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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와 진리 (잠 16:5-7)

오늘 또 잠언 16장에 있는 말씀 가운데서 석 절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16장 5절부터 살펴보고 싶은데요. 16장 5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지만, 그러나 마음이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벌써 수 차례에 걸쳐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한 말씀입니다. 그렇죠? 교만에 대한 경고가 잠언서에 참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이 교만함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정말 모든 것들을 잘했어도, 교만해버리면 그 모든 것들이 헛수고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보면 바리새인들은 어쩌면 정말 완벽에 가까울 정도의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아주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이 누군가? 바로 바리새인들인 것이죠.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했고, 또 헌금하라고 하면 헌금을 했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 철저하게 지켰고, 또 손을 씻어야 된다고 하고, 정결법을 지켜야 된다고 한다면, 자신을 더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정말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켰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 빵점짜리였을 뿐이죠. 하나님 앞에서는 그건 바른 믿음이 아닌 겁니다. 정말 완벽해 보였던 그들의 신앙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고 하는 것인데요. 그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영적인 교만함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영적인 교만함 가운데 아주 쉽게 빠지게 되는데요. 특별히 믿음 생활을 잘한다고 하면 할수록, 내가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고 헌신한다고 하면 할수록, 우리가 더 쉽게 빠지는 죄악이 바로 교만함의 죄악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주 경계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감에 있어서 가장 신경을 써서 경계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교만의 죄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 정말 민감하게 우리가 조심을 해야 되고 경계하면서, 이런 교만의 죄, 지금까지 내가 하는 모든 신앙생활을 빵점짜리로 만들어버리는 이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고, 또한 우리 자신을 늘 살펴서 혹시라도 이러한 죄 가운데 빠지지 않았는지,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영적인 교만에 빠졌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나는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인가 늘 매일매일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텐데요. 자기 자신이 영적인 교만에 빠졌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그 기준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코로나에 걸렸다든지 감기에 걸렸다든지 하게 되면, 무엇을 보고 우리가 코로나에 걸렸다, 감기에 걸렸다. 이런 걸 알게 되죠? 열이 나는 것을 보고, 열이 나면 감기에 걸렸나? 아니면 코로나에 걸렸나? 하면서 목이 아프면, 혹시 내가 이 바이러스에 걸린 것은 아닐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면서 조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인 교만이라고 하는 그러한 치명적인 질병에, 영적인 질병에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우리가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내 마음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는 마음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마음이 나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벌써 우리가 영적인 교만함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내가 함께 대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단점들이 눈에 보이고, 그들의 그 약한 면들이 보이고, 그래서 왜 저 사람은 저 정도밖에 하지 못하나? 왜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왜 장로라고 하는 사람이, 권사라고 하는 사람이, 왜 주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왜 저 정도밖에 되지 못하는가? 그런 미워하는 마음과 멸시하는 마음, 그리고 무시하는 마음들이, 깔보는 마음들이 우리들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영적으로 교만한 상태로 진입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자신들보다 덜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경멸하면서 치를 떨었던 것이죠. 세리와 창기들을 보면서 경멸하는 태도를 가지고 무시하는 마음으로 가지고, 정말 내가 그들을 멸시하는 그런 마음으로 창기들을 바라보고 세리들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죠. 혹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런 마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이 영적인 교만함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금세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일찍 일찍 나와서 수고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나처럼 일찍 나오지 못하는가?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이렇게 헌신하고 노력하는데, 왜 다른 사람은 이만큼 하지 못하는가? 자꾸 내가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비교하면서, 그 사람들에 대한 경멸의 마음, 무시하는 마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영적인 교만의 위험 신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볼 때 항상 장점을 봐야 됩니다. 나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봐야 되는 것이죠. 우리 옆에 있는 사람 한번 쳐다봅시다. 한번 쳐다보십시오. 나보다 멋있어 보입니까? 나아 보입니까? 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다양하게 창조하셨어요. 그 어느 누구도 똑같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창조하신 것이죠.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이런 장점을 주고, 이 사람에게는 저런 장점을 주고, 저 사람에게는 이런 특징을 주고, 이 사람에게는 이런 특징들을 주었습니다. 