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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의 바람직한 대내 정책을 논한다

2023년 10월 12일 (목) 서대문교회에서 미래로함께위원회(위원장:김봉수 목사) 주최로 열린 제2차 정책세미나에서 이국진 목사(전주 예수비전교회)가 발제한 내용입니다.

1. 신중해져야 할 총회의 결정

1.1 교회 회의가 신앙의 영역에서 차지하는 위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들의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은 다양한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실제적인 문제들은 크게 보면 과거에 이미 있었던 문제의 반복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같은 문제라 할지라도 새로운 형태로서 제시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할 수 있다. 이러할 때, 교회의 회의는 바른 결정을 통해서 문제들을 해결하고,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초대 교회 시절에 직면했던 문제는 어떻게 구제를 시행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소외되었던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문제는 결국 구제를 담당할 일곱 사람을 세우는 것으로 해결했는데, 이는 새로운 직제를 만드는 것이었다(행 6:1-7).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당면한 문제를 창의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다. 물론 그 원리는 이미 모세가 여러 책임자들을 세웠던 출애굽 당시의 예에서 발견될 수 있었지만, 그 성경적 원리를 현실에 맞게 적용한 것이었다. 그래도 이런 문제는 비교적 쉬운 도전이었다.

초대교회가 맞이한 심각한 도전은 할례의 문제였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반드시 시행해야 하느냐의 문제는 쉽지 않았다. 성경은 반드시 모든 사람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분명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교회의 회의를 통해서 해결되었다. 구약에서 소망으로 제시한 메시야는 바로 예수님이었고,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모든 율법의 요구들을 성취하셨으며, 그리하여 우리를 모든 율법의 요구로부터 해방하였다는 이해는 구약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이끌었다. 그리스도 중심의 관점으로 구약을 바라보았고, 결국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 예루살렘 회의였다(행 15장).

한 사람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면서 결정하는 것은 장로교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없고, 그러한 부족함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보충되고 더 나음을 향해 나갈 수 있다(잠 15:22 참조). 그래서 교회의 회의는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회의 회의는 잘못된 방향을 향해 나갔던 역사가 있다. 중세 천주교회는 교회의 결정을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게 간주했고, 결과적으로 성경에서부터 이탈하는 영적인 타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때로는 교회의 회의가 바른 길보다는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가장 높은 권위로 보았다. 이것이 개혁교회와 천주교를 나누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천주교는 교황의 권위나 교회의 회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 개혁교회는 성경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성경만이 유일한 최고의 권위이다. 성경의 권위 앞에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이 점검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고백서도, 조직신학 교과서도, 헌법도,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신학자나 목회자의 생각도, 당회나 노회나 총회의 결정도 모두 성경의 권위 앞에서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의 원리이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전수되어 온 모든 것을 그대로 무조건 보수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개혁해야 하는 교회이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 우리의 보수는 전해져온 전통의 보수가 아니라, 성경말씀이 최고의 권위임을 고백하는 믿음의 보수이다. 따라서 교회의 회의는 언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서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지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1.2 디아포라(διάφορα)와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규범적인 원리(regulative principle)을 가리켜 디아포라(διάφορα)라고 말하고, 이와는 달리 상황에 따라 임의로 할 수 있도록 남겨진 영역을 가리켜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라고 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디아포라에 해당하지만, 몇 시에, 어느 장소에서, 어떤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는 아디아포라에 속한다. 하지만 디아포라와 아디아포라가 칼로 무를 베듯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난점이 있다. 아디아포라도 성경적 원리에 근거시키려고 한다면, 충분히 그 성경적 근거를 댈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종종 아디아포라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도 그랬다. 루터와 칼빈이 생각하는 아디아포라는 서로 달랐다. 루터는 아디아포라로 본 것을 칼빈은 디아포라로 보기도 했다.

