이 말이에요. 힘들고 어려운 그런 가정생활을 해 나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는 자녀들이 우리들의 소망이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나의 기쁨을 만족시켜 주고 이 자녀들이 성공해서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사실 우리 자녀들이 우리의 기대만큼 일하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또한 우리는 돈의 소망을 걸기도 합니다. 또한 성공에 소망을 걸기도 합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가기를 원하고, 좋은 직장에 가길 원하고, 그래서 많은 돈을 얻을 수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삶이 행복해질 거라고 하는 그런 기대감 가운데 있는데, 그런데 그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돈이 없어서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돈만 있으면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알고 봤더니, 우리의 건강이 망가져버린 것이고, 돈을 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돈을 더 많이 까먹은 것이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피폐해지는 그런 삶의 반복이 계속되는 일들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이 반복되는지 모릅니다.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성공하지 않고 늘 실패하는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로또에 소망을 겁니다. 로또를 맞기만 하면, 내 인생이 역전될 거라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로또를 구입하긴 하는데, 안 맞아요. 안 맞아요. 맞질 않습니다. 맞질 않고 계속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작은 돈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우리가 꿈꾸는 그런 메시아들은 모두 다 헛된 소망일 뿐이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약속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게 큰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들의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오셨고,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이 세상의 어떠한 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우리의 갈망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문제 해결자 되시며,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우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 이번 성탄절을 이제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 성탄절을 앞에 두면서 우리가 이 마태복음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이 말씀 가운데서 무엇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지 한번 살펴봤으면 좋겠는데요. 이렇게 성경을 잘 읽을 줄 알았으면 1절서부터 17절까지 다 읽으라고 할 건데, 아무튼 우리가 이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족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아마 성경을 세심하게 살펴본 분들이라고 한다면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점을 아셨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일치하지 않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모르고 계시는군요. 맞는 부분도 있지만 맞지 않는 부분도 생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경우가 있지만, 여러 사람들의 설명에 의하자면 하나는 요셉의 족보 하나는 마리아의 족보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한 이 족보가 완벽한 족보가 아니라, 중간중간에 생략되어 있는 족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한다고 한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겠고, 이 족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전달해 주려고 하는가? 무엇을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해 주려고 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굳이 모든 것을 다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제 사실 저도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저에게 종종 물어요. 목사님은 미국에 살 때 미국 어느 동네에 사셨어요? 물어보면 제가 뭐라고 대답하냐면, 예 저는 필라델피아에서 살다 왔습니다. 그래요. 근데 사실 필라델피아에서 살았느냐 하면, 사실 필라델피아에서 산 건 아니고요. 필라델피아 옆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그 옆 동네에서 살았고 필라델피아 쪽에서만 산 것이 아니라, 저 보스턴 쪽에서도 살았고, 또 뉴욕에도 잠깐 있었고, 그래서 이사했던 곳들을 다 이야기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다 말할 필요는 없거든요. 일부만 이야기해도 충분한 겁니다. 그냥 사람들이 이해하기 좋게 필라델피아 살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인 것과 비슷한 것이죠. 제가 미국에 갔을 때는 한국에서 어디서 살았냐고 그래서, 서울에서 살았다고 그랬어요. 서울만 산 게 아니라 뭐 이리에서도 살았었고, 다른 곳에서도 살았지만, 그러나 다 말할 필요 없이 하나 두 개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족보라고 하는 것도 역시 모든 것을 다 말한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몇 가지 몇 가지 족보를 해서 마태복음의 족보 가운데 기록해 놓고 있는데요. 이 족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에게서 태어났는가? 예수님의 조상이 누군가를 말하면서, 오늘 마태복음 1장 1절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그리고 다윗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1장 1절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말 성경에서는 아들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했는데요. 사실 헬라어 원어는 그냥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누구로 소개하냐면,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의 아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유태인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사실 모든 유대인들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한 조상에 의해서 다 태어난 사람들이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누구의 자손이죠? 단군의 자손이라고 하죠? 단군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구약 성경 창세기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사람이 갈대야 우르에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그에게 나타나셔서 명령하기를, “아브라함아, 너는 내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내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고, 그 아브라함을 향해서 약속해 주시기를 뭐라고 약속해 주셨냐면 내가 너에게 아들을 줄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로 인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고, 그리고 세상 모든 민족이 이 아들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두가 복을 받게 만들 거라고 하는 놀라운 약속을 해 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그 옛날에 해 주셨던 겁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에게 정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아들이 누구죠? 