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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과 공의 (잠 16:8-9)

오늘은 잠언서의 두 절을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먼저 16장 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적게 벌어도, 가난해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정말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면서, 그렇게 가난한 것이 악을 행하며 불의를 행하며, 나쁜 짓을 해가면서 많은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이 둘 중에서 무엇이 좋아 보입니까? 정말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거룩하고 정말 바르게 살면서, 가난한 게 좋다 생각하시는 분? 한 분? 두 분요? 내가 좀 나쁜 짓을 하더라도, 악한 짓을 조금 하더라도, 돈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 손 한번 들어주세요. 예? 아, 이게 내가 그러고 싶다는 겁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얘깁니까? 아 그러면, 안 된다? 아 그렇군요. 사실 둘 다 마음에 안 들어요. 그렇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았으면 좋겠기도 하고, 뿐만 아니라 많은 소득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런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고 정직하게 살고, 의롭게 살면서, 가난해지는 그런 모습, 정말 우리가 거룩하게 살고 깨끗하게 살고 정직하게 사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런데 그 결과가 가난함이고, 정말 힘들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별로 그것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이고요. 그러나 또 돈을 많이 번다고 할지라도, 별로 이렇게 거룩하지 못한 나쁜 짓을 해가면서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면서, 불의를 행하면서, 그렇게 부자가 되는 것, 또한 우리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뭘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도, 좀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게, 그게 소망이죠. 이제 대답이 잘 나오네요. 우리가 잘 아는 김동호 목사님이 쓴 책이 있는데요. 그 책 제목이 뭐가 있냐면, <깨끗한 부자>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제 책은 잘 안 팔렸지만, 이 책은 엄청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인데요. 이 책이 잘 팔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리들의 갈망을, 우리들의 바람을 잘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깨끗하면서도, 정직하면서도, 믿음을 잘 지키면서도, 부자가 됐으면 좋겠고, 그래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인 것이죠.

그런데 오늘 잠언서 16장 8절에서는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 두 가지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밸런스 게임처럼, 둘 다 다 별로 썩 내키지 않은 두 개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둘 중에 무엇이 더 낫느냐?”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요. 한편으로는 공의가 있는 적은 소득, 한편에는 불의가 있는 많은 소득, 이 둘 중에 무엇이 더 좋으냐? 이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이 더 좋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의가 있는 많은 소득을 선택하고 싶지만, 그 얘기는 여기에 없어요. 잠언서 16장 8절에서는 깨끗한 부자가 되는 길에 대해서는 얘기를 하지 않으면서, 내가 깨끗하고 공의롭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서, 내가 가난한 것과, 내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 불의한 길을 가는 것, 이 둘만을 대비시키고 있어서 이 둘 중에 무엇이 좋은가? 오늘 잠언서 16장 8절의 말씀 안에서는 이 둘 중에 무엇이 더 낫다는 겁니까? 적은 소득을 얻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공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훨씬 더 낫다고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우리가 공의롭게 살면, 우리가 정직하게 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면,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종 우리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은 악한 것이며, 가난하게 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되는 것이지,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섬길 수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해 주셨으니까, 들어간다는 얘기입니까? 못 들어간다는 얘기입니까? 못 들어간다는 얘기예요. 이런 성경 구절들을 가지고서, 그런 성경 구절들을 근거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우리가 재물을 가지는 것은 악한 일이며, 그리고 우리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부자로 사는 것은 악한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재물들을 다 버리고, 가난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그렇게 주장하시는 분들이 우리 크리스천계 내에서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 어느 한 부분만 살펴보아서는 안 되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인데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그런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내용들도 충분히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에 등장하는 정말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재물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누가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면서 부자였던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데, 그게 누구죠?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동방의 의인이었어요. 정말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그런 정말 거룩하고 하나님의 뜻에 살던 사람이 바로 욥이라고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욥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기 때문에, 가난하고 정말 어렵고 힘들게 산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욥의 그 가정은 엄청난 부자였던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 부자이면서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가 있죠? 성경 퀴즈! 아브라함, 맞습니다. 아브라함도 엄청난 부자였어요. 또 누가 있습니까? 이삭. 그냥 다 나오는 거예요. 그냥 성경에 있는 이름 아무나 다 내려고 하는데, 맞아요. 이삭도 부자였고, 야곱도 부자였고, 요셉도 총리였고, 다윗도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솔로몬도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믿음의 많은 사람들이 다 부자였던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예수님을 장사 지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그는 부자라. 그가 부자였다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밝혀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잠언서의 말씀을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고 있는데요 이 잠언서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게으르지 아니하고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소득을 얻을 것이다. 