사람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고, 사람마다 다 완벽한 것이 아니라,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들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이 못하는 것, 내가 잘하고 있는데 저 사람이 못하고 있는 것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내가 못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잘하고 있는 그것을 바라보며, 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하는 것이죠. 빌립보서 2장의 말씀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각각 서로를 돌아보면서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정말 저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저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좋은 면을 가지고 있다. 그 장점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다르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장점을 주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장점을 주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장점을 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 장점을 가지고 그 장점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경멸하라고 그 장점을 준 게 아니고, 그 장점을 나에게 줬다고 한다면 그 장점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고, 그 장점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그것을 나에게 맡기셨다. 하나님께서 청지기로 나에게 맡기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으로 봉사하라고 주신 것인데, 다른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다른 사람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주신 것인데, 사랑을 베풀지 않고 경멸해 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장점을 주신 그 이유와 목적에 배신하는 행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장점과 모든 좋은 것들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교만의 재료가 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가 가진 모든 장점들은 그것이 건강이든지, 그것이 재물이든지, 그것이 학식이든지, 그것이 그 어떤 것이든지 내게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의 재료가 아니라 섬김과 나눔과 사랑의 이유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학생들 가운데서 반장을 뽑았다고 한다면, 반장을 뽑은 이유가 뭐예요? 다른 학생들 반장이 되지 못한 다른 학생들을 멸시하고 경멸하면서 뻐기라고 반장으로 세워준 것이 아니고, 반장으로 뽑아준 이유는 다른 모든 학생들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라고 하는 직책으로 뽑아주는 것이죠. 우리 가운데 어떤 지도자를 뽑는다고 한다면, 지도자를 뽑아준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그것은 그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그런 정책들을 펼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좋은 일들을 하라고 세워주신 것인데, 그런데 그러지 아니하고 오로지 자기 편만 챙기고, 자기 가족만 챙기고, 그래서 자신의 이익만 극대화시키고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뽑아준 이유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세워주셨는데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방의 빛으로 삼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방의 빛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생명의 빛이, 영광의 빛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펼쳐나가게 해서, 그로 인해서 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제사장의 나라로 삼아주셨는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그 사명을 망각해 버린 채, “나는 선민이지만, 너희는 선민이 아니다”라고 교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가, 결국에 그 사명을 망각해 버렸을 때, 이스라엘에 향한 하나님의 그 축복의 촛대가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가 가진 것이 그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우리의 교만의 재료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재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미워하시는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마음속에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잠언서 16장 5절 말씀에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멸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손을 잡는다고 하는 게, 도대체 왜 손을 잡는 것일까요? 손을 교만한 사람들이 손을 잡아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손을 잡아도 별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는 이 말 좀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잘 안 되죠. 그래서 원문을 한번 봐야죠. 원문을 한번 봤더니 원문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음에, 마음이 교만한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 여호와께 싫어함이 되지만, 싫어함이 되는데, 손의 손에는, 그냥 풀려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원문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손에서 손으로” “손에서 손으로” “그냥 풀려나는 게 아니다”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원문을 보니까 더 모르겠죠. 원문은 어떻게 돼 있냐면, 그냥 “손에 손”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되어 있는 겁니다. “야드”가 손이거든요. “야드 레야드” 하니까, “손, 손이 손에”라고 하는 말로 되어 있는 것이죠. 이 말이 어떤 말인가? 영어 성경을 보니까, 이 말을 어떻게 번역해 놓았냐면, “확실하다”라고 하는 말로 번역해 놓았어요. 그러니까 마음이 교만한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싫어하는 것이오. 그들은 “확실히” “분명히” “결코” 처벌받지 않고 풀려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다. “확실히” 벌을 받을 것이다. “당연히” “확실히”라고 하는 말로, “손에 손”이라고 하는 말을 “확실히, 당연히”라고 하는 말로 영어 성경에서는 번역해 놓았습니다.