총회의 결의들은 이런 점에서 신중해야 한다. 아디아포라의 문제를 디아포라의 문제로 보고 결정해버리면, 목회의 현장에서 어려움이 발생한다.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당위를 넘어서서, 반드시 예배 시간은 오전 11시로 해야 한다고 총회에서 결정한다면, 지교회에서 당장 문제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교회는 이러한 결정을 그대로 따를 수 있겠지만, 상황에 따라 그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훨씬 더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할 수 있는 지교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결정을 따르지 않았을 때, 목회자가 총회 결의 위반으로 고소를 당하는 등 불필요한 갈등이 촉발될 수 있다. 그렇다면 총회의 결의는 교회를 바르게 하고 건전하게 성장시키는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빚어질 수 있다. 그래서 총회의 결의는 신중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총회는 그런 점에서 지혜롭게 결정해왔다. 그래서 총회의 바람직한 결의가 교단이 지금까지 꾸준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총회는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결의를 해왔다. 그래서 지교회는 그 결의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살펴서 교회에 적용해야 한다. 결의의 정신이 아니라 단순히 결의의 형식적 논리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율법주의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오히려 교회에 해가 될 수 있다. 그 옛날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전통을 가지고 참된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을 오히려 방해했던 것과 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총회의 결의가 있으면, 그 결의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천주교와는 달리, 교회의 회의에 가장 큰 권위를 두지 않는다. 즉 총회의 결정을 최고의 마지막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헌법이나 신앙고백도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직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그래서 항상 성경의 권위에 비추어서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만든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던 예수님 당시의 상황이 발생하기 쉽다.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총회의 결의를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총회도 결의를 할 때, 신중하게 결의를 해야 한다. 총회결의 만능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수많은 결의를 만들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이 문제가 디아포라(διάφορα)에 해당하는 것인지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에 해당하는 지를 살펴야 한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의 문제를 마치 디아포라(διάφορα)인 것처럼 간주하고, 결의를 해버리면 총회는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다양한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그러한 다양성을 통해서 복음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양성을 무시해버리고,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의 문제를 마치 디아포라(διάφορα)인 것처럼 간주하고 결의를 하는 근본주의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2.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는 총회

2.1 보수 교단의 정체성

합동 교단은 보수 교단이다. 그런데 무엇을 보수한다는 의미일까? 그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으로 인하여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 동안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무오함을 믿고, 동정녀의 탄생과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을 그대로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셨음과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타협하지 않고 지킨다는 의미에서의 보수주의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수 교단의 정체성을 오해하고 있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오히려 칼빈주의 개혁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칼빈주의 개혁신앙은 오직 성경만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으며, 성경이 아닌 그 모든 것들이 성경의 빛 아래서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 높여서는 안 되는 게 칼빈주의 개혁신앙이다. 심지어 칼빈도 자신의 주장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자신의 입장을 철회할 것이라고 했다. 오직 성경만이 참된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 교단의 헌법 12신조 중 1번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본분(本分)에 대하여 정확무오(正確無誤)한 유일(唯一)의 법칙”이다.

하지만 죄성이 많은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우리가 지금까지 해 왔던 전통(tradition)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가곤 한다. 그 옛날 예수님 당시에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따끔하게 책망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 유대인들이 전통을 만든 것은 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잘 지키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적어도 그 전통을 만들 때만 해도 성경을 잘 풀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전통은 성경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양상으로 흐르게 되었다. 결국 그들이 만든 모든 율례들이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또 질문을 해야 한다. 과연 우리의 전통이 성경의 가르침에 맞는 것일까? 그 질문 앞에서 혹시라도 성경의 가르침을 미흡하게 이해해서 잘못된 전통을 지켜왔었다면, 과감하게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는 모토는 개혁신앙이 가져야 할 중요한 모토이다. 참된 개혁주의자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복음을 참으로 보수하는 진정한 방식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나 미흡한 것들을 과감하게 성경에 비추어 바꾸는 것을 통해서이다.

2.2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는 교회만이 살아남는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이미 의미가 없어져 버린 전통만을 붙들면, 스스로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나, 결국 도태될 것이다. 마치 치즈가 다 떨어져 없는데도, 예전에 그 방에 치즈가 있었기 때문에 그 방에서만 서성거리는 생쥐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치즈를 찾아야 하고,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수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여,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둔감하고 엣날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지교회의 차원에서이든, 교단적인 차원에서이든 마찬가지이다. 총회는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야 하고, 그에 걸맞은 정책들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모든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칙은 성경 외에는 다른 모든 것들이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과거에 과거의 문화적인 제한 속에서 성경을 읽을 때, 오해했던 것들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진지하게 시대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답들을 성경을 통해 찾아내야 한다.