우리가 땀을 흘리고 수고하면, 그러면 수학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노력한 만큼 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의 법칙, 게으른 자는 결국 가난하게 될 것이지만, 정말 자기 손도 움직이기 싫어하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그런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정말 열심히 부지런히 일하며, 자기 집안을 잘 경영하고 계획을 세워서 수고하며 애쓰는 사람은, 많은 수학을 얻을 거라고 하는 것이 잠언서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법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 공의롭게 산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고 살게 되는 것은 무조건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 잠언서 16장 8절에서는 공의를 가지고 있는 적은 소득, 불의가 함께 있는 불의를 저지르는 많은 소득을 이렇게 둘만 가지고 대비시켜서 비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극명한 대비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과 가난하게 사는 것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면서, 그런데 아무리 많은 소득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불의에 의한 소득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대한 반대는 무엇으로 말해야, 이 표현이 반대가 되겠습니까? 적은 소득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되겠죠? 적금 소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정말 가난하고 정말 힘들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직하게, 그리고 거룩하게 깨끗하게 살아가는 그 삶이 그 악한 부자보다 훨씬 더 낫다고 하는 사실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기 위해서, 극단적인 두 개의 케이스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해주셨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해 주실 때,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를 등장시킵니다. 이 거지는 얼마나 거지였어요? 정말 비참한 거지예요. 정말 정말 신세가 너무나도 나쁜 거지죠. 심지어 그 거지가 얼마나 불쌍한 거지가,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을 정도로, 그렇게 불쌍한 거지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개라고 하는 것은 애완동물이 아니에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개 돼지라고 하는 것은 혐오의 대상이고 멸시의 대상인 겁니다. 그런데 그 혐오의 대상이요 멸시의 대상인 그 개가 와서 헌데를 핥을 정도의 그런 거지니까, 그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또 한 명을 등장시키는데요. 이번에는 부자를 등장시킵니다. 그 부자는 어떤 부자입니까? 정말 최고의 부자인 것이죠. 그는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자색 옷이라고 하는 것은 왕들이나 입는 옷이고 귀족들이나 입을 수 있는 그런 고급 옷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호화로이 연락하는, 그야말로 걱정거리가 아무도 없는, 그런 그 두 사람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놓았는데요. 여러분 거지가 좋습니까? 이런 부자가 좋습니까? 부자가 좋은 거예요. 부자가 너무나도 좋은 거예요. 그런데 만일 그 부자가 지옥에 갔다면, 만일 그 거지가 천국에 갔다고 한다면 누가 더 좋겠는가? 누가 더 좋겠는가? 부자가 무조건 지옥에 간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거지는 무조건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만일 그 사람의 운명이 마지막이 지옥으로 끝난 인생이 있고, 만일 그 어떤 사람의 그 마지막이 천국으로 끝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누가 더 복된 인생인가? 누가 더 좋은 인생인가? 그것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고, 마지막에 그의 인생이 천국이냐 지옥이냐 그 종착역이 어디냐가 그 인생이 복된 인생인가 복된 인생이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신분을 누리고 있었으며,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고 있었고, 이 세상에서 어떤 처지에 있었는가? 그것이 우리의 그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극명한 대조를 했던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오늘 이 잠언서 16장 8절의 말씀도 마찬가지 결론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를 가지고 있는가? 소득이 얼마인가는 별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믿습니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재물이 얼마나 많으냐 적으냐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진실하게 살아가는가 공의롭게 사는가? 아니면 악을 행하면서 불의를 행하며 살고 있는가? 그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극명한 두 개의 대조를 해놓고 있는 것이죠. 만일 어떤 부자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정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한다면 좋은 거죠. 만일 어떤 가난한 사람이 사기치고 도둑질하고 깡패짓하고 나쁜 짓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 인생은 나쁜 것이죠. 그 사람이 무엇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가? 바로 서 있지 못한가 그것이 그 사람의 그 운명을 결정하는, 그 사람이 정말 정말 복된 인생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거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재물이 많이 있으면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좋아요. 있으면 좋죠. 그건 경험적으로 잘 알아요. 재물이 많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그래서 좋은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가 다 부자일 수는 없어요. 안타깝게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부유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부유할 수가 없는 게 그게 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면, 다 같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함의 그 기준만 올라갈 뿐이고, 사실은 여전히 부자는 소수이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이 재물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 사람이 공의롭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하고 악을 행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고, 그리고 아무리 재물이 적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진실하게, 정직하게, 공의롭게 행동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라, 복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의를 저지르면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악을 행하고 나쁜 짓을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면 가난할 수밖에 없고, 내가 악을 행하고 나쁜 짓을 하고 편법을 써야, 그래야 돈을 더 많이 벌고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들은 생각을 하는데요.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불의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면 그래서는 부자가 될 수 없을 거라고 하는 사탄의 그 속삭임이 늘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탄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늘 속삭이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넌 부자 못 돼. 너는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 탈취하고 악한 일을 하고 편법을 써야, 그래야 부자가 될 수 있어. 그렇게 우리들을 자꾸만 속이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한번 그림을 봤으면 좋겠는데요.