이삭이라고 하는 아들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 이제는 우리 가정에 자식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었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아들을 주신 것이죠. 그런데 그 아들을 주셨는데, 사실은 이 아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아들이었는가? 한편으로는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중적인 약속이었던 것이죠. 이삭만 주시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류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이중적으로 해 주신 것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의 삶 가운데는 자식이 없어서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무런 자식이 없어서 이제는 소망이 끊어져버린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삭이라고 하는 아들을 안게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에 기쁨이 생기고 정말 행복이 생기게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이 인류를 향해서 이 인류가 아무런 소망이 없고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소망을 얻게 해 주시는 그 놀라운 약속을 누구에게 해주셨는가? 아브라함에게 주셨는데, 그 아브라함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그 약속의 아들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고 오늘 성경은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던 이삭은 100세에 태어나서 아브라함에게 기쁨이 되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 이삭이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자녀들이 많이 태어나서 그래서 수많은 민족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무슨 약속이 안 이루어주었습니까? 그 아들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거라고 하는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늘 기대하면서 기다린 겁니다. 모든 민족을 복 주게 만들 그 아들이 언제 오나?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그 자녀로 만들어주시기 위한 그 놀라운 구원의 은총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것은 오늘 이 말씀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아들로 왔다고 하는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몇 가지 의미를 준다고 생각하는데요. 첫 번째는 우리가 철저하게 무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 인간은 참 대단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오셔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능하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팀 켈러 목사님은 말하기를 성탄절이라고 하는 것은 성탄의 소식이라고 하는 것은 참 “우리 인간들에게는 모독적인 소식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말은 무슨 얘기냐 하면 예수님이 왜 오셔야 했는가?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거예요. 우리가 유능하다고 한다면,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우리의 힘으로 의를 이룰 수 있고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아무런 구원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현실은 늘 만족이 없는 삶입니다. 슬픔과 고통과 질병과 여러 가지 슬픔, 죽음들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데 이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해결해보려고 하는데, 잘 되나요? 안 되나요? 안 돼요.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늘 마음속에 열심히 참 결심을 합니다. 금년에는 내가 이것을 해야 되겠다. 금년에는 내가 저걸 해야 되겠다. 새해 열심히 작정을 하는데, 그게 얼마나 갑니까? 3일 갑니다. 3일 가기 때문에 작심 3일이라고 하는 거죠.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어요. 열심히 해서 1등도 하고 싶고 전국 1등도 하고 싶고 정말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런데 그 마음이 언제까지 가요? 며칠 못 가요 며칠 가다 보면, 힘들어요. 지겨워요. 잠자고 싶어요. 놀고 싶어요. 여러 가지 그 잘못된 생각들이 내가 열심히 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것들이 생겨서 그래서 끝까지 나가지 못하는 거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 정말 최선을 다해야 성공하는 거죠. 축구 선수들 보니까, 손흥민 선수, 황희찬 선수 지금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한국 선수들이 있는데, 그 한국 선수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무슨 얘기를 하냐면, 독일에 가서 그리고 스위스에 가서 맨날 울었대요. 맨날 그 어린 나이에 해외에 나와가지고 거기서 경쟁을 하면서, 그래서 뭔가 성공을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말도 안 통하지. 정말 외롭지. 쓸쓸하지. 너무나도 힘들지. 하니까 맨날 울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들어서 그냥 포기하고 마는 거죠. 힘들어서 포기하고 마는 거예요. 오로지 몇 명 사람 정말 얼마 안 되는 그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것을 겨우겨우 이겨서 어느 단계까지 올라가는 것인데요. 그것도 완벽하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별로 많이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죠.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꿈도 있고 야망도 있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다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늘 넘어지고 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의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우리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거죠.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겠다. 정말 사랑하면서 이웃에게 따뜻하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생각하지만, 거룩하게 살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마음들을 이내 무너져버리고 마는 거죠. 우리를 향해서 조금만 힘들게 만들며 미워하는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르게 되는 것이고, 조금만 누군가 나를 해코지하면 원수를 갚아버리고 싶은 마음들이 생기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우리들에게 없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거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비우는 것도 안 되는 거죠. 