한 예로, 신앙고백을 들 수 있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사실 17세기의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당시에 천주교와의 싸움을 하고 있었던 교회는 천주교의 가르침과는 달리 우리가 믿는 성경적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정리한 것이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이 신앙고백서에는 대부분의 중요한 교리적 정리가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그것도 한국적인 상황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 주제들이 이 안에 들어가 있고, 사실 이 시대에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이 이 속에는 없다. 이러한 신앙고백서는 주요한 교리를 다루고 있기에 배우는 것이 대단히 유익하지만,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것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더 이상 관심이 없는 주제만을 다루고 있고, 우리 아이들의 고민은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고 다른 모든 것들은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들을 고민하면서, 성경의 답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노력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던 것들, 당연시 여겨졌던 것들을 하나씩 재검토하면서 과연 성경적인 진짜 가르침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3. 여성들을 품는 총회

3.1 안타까운 108회 총회의 갈지 자 행보

이번 108회 총회에서 여성 사역자 위원회는 여성들에게도 강도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안하였고, 이를 이의 없이 총회는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은 우리 총회가 획기적인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는 놀라운 진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총회 마지막 날 번복되었다. 없던 일이 되었고, 더 나아가 아예 여성들이 안수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다른 이름의 직책을 만들어주겠다는 방향을 잡았다. “교육사” “신학사”라는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목사 안수는 아예 가능하지 않도록 못박아 버리는 일로 보여진다. 이러한 갈지자 행보는 더더욱 여성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고, 교단을 떠나는 일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러한 결정이 아쉬운 것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기 때문에 목사 안수를 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교육사” “신학사”라는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하겠다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3.2 교단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우리 교단의 현행 헌법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안수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최고의 기준이며, 다른 모든 것은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교단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성경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무오(無誤)한 것은 없으며, 실제로 우리 교단의 헌법은 여러 번 수정을 해왔다. 여성 안수의 문제는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안수를 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것이라고 폄하해 버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대의 조류를 따라서는 안 되고,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라고 하는 원칙은 아주 소중하다. 우리는 시대의 조류를 따를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라고 하는 데까지 가야 하고, 성경이 금한다면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문제는 과연 여성에게 안수하는 문제가 시대 조류에 편승한 것인가이다. 여성에게 안수하자는 주장이 시대의 조류에 편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과거에는 과거라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여성에게 안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성경은 분명하게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고 되어 있다. 그렇게 성경이 금하고 있는데, 여성 안수가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즉 만일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믿는다면, 지금 당장 여성들이 하고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역들을 교회에서 금지해야 할 것이다. 구역장도 안 되고, 세미나 강사로 세워서도 안되고, 교사도 할 수 없다. 만일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으로 하여금 교회 내에서 성직자로 세워질 수 없는 근거 구절로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로”(tota scriptura)의 원칙 때문이다. 성경 구절 한두 구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로의 원칙이 무너지고 성경의 한두 구절에 의존하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모압과 암몬 민족은 하나님의 회중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다고 되어 있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들만 보면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 위배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 보면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모압 여인인 룻도 하나님의 회중 속으로 들어와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성경 한두 구절만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구해야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속사역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한 관점 때문에 초대교회 예루살렘 총회는 할례를 이방인들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가장 진취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미 하나님은 여성인 드보라와 훌다는 지도자와 선지자로 세웠고,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여성들이 교회내에서 예언(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치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고 머리에 두건만 쓴다면 에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결국 성취시켰다. 즉 그때가 되면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오순절 때 이미 성취되었다. 이제는 여성들도 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종종 예언과 가르침은 다르다고 반론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31에서는 예언의 목적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못박고 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수님은 12제자 중에 여성을 한 명도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물론 예수님께서 여성도 12 제자 가운데 포함시키였더라면 논란 자체가 정리되었겠지만, 예수님께서 남자들만 제자로 세우셨다는 것이 여성은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12제자 중에는 사마리아 출신이 한 명도 없고, 더 나아가 이방인도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까 오로지 유대인만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까? 한국 사람이 성직자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 되는 것일까?