불의를 행하면 부유하게 되고, 공의를 행하면 가난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사람들도 일부는 부유하게 되고, 일부는 가난하게 되는 겁니다. 공의로운 사람도 일부는 부유하게 되고 일부는 가난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부유하게 되는 것, 가난하게 되는 것이 불의를 행하느냐, 공의를 행하느냐와는 사실 별 관계가 없어요. 불의를 행해도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되고, 불의를 행해도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돼요. 공의를 행했을 때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되고, 공의를 행했을 때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들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불의하게 행한 부유한 사람들이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우리도 악을 행해야 잘 되나? 또 우리가 잘 눈에 띄는 것이 무엇입니까? 공의를 행한 사람이 가난하게 된 것이 눈에 잘 뜨이기 때문에, 자꾸만 그 사탄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면서, 우리를 설득시키려고 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부유함인가 가난함인가 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주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해 주셨습니까? 마태복음 16장 26절의 말씀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얼마나 많은 재물을 가졌느냐 여부가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신실하게 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마음속에 기억하면서, 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잠언서 16장 9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관할하고, 모든 것을 다 통치하신다고 하는 것이죠. 내가 계획하고, 내가 생각해서,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데, 그래서 내가 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이 누구의 인도하심이에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이 말이에요. 오늘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려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시고 계시는데, 이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은 누구의 선택이었어요? 우리의 선택이었죠. 오늘은 수요 예배니까, “어차피 잠자는 거, 교회 가서 자자” 하고 나왔습니까? 아니면 아 오늘 잠언서의 말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얻을 교훈이 무엇인가? 한번 듣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자.” 하고서 나왔습니까? 아무튼 결정하고서 이 자리에 나왔어요. 어떤 사람은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내가 결정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려고 나왔는데, 그런데 내가 나온 것 같지만, 우리로 하여금 이 자리에 앉게 하도록 인도하신 분이 누구예요? “하나님이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인도해 놓으셨다는 거, 이 관점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아주 중요한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 관점을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어야 되겠는데요. 어떤 한 남자와 어떤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 두 사람이 왜 결혼하게 됐어요? 어쩌다 보니까 그냥 재수 없어서, 그래서 하필이면 저 남자랑 결혼하게 된 것인가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여시고, 우리들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그래서 이 남자와 이 여자가 결혼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을 엮어주신 것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것이니까, 우리가 함부로 나눌 수 없고, 내가 이렇게 같이 살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나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맞는 사람을 내게 사명을 주셔서, 이 남자를 사랑하라고 내게 사명을 주셔서, 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부족한 것들을 감싸주고 도와주고, 그리고 합력해서 정말 좋은 가정 만들어가라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둘을 붙여주셨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는 것이죠. 믿습니까?