학자들이 어떻게 해석했는가? 가만히 살펴보니까, 학자들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몰라가지고, 의견의 통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히브리어 성경에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된 이 표현을, 우리나라 우리 현대말로 번역하기에 쉽지 않은 번역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번역하든 그 의미는 똑같아요. “손을 잡아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국말을 번역해서, 번역하는 것처럼 번역을 한다고 해도 똑같고, “그런 사람들은 ‘확실히’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번역을 해도 괜찮고, 아무튼 어떤 식으로 번역을 하든,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확실히 벌을 받을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자기들끼리 손을 잡아도 벌을 당할 것이지만, 그렇게 손잡는다는 의미가 아니더라도,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인데,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셔도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교만해야 될까요? 교만하지 말아야 될까요? 예 결론은 “겸손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16장 6절 말씀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된다라고 하는 말인데요. 도대체 이 말의 의미가 무슨 말인지 좀 이해가 되십니까? 좀 이해가 잘 안 되죠?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도대체 인자와 진리로 죄악이 속하게 된다? 무슨 뜻일까? 가만히 보니까 이걸 히브리어로 한번 가만히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 한국말로는 인자와 진리로라고 번역이 돼 있는데, 사실 이 인자와 진리로 번역한 이 히브리어 단어는 어떤 단어냐면, “헤세드”라고 하는 은혜라고 하는 말이고, 그리고 진리라고 하는 말은 “에메트” 그러니까 “은혜와 진리” “은혜와 진리,” 우리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와 진리라고 하는 그런 표현들을 많이 들어보셨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와 진리가 넘치더라” 등등등 그런 “은혜와 진리”라고 하는 표현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교회의 이름도 “은혜와 진리 교회”라고 짓잖아요? 그게 은혜와 진리라고 하는 말인데, 그 은혜와 진리라고 하는 말을 오늘 잠언서에서는 “인자와 진리”라고 번역을 해놨어요. 그런데 아무튼 그 인자라고 앞에 있는 것은 kindness, 그러니까 친절을 베푸는 것, 사랑을 베푸는 것, 선을 베푸는 것을 가리켜서 “헤세드”라고 말할 수가 있겠고,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냥 진리, 신실함, 진리로 번역을 할 수가 있겠는데요. 은혜와 진리로라고 하는 말은 뭐냐 하면, 그러니까 두 개, “은혜”라고 하는 것과 “진리”라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죄악이 속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것은 두 개의 단어로 하나의 뜻을 나타내는 헨디아디스(hendiadys)라고 하는 표현법입니다. 우리가 성경 해석학 시간에 한 번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것은 단어 두 개이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어떤 의미냐면, “진실한 은혜로” “신실한 은혜로”라고 하는 말로 하나의 단어처럼 하나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라고 하는 얘기는 무슨 이야기냐면, 하나님의 “진실한 은혜가 충만하다”라고 하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인자와 진리로 죄악이 속해진다고 하는 말은 무슨 얘기냐면, 정말 “진실한 은혜로 인해서, 진실한, 성실한 은혜로 인해서, 죄악이 용서받게 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죄악이 용서받는 것 무엇으로 용서를 받는다고요? 진실한 은혜 때문에, 죄악이 용서받는다. 신실한 은혜 때문에, 신실한 그 사랑과 은혜와 자비하심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죄악을 용서받는다”라고 하는 그런 표현으로 잠언 16장 6절의 말씀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진실한 은혜로 죄가 용서받는다고 하는 얘기는, 누구의 진실한 은혜를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꾸준하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진실하신 은혜 때문에 우리가 죄악을 용서받는다고 하는 말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사랑을 베풀고 꾸준하게 선을 베푸는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일까요? 1번이 맞겠습니까? 2번이 맞겠습니까? 1번이요 2번이요? 에라 모르겠다? 두 개 다 다 가능해요.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여기에 이미 여기에 그 수식어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로 “너희가 죄 용서함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이 없잖아요? “우리의” 인자와 진실, 진리로 인해서 우리가 속죄함을 받을 거라고 하는 “우리”라고 하는 말도 없잖아요? 누구의 인자와 진리인지에 대해서 표현이 없고, 그냥 그냥 인자와 진리로 나와 있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인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인자함인지 잘 모르는 것이고, 해석은 둘 다 다 가능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구원받고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니까,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다”라고 하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지만, 또 하나의 방법은 그게 아니라 잠언서에 주제라고 할까요? 잠언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게 뭐죠? 우리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대한 교훈을 잠언서에서 계속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니까, 그 잠언서의 교훈에 비추어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정말 진실한 사랑을 베풀고, 꾸준한 사랑을 베풀고, 인자를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그런 행동들을 통해서,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말로 이해해도 맞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둘 다 다 가능한 해석이 되겠지만, 저는 두 번째 의미가 잠언서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잠언서의 교훈은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 주로 나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어떻게 죄 용서함을 받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다른 사람들한테 진실하게 선을 행하고, 우리가 꾸준하게 은혜를 베풀고, 우리가 꾸준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그 사랑의 행위들을 우리가 해 나갈 때, 우리의 죄악이 용서를 받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거라고 봅니다. 90% 이상의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 분명한데요. 