개혁주의의 원조격인 칼뱅도 오로지 남자들만이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도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칼뱅은 아주 뛰어난 신학자이지만,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칼뱅의 입장이 모두 다 100% 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칼뱅은 성경의 가르침이 비추어보아서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면 자신의 주장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우리가 칼뱅을 우상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항상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가 되어야 한다.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면 결국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많다. 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교단들이 주로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안수를 받아들인 교단이 모두가 다 자유주의화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CRC교단, 고신교단의 모교회 격이라고 할 수 있는 화란개혁교회(31조파)도 여성 안수를 수용했다. 또한 한국 내에서도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교단인 백석 교단과 여러 개혁 장로교단들도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철저하게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그 동안 이런 식의 반론은 참 많이 있었다. 주5일제 시행하면, CCM 복음송을 받아들이면, 외국과 무역을 하게 되면, 조상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부모님이 주신 머리카락을 자르면,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를 보면서, 두려움과 무서움 때문에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뜻인가일 것이다.

물론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는 미국의 PCA, OPC 교단과 같은 곳에서도 여성 안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PCA, OPC 교단도 머지않은 장래에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에 순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보면, 여성들에게 잠잠하라고 했던 것이 당시에 있었던 일시적인 명령이었을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결국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여성들이 사역하는 것이 막혀 있었다는 사실도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객관적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해석하다 보니, 그 해석이 잘못될 수 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천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던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라고 외칠 수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중심의 종교가 순 엉터리일 뿐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외치셨다.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불변의 원칙은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비추어보아서 그 동안의 전통이 잘못된 것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전통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안 된다(마 15:3).

사실 초대교회에서도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성 사역자가 있었고, 유니아라는 여성(롬 16:7)도 12 사도는 아니었지만 바나바와 같은 또는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도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황금의 입이라고 알려진 요한 크리소스톰(350-407)은 유니아에 대해서 “사도가 되는 것은 위대한 일인데, 그 가운데 뛰어난 자였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영예의 노래인가!”라고 했다.

장로나 집사로 세우려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여성은 안 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 장로의 자격에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한다(딛 1:6)는 구절이 있지만, 결혼하지 않았거나 아직 자녀가 없다고 해서 목사나 장로 임직의 결격 사유로 보지 않다. 이 표현은 “자녀를 두었을 경우에는”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만일 그가 결혼한 남자라면”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을 여성은 안 된다는 뜻으로 확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구절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성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직 교단 내에 여성 안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초대 교회 할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서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3.3 현행 법으로도 강도사를 줄 수는 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더 잘 일할 수 있게 하는 공동체이다. 망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역을 막고 소수가 가진 그 힘을 행사하는 공동체이다. 광야에서 모세는 이드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판권을 천부장 백부장에게 나누어주었다. 우리 교단도 여성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우선 총회는 여성 사역자들이 강도사 인허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우면 좋겠다. 현행 헌법도 여성이 강도사가 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편 제14장에 의하면, 총회가 신학 졸업생을 고시하여 노회가 강도사로 인허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총회가 결의하고 받아주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사실 108회 총회 전에 이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었다.

목사 안수의 문제는 총회가 좀 더 심도 있게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해야 한다. 그 옛날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할례를 시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듯이, 총회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을 통해 구해야 한다. 총회 내에는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존재한다. 세미나, 토론회, 전문 연구 등을 병행하는 것을 통해, 서로 경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이웃 교단인 백석은 발 빠르게 여성 안수를 허용했고, 엄청난 교단적 발전과 신학교의 발전이 있었다. 사실 많은 여성 사역자들은 이웃 교단에 빼앗긴 것도 사실이다.