그래서 이 잠언서 16장 9절의 말씀은 불신자들은 인정하지 못하는 말씀이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한 것 같지만, 그러나 결국 우리들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 것은 하나님이셨구나!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이끄셨구나.”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이 옳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10주년을 맞이하게 되어서 참 감격의 10주년 예배를 드렸는데요. 우리 교회가 지금 이렇게 탄생하게 되고, 여기까지 오게 되는 그 과정 가운데 보면, 정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여러 가지 참 상처도 많이 있었을 것이고, 아픔도 많이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괴로운 일도 있었을 것이고, 많은 경험들이 있었을 것인데,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그냥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우리가 재수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셔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여기에 왔다 심령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 고백하는 것이 그게 참된 믿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로마서 11장 36절의 말씀도 역시 같은 의미의 말씀이죠.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모든 것이 만물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다?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어쩌다 보니까,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서, 이 세상이 움직여 나가게 된다.”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 잠 된 성도들의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내가 계획을 하고, 내가 실행을 해도, 사실은 내 능력에 따라서, 내 계획에 따라서, 내 작전에 따라서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고백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그게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많은 수학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이 모든 수확이 내가 땀방울 흘리고, 내가 수고하고, 내가 노력해서 이런 수확을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주시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소득을 얻게 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것이 그게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될 텐데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자유 의지가 없이 마치 꼭두각시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정하고 움직이는 대로 우리가 아무런 의지 없이 움직여진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인형극 보면, 꼭두각시를 보면, 그 인형극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에 의해서 움직여야 인형이 움직일 수 있을 뿐이지, 그 인형을 만지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냥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인형처럼 꼭두각시처럼 우리를 운영하고 계시는가?”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온전한 “자유 의지”(free will)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하고 행동하게 되어 있는 것이지, 내가 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자유 의지가 없이 인형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100%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계획하고 내가 행동했기 때문에, 사실은 그 모든 행동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어요? 누구에게 있어요? 나에게 있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이끄셨죠? 하나님, 다 하나님 책임이야! 하나님이 잘못한 거 아니에요. 이게 아니라, 100% 우리 책임이 있는 것이죠.

요셉을 팔아먹었던 형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팔아먹은 형들의 잘못은 누가 책임을 져야 됩니까? 요셉의 형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롯유다는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었지만, 그러나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면 제게 더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처럼, 가롯유다는 자신의 선택과 자신의 악한 그 결정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정말 악한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지 않고,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어 보내지 않고 자꾸만 막았던, 그 바로 왕의 그 강퍅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신 것이라고 성경이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거부하면서 완악하게 버틴 것은 바로 왕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치 자유 의지가 없는 것처럼, 나는 나는 이런 식으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시켜서 할 수 없이 이렇게 했다고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내 선택과 내 자유 의지에 따라서 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이 우리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끄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다고 하는 얘기는, 그러니까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그래? 그러면 어차피 하나님께서 다 하실 테니까, 나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어차피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며? 내가 무슨 짓을 하든 하지 않든, 어차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어차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니, 나는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경의 말씀은 우리가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우리가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무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반드시 계획을 세워야 하고, 그 계획에 따라 열심히 수고해야 되고, 땀을 흘려야 되고,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됩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되나요? 전도하지 말아야 되나요? 전도해야 돼요! “어차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은 어차피 다 구원받겠네.” 하면서, 손 놓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세워서,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을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우리 사랑하는 자녀를 주님 앞으로 인도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열정적으로 그 전도를 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 주일 학교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야 되는 것이죠. 우리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가르쳐줘야 되는 것이죠. 그냥 어차피 될 대로 돼라 하나님께서 어차피 해주시겠지.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고, 또한 우리들의 모든 삶도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 개인도 그냥 어차피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가 아니라, 우리가 땀을 흘리고 수고하며 애쓰는 가운데, 우리가 소득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하기도 해야 되고, 최선의 노력을 하는 가운데, 모든 결과를 하나님 앞에 맡기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악용해서, “나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른 성경적인 태도가 아닐 줄로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계획이 때로는 망가지고, 때로는 우리가 계획했던 것들이 틀어져버리고,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두려워하거나 절망하거나 낙담해 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감사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선하시고 좋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늘 감사와 찬송과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8절 말씀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공의를 따라 살다가 적은 소득을 얻을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걱정하거나 낙망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진실하게 살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주 안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복된 일이고, 주 안에서 그 수고를 주님께서 인정해 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리어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신실하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세상에 악한 죄악의 그 사탄의 유혹에 따라 잘못된 죄악의 길로, 불의의 길로 걸어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늘 넘어지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셨습니다. 그 보혈의 피 앞에 다시 한번 나가서, 우리의 죄를 씻음 받고, 다시 일어서는 가운데 주님과 동행해 나가는 귀하고 복된 인생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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