우리는 이웃들에게 은혜와 사랑과 이러한 것들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죠. 그것이 성경의 생소한 개념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일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서 1장 11절에서부터 17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뭐예요? 이사야서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너희가 번제물을 가져오는데 번제물로 너희의 죄를 용서해 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번제물이 너희의 죄를 없애줄 수 없고, 내가 그것을 싫어한다는 말이에요. 왜? 우리가 계속해서 악을 행하고 있는 겁니다. 번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데, 계속해서 이웃들에게 사악한 짓을 하며, 속이고 빼앗고 착취하고 악한 짓을 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느냐? 안 해주시겠다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꺼지라는 거예요. 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너희가 어떻게 죄의 용서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우리 이웃을 향해서 진실하게 행하고,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고, 속여 쥐하지 아니하고, 빼앗지 아니하고, 우리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일들을 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라고 말씀하실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마태복음 6장 12절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정말 미워하는 마음을 내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죄 용서함을 해달라고 말할 수가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이죠. 그러니까 잠언서 16장 6절에서 인자와 진리로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악이 속해진다고 하는 얘기는, 우리가 정말 진실한 은혜를 사람들에게 베풂으로 말미암아, 정말 자유롭게 선하게 사람들에게 대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행위들이 따라줄 때, 비로소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잠언 16장 6절 하반절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죠? 다시 한번 봅니다.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이죠. 이 두 가지가 같은 겁니다. 앞에 부분과 뒷부분이 똑같은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정말 사랑을 베풀며 진실하게 은혜롭게 사람들에게 행할 때,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 그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교회당에 와서 앉아 있는 것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이웃과의 관계로 나타난다고 하는 게, 잠언 16장 6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16장 7절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악한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겠죠. 우리가 악한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결국 우리의 삶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들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형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자는 형통할 것이다.” 말하고 있는데요. 형통함에 있어서 제일 힘든 게 뭐가 있죠? 원수들이 제일 힘들죠. 원수들은 내가 무슨 선한 말을 해도, 곧이곧대로 안 듣고, 결국 선의를 악으로 갚는 그런 원수들은 정말 우리가 형통해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16장 7절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을 우리가 한다고 하면, 모든 것이 형통할 텐데, 심지어 “원수들과 더불어서 화목하게 되는 일들까지 발생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는 것이죠.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며 사는 것이 그게 우리들에게 복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대표적인 예 하나만 든다고 한다면, 누구를 우리가 떠올릴 수 있을까요? 이삭을 떠올릴 수가 있는 것이죠. 이삭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랄 지방에 가서 거하면서 거기서 우물을 팠습니다. 우물을 팠는데, 그 지방 사람들이 와가지고 그 우물을 뺏어가 버렸어요. “이거 우리 땅이야. 나가.” 그래서 이삭은 하는 수 없이 그 우물을 포기하고 다른 쪽으로 이주해서 옮겨야만 했습니다. 당시 양들을 목죽하기 위해서는 우물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우물을 빼앗겨버렸으니 얼마나 참 억울합니까? 그런데 이삭은 다시 거기서 우물을 또 파게 된 거죠. 그랬더니 또 물이 또 솟아오른 겁니다. 그랬더니 또 그럴 사람들이 다시 와가지고 또 뺏어가요. 또 하나 팠더니, 또 뺏어가요. 가는 곳곳마다 이 그럴 사람들이 와서, 이삭을 괴롭히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이 또 조용히 물러나면서 싸우지 않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들을 하면서, 또 물러나서 또 우물을 팠는데, 또 거기서 물이 솟아 나왔어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본 그랄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서 “너와 우리 사이에 평화 조약을 맺자”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자기들이 쫓아내 버린 그 이삭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고, 그러니 우리가 너희와 화목하자. 우리가 평화를 누리자. 평화조약을 맺자. 하면서 조약을 맺고, 그들과 화목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을 우리가 창세기 26장의 말씀 가운데서 보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가운데서 우리가 해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심을 바라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들만을 하는 가운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해 주시되, 심지어 원수들마저도 화목하게 하시는 그런 놀라운 결과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하죠. 이 말씀대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늘 교만한 마음, 그리고 늘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우리만을 생각하기가 쉬운 우리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게 우리들의 모습인데,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앞에 나가 다시 한번 엎드려 회개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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