4. 목회자 연금 제도의 정착

4.1 총회 연금의 목적과 현실

목회자의 연금 제도는 노후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영적인 사역에 대한 관심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해주는 선한 장치이다.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을 때, 미래에 대한 준비를 미리 준비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는 지혜이다. 예를 들어 요셉은 7년 풍년의 기간 때에 7년의 흉년을 준비하여서, 그 흉년의 기간 동안을 힘들지 않게 살았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었다. 목회자 개인이 아직 수입이 있을 때에 은퇴 이후의 삶을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목회자들마다 상황이 다르다. 노후를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목회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목히자들은 지금 당장 살아가는 것도 힘든 처지이다. 따라서 교단은 목회자의 연금 제도를 잘 정착시켜, 목회자들이 큰 걱정 없이 목회 사역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교단은 연금 제도가 잘 정착되지 않았다. 특히 납골당 사건을 통하여 연금 제도에 대한 목회자들의 불신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연금 가입률은 저조하여서 과연 연금 제도로서 정상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교단의 연금 제도는 단순히 일반 금융기관에 내가 맡긴 것을 내가 다시 찾아가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 교단의 연금제도는 어느 정도 사회보장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회보장적 성격이란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목회자들에게도 노후에 대한 보장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현재는 개인적으로 충분히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목회자들은 이런 제도를 통해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는 반면, 그럴 수 없는 목회자들은 가입을 꺼려하거나, 가입해보았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정도일 뿐이다. 따라서 교단의 연금 제도의 현실은 이름은 연금인데 실제 운영은 그저 또 다른 금융일 뿐이다.

4.2 강제성, 수익과 안정성

연금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신뢰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국가가 시행하는 국민연금은 다양한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강제성과 안정성이다. 우선 국민연금은 강제성이 있어서 법으로 반드시 가입하게 되어 있다. 물론 자영업을 하는 등 몇몇 경우에는 반드시 가입하지 않아도 되지만, 대체로 자동적으로 납부하게 되어 있다. 두 번째로, 국민연금은 안정성이 있어서 결국은 나중에 노후를 보장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강제적으로 가입하지 않아도 되는 국민들 중에서도 자발적으로 가입하는 경우도 많다. 국민연금의 재정이 위험하다는 뉴스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국가가 보장을 해주기 때문에 그나마 안심하는 것이다.

교단의 연금도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강제성이다. 지금처럼 원하는 사람만 가입하게 해서는 연금이 성공할 수 없다. 모든 목회자가 반드시 가입해야 한다. 전도사이든 강도사이든 목사이든 노회의 지도 아래 있는 모든 목회자는 반드시 연금을 납부하도록 강제하는 규정이 만들어져야 한다. 강제성을 띠기 위해서는 납입액이 적아야 한다. 예를 들면, 월 10,000원을 최소 납입 금액으로 정하고, 교회 소속 목회자는 반드시 교회가 선공제하든지 아니면 대납하든지 납부하게 하여야 한다. 선교사나 기관목사는 GMS나 기관을 통해서 반드시 납입하도록 해야 한다. 임지가 없는 무임목사인 경우에는 개인이 납부하도록 하되, 개인이 납부하지 않는다면 노회가 대신 납부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노회는 무임목사에 대한 관리를 지금보다 더 철저하게 할 것이다. 사역을 그만 둔 목사는 제명하든지 별명부에 올리든지 하여 납입을 면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연금의 납입여부는 총회나 노회의 목회자의 신분 관련 서류를 발급하는 것과 연관시켜서 강제성을 띠어야 한다. 만 원씩만 납부하여도 은퇴를 결정하면, 그 동안 부은 것을 계산하여 그에 걸맞는 약간의 연금을 지급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처럼 총대들에게만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전 목회자가 반드시 연금을 내야 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면, 그 의무를 하지 않는 자는 총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가입하지 않아도 되는데, 총대들만 연금 납부가 강제성을 가지게 된다면, 연금이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는 불신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연금이 신뢰를 얻게 된다면, 자발적으로 연금 납입 액수를 목회자들이나 교회가 증액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금 납입 액수의 상한선을 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연금을 최대 매월 300만 원까지만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교단 연금은 사회보장적 성격을 가진 것인데, 중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마치 가장 수익률이 높은 금융기관 정도로 생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매월 300만원 이상의 연금이 필요한 목회자라면, 다른 방법을 통해 추가적으로 그 액수를 보전하면 될 것이지, 교단 연금을 통해 최대한으로 수익을 얻으려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두 번째는 안정성이 교단 연금에 필요하다. 납골당 사건과 같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서 교단 연금에 구멍이 나고 연금 제도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은 이러한 안정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아직도 연금 제도가 미약하긴 하지만 그나마 다른 금융기관보다는 더 나은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그 분야는 모른다. 금융의 전문가들이 교단 내에 많이 있을 것이니, 그런 금융전문가들의 컨설팅을 받아서 운영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다만 연금 제도 중 기금과 관련한 제도는 대폭 수정할 필요가 있다. 현재는 기금의 납입은 총회 산하 수익기관은 매출액의 1%를 내고 있고, 총회는 1년 예산의 1%를 기금으로 납부하며, 교회는 자발적으로 예산의 0.2%를 납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기금을 납부한 교회의 목회자일 경우 나중에 은퇴기금급여로 극히 일부를 돌려받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연금 재정을 충당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방식은 납부하는 교회로 하여금 꺼려지게 만든다. 납입한 액수에 비하여 실제로 목회자에게 돌아가는 수익이 너무나도 적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운용은 교회의 자발적인 참여를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연금 기금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면 재정이 더 많이 확보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현재와 같이 기금을 추가로 거두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불만만 양산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첫째, 어차피 납부하는 “세례교인헌금”의 일부를 연금 재정에 충당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현행 10,000원 세례교인 헌금을 11,000원으로 인상하여 그 가운데 1,000원은 은급재단에 기금으로 이체하고 매년 이 금액이 쌓이면 연금 지급을 지금보다 더 많은 요율로 지급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상 액수를 정확하게 얼마로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보다 연급 지급액수가 배나 더 받을 수 있게 인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월 55만 원씩(종신형) 또는 44만 원씩(15년형) 20년간 납부하면 매월 100만 원을 수령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기금을 많이 모으고 수익을 높여서, 같은 금액을 납입하고도 매월 200만 원을 수령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까지 못하더라도 매월 150만 원씩이라도 수령하게 해야 한다. 이렇게 수익률이 좋아야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다.

