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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나쁜 것을 보지 않는다

– 이국진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고 하는 사랑의 9번째 정의는 “상대방의 나쁜 것(단점)을 보지 않는다”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한글 성경에서, “악한 것”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나쁜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상대방의 나쁜 것(단점, 약점)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단점이 자꾸만 나의 눈에 들어온다는 말은 그만큼 내게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연애 시절에는 장점만 보이던 배우자에게서, 결혼 후에 자꾸만 단점이 들어오는 것은 갑자기 배우자가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연애시절 보이지 않았던 것까지 보게 되는 데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내 시각이 이제는 나쁜 것까지 보게 된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바라보면서는 결코 나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의 경우,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순 단점 투성이이다. 어린 아이는 말도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직장이 있어서 돈을 벌어 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울고, 먹고, 싸고, 잘 뿐이다. 하지만 그런 아기를 보는 어머니는 자녀의 가능성을 본다. 결코 나쁜 것을 보지 않는다. 아이의 웃음소리, 걷는 모습, 끈질긴 모습 속에서 그 아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희망을 본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지금 현재 부족한 것도 나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는 시끄럽게 들리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어머니의 귀에는 앞으로 훌륭한 성악가 혹은 연설가가 될 수 있는 자질로 들린다.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을 볼 때 사랑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이 얼마나 교회에 기여하는 가로 판단하지 말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의 경우, 유학생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점점 냉정해져 간다. 예전의 유학생들은 가난한 유학생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한인교회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요즘의 유학생들은 예전에 비하면 제법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한인교회의 도움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그들이 한인교회에 우르르 몰려들었다가, 몇 년 있지 않아서 다시 우르르 몰려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교포 한인교회 성도들의 마음은 참으로 착잡할 때가 많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점차로 유학생들을 향한 마음의 문이 닫히게 되기 십상이다. 어차피 떠나갈 사람들인데 정을 주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유학생들을 바라볼 때, 그들이 교회에 기여하는 것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다. 사랑은 나쁜 것(약점, 단점)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에, 사랑의 눈으로 그들의 가능성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들이 한국에 돌아가 한국의 동량들이 될 것이라는 기대하며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마치 어린아이에게서 미래의 소망을 발견하는 것처럼, 청년들에게서 한국의 미래를 읽어내야 한다. 한 사람의 인재를 돕고 길러내는 것이 얼마나 큰 보람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효용성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인격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어차피 우리는 사람마저도 효용성으로 판단하는 못된 습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현재의 효용성으로만 재단하지 말고, 미래의 효용성까지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효용성으로만 우리를 판단하셨다면, 우리는 이미 더러워진 휴지조각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버림을 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효용성으로 우리를 판단하시지 않고,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단점만 바라보셨다면, 우리를 심판하심으로써 끝장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점으로만 보지 않으셨다. 꽃꽂이하기에도 부적합한 상한 갈대를 하나님은 꺾어버리지 않으셨고, 이제는 가망성이 없이 꺼져가는 심지도 하나님은 끄지 않으셨다(이사야 42:3). 그리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셨다.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별로 효용성이 없어 보이는 (아무 특기도 없는 평범한) 라이언 일병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미 국방성은 소대장, 통역 특기병, 의무관을 포함한 8명을 희생시킨 이야기를 그려가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아무 효용가치도 없는 나를 위하여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희생시키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질문이 떠오른다. 일등병 한 명의 생명이 여덟 명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쉽게 대답이 내려지지 않는다. 만일 내가 그 여덟 명 중의 한 사람이라면, 억울하다고 할 것 같다. 그런데 만일 내가 그 살아난 일등병이 바로 나라면, 너무 감사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은혜가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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