아무리 비우려고 해도 우리들의 마음이 비워지지 않는 겁니다. 분노의 마음, 화가 나는 마음, 욕심의 마음들, 여러 가지 마음들을 다 비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마치 어떤 사람들과 같은가 바닷속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물에 빠진 사람들과 똑같아요. 우리가 수영을 아무리 잘해도 헤어 나올 수 없는 겁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나올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인가? 구조선이 와서 우리들을 붙잡아 끌어내는 것밖에는 소망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능력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께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무능을 우리가 인정하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될 거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의 말씀에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해내서, 성취해서, 무엇인가 성공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베풀어 주시는 그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들이고,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영접할 때, 그래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그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시고, 피 흘려주신 그 놀라운 은총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그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 우리의 것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되는가? 예수님을 우리의 메시아 구세주로 바라보아야지, 단순히 도덕 선생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줍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주 훌륭한 성인이라고 생각합니다. 4대 성인으로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아주 높게 올려줍니다. 4대 성인이라고 말하고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인정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아요. 불교도들도 보면 늘 강연을 할 때 성경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런 거 보셨습니까? 스님들이 막 강연을 하다가 누가 질문을 하면 성경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다고 하면서 얼마나 우리 교인들보다 성경을 더 잘 아는지 몰라요. 성경을 막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경을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하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사용하는 것, 이것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단순한 도덕 선생으로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말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1장에서부터 28장까지 예수님의 말씀은 석 장만 간단하게 나와 있고, 성경이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으나 다시 부활하셨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해주고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의 아들로 왔는가 아브라함의 아들로 왔다고 하는 이야기 다음번에 우리가 다윗의 아들로 왔다고 하는 이야기도 살펴보게 될 텐데, 아브라함의 아들로 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말씀해 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선생님이라고 한다면 어디서 태어났는지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굳이 알 필요가 있나요? 없어요. 아주 훌륭한 도덕 선생님이라고 한다면, 그 선생님이 말한 도덕적인 이야기만 받아들이면 돼요.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단순히 도덕 선생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대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다윗에게 주셨던 그 약속의 아들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해서 구원을 베풀어주신 그 구원을 설명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참된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이번 성탄의 기간 동안에 더욱더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우리의 메시아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패하거나 혹은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만날 때, 너무 절망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습니까? 만일 이 세상의 돈이 우리의 메시아라고 한다면, 자식이 우리의 메시아라고 한다면, 정치 지도자가 우리의 메시아라고 한다면, 그 메시아들이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못할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일관적으로 가르쳐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그게 우리의 메시아가 아니라는 거예요. 돈이 메시아가 아니고, 성공이 메시아가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메시아가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수단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고, 우리가 꿈꾸던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고,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죠. 따라서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정말 바라던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절망하며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참된 메시아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오히려 감사하고 오히려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에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들에 소망을 둔다고 한다면 우리는 늘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이 세상의 것들을 다 담쌓고 살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정치적인 분야에서도 기왕이면 좋은 사람들을 뽑는 것 당연한 것이고요.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많이 벌 수 있으면 많이 버는 것 그건 당연한 것이고요. 노력해서 성공할 수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좋은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한계를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우리 자식이 메시아가 아니구나, 돈이 메시아가 아니구나, 정치 지도자가 메시아가 아니구나. 이것들이 우리를 속인다고 할지라도 괴롭거나 슬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놀라운 은혜의 주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오히려 날마다 날마다 감사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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