둘째, 은퇴연금 납입을 매칭 시스템(matching system)으로 교회가 더 붓게 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즉 월 1만 원의 납입을 개인이 한다면, 교회가 그에 상응하는 액수인 1만 원을 추가로 납부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두 방법을 다 쓰든지, 아니면 또 다른 방법들을 연구하여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익률이 있게 해야 한다.

5. 정년 제도의 폐지

5.1 정년의 의미

정년은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정년의 의미와 목회자의 정년의 의미는 다르다.

일반인들은 정년으로 인하여 퇴임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환경부 공무원이었던 사람은 공무원 정년법에 따라 퇴임하지만, 대부분 그 즉시 환경부 산하 기관 가운데 하나에 재취업하여 계속해서 일을 한다. 법원에서 일하던 분은 정년 퇴임을 한 후에, 법무사 사무실을 열어 지금도 계속 일하고 있다. 일반인에게 있어서 정년 퇴임이란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직장을 바꾸도록 하는 것 뿐이다. 물론 이 중에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고 노년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미 노후에 대한 준비가 다 되어 있거나,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을 때, 정년 퇴임에 맞추어 자발적으로 일을 하는 것을 중단하기로 한 사람들의 경우이다.

목회자는 정년으로 인하여 퇴임하면,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없다.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은퇴하기 전에 다른 일을 미리 준비해놓고 그런 일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NGO 단체를 맡아서 일을 하든가 선교회를 만들어 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 심하게는 아무데서도 환영해주지 않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목회자의 정년 퇴임은 일반인의 정년 퇴임과 다르다.

물론 어떤 분은 퇴임 후에 농사를 짓기도 하고, 어떤 분은 교단을 바꾸어 새로이 개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목회라는 것이 연륜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100세 시대에 여전히 활발히 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은퇴를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모세는 80의 나이에 이스라엘을 이끌었고, 갈렙은 80의 나이에도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볻받자고 하면서, 왜 목회자는 70세에 목회 사역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일까? 일찍 은퇴하는 것이 왜 존경받는 일이 되었을까?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두는 것이 왜 칭찬받는 일이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성경적인 가르침에서라기보다는 유교적 가치관 때문이 아닐까? 나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일찍 은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5.2 중소교회의 현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중소교회이다. 그 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정년에 가까워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아직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현 목회자는 은퇴하고 원로가 되면서, 젊은 새로운 담임 목회자가 부임하게 된다. 아직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목회자는 원로 목사가 되어 일하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사례를 지급해야 하는 동시에 새로운 담임 목사에게도 사례를 지급해야 하는 이중적인 부담을 가지게 된다. 아직 일할 수 있는 목사님을 그냥 계속해서 일하실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일하시게 만들면 되는데, 총회의 정년 정책 때문에 중소교회는 너무나도 힘들다. 이러한 현실이 만들어내는 비정상적인 일들이 현재 만연하고 있다.

평신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일꾼이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의 정년뿐만 아니라 평신도 사역자들의 정년제도도 교회가 유지되거나 성장하는 데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정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일을 내려놓고 있다. 특히 시골교회에서 이 문제는 더욱 불거진다. 주를 위한 일을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대체로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빠지게 하는 잘못인데, 왜 총회가 이런 정책을 만든 것일까?

5.3 정년제 왜 놓지 못하는가?

첫째, 정년제는 현재의 목회자를 목회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할 유일한 방법이다. 특히 위임목사 신분이 되면, 교회 공동체가 목회자를 원하지 않더라도 물러나게 할 방법이 현실적으로는 없다. 특히 몇몇 목회자의 경우 초심을 잃어버리고 노년으로 갈수록 탐욕적이 되기도 하고, 사역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교회로부터 온갖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당연히 물러나게 해야 하는데, 위임목사인 경우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잘못을 저지른 경우가 아니라면, 물러나게 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없다. 그런 상황에서 정년 제도는 그런 목회자를 물러나게 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된다.

이것은 노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노회 내에는 역시 초심을 잃어버리고 온갖 횡포를 부리며 물을 흐리는 목회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목회자를 노회나 총회의 일에 관여하지 못하게 만들 방법이 현실적으로 없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잘못을 저지른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목사들을 제재할 방법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정년 제도는 그런 목회자를 물러나게 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집을 태우는 셈이다. 몇몇 질이 떨어지는 목회자나 사역자들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정말 좋은 목회자나 사역자들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6.1 “장로교 원리와 위임 목사 제도”와 §6.2 “민주적 절차로 해략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야”에서 다룰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정년의 방법으로 물러나게 할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물러나게 하는 방법을 보장하는 쪽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둘째, 정년제는 젊은 목회자나 사역자들의 길을 열어주는 좋은 길처럼 보여지지 때문에 선호되고 있다. 교회의 노령화로 인한 정체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이다. 교회 안에 젊은 세대는 사라져버리고, 오직 노년 세대만이 남는 것처럼 보여질 때, 교회의 미래는 어두워진다. 따라서 교회도 젊은 일꾼들이 평신도 지도자로 세워져야 하는데, 교회 안에 노년층이 주도권을 잡고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을 때, 젊은 일꾼들의 숨이 막혀버리고 결국 교회를 떠나게 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몇몇 앞서가는 교회는 오히려 정년을 교단적 기준보다 더 낮게 60세나 65세로 낮추어 젊은 세대가 교회 사역의 전면에 나설 수 있게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젊은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가 되었지만, 담임목회로 갈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다보니, 40대에 담임목회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는 경우 도중에 목회를 중단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만일 정년제를 통해서 은퇴를 하게 된다면, 젊은 목회자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방법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70세가 아니라 65세나 또는 60세 초반에 미리 은퇴하게 된다면, 더욱 박수를 받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후배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사랑이 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진 목회자라고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이러한 생각이 맞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몇몇 대형교회는 노년의 장로들이 물러나고 젊은 세대에게 길을 열어주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노년의 장로들이 물러난다고 해서 젊은 세대가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냥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물러나는 것뿐이지, 대체자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하면 굳이 정년제를 고집하여,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물러나게 할 이유가 있을까? 여력이 있는 교회는 교회 내부적으로 정년을 정하여 또는 자발적인 은퇴를 결정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데도 말이다.

목회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정년제를 두어 일할 수 있는 목회자가 물러서게 되면, 젊은 목회자에게 기회가 돌아갈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대형 교회의 경우에 부임할 수 있는 목회자는 젊은 목회자 중에서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에게는 정년제가 있든 말든 중대형 교회의 담임목회의 길이 열려 있다. 목회자가 널려 있어도 정작 모실만한 목회자가 없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게 현실이다. 아무나 데려가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자리만 만들어진다고 젊은 목회자에게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소형 교회는 목회자가 물러난다고 해서, 그 교회에 젊은 목회자가 지원하지 않는다. 차라리 개척을 선택한다. 젊은 목회자에게는 그런 교회들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중대형교회에 젊은 목회자들이 대거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단순히 정년제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 몇 년 일찍 더 은퇴한다고 해서, 없던 자리가 더 많이 생기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당장 정년제를 폐지하면 잠시 동안에는 자리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천년만년 살 것이 아닌 이상, 결국은 그 자리는 생겨나게 되어 있다. 또한 중대형 교회의 경우 젊은 목회자를 새로이 청빙하여 좀더 부흥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5.4 연령으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

선진국으로 갈수록 연령으로 일을 하지 못하게 제한하지 않는다. 사실 공무원으로 일할 연령적 제한 자체가 없으며, 구인광고를 낼 때에도 나이를 특정하여 선발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체력이 요구된다든지 업무의 특성 상 자격 조격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단순히 연령이 많다는 이유로 취업 자체를 제한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일하는 속도가 느릴 수는 있지만, 충분히 이해하면서 공존하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선진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관점이 성경적이기도 하다.

목회의 경우에 나이가 많다는 것은 장점이지 결코 단점이 아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서 목회를 중단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결정으로 목회를 은퇴하면 될 일이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은퇴하고 싶은 연령이 60대 초반일 수도 있고, 50대 후반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생각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강제적으로 어떤 나이를 정하고 그 나이를 넘기면 목회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총회적 차원에서 정년제는 폐지하여 일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옳다고 본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더 잘 일할 수 있게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년제가 폐지된다고 해서 끝까지 사역하겠다는 목회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른 나이에 은퇴하는 이들이 늘어날 수 있다. 정년제가 아예 없는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는다. 스스로 잘 판단하여 은퇴 시점을 잡는다. 사실 은퇴할 시기는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의 문제인데, 디아포라(διάφορα)처럼 접근해서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개인에게 이 문제를 넘길 필요가 있다.

6. 거룩하고 깨끗한 교단을 어떻게 만들까?

6.1 장로교회의 원리와 위임 목사 제도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는 노회(Presbytery) 중심의 교회이다. 즉 장로들(presbyters)의 모임을 통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스템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개인에게 권한이 집중되지 않고,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결정하는 시스템으로 가장 성경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장로란 협의의 치리 장로(ruling elder)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장로(teaching elder, 즉 목회자)와 치리하는 장로(ruling elder, 협의의 장로) 모두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장로를 뜻한다. 인간은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고,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혼자서 결정하는 것은 잘못될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겸손하게 다 함께 머리를 맞대로 하나님의 뜻을 진실하게 구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장로교회 시스템은 감독교회와는 다르게 복수의 사람들이 다스리는 체계이다.

장로교회 시스템 속에서는 지교회도 담임목사가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회를 통해서 다스린다. 성도들의 믿음을 살피고, 권면하는 일을 목회자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당회가 그 책임을 맡는다. 더 나아가 어느 지교회를 목양하도록 담임목사를 세울 때에는 지교회의 성도들이 어느 특정인을 담임목사를 원하여 청빙하는 절차를 거치는데, 지교회가 독단적으로 청빙하지 않고, 노회의 절차를 거친다. 과연 그 목사가 그 지교회를 목양할만한 개혁주의 신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는지, 도덕적인 흠결은 없는지, 그리고 목양을 할 수 있는 원만한 목회자적 자질이 있는지를 살핀 후, 그 지교회의 목사로 파송한다. 그렇게 노회의 파송을 받은 목사가 그 지교회의 담임목사가 된다. 그렇게 어떤 지교회의 목회자로 일할 수 있도록 파송하는 것을 가리켜 위임(委任, commission)이라고 한다.

“위임목사”란 흔히 정년이 보장된 목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사실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위임이란 위임권자의 위임을 받아서 그 위임권자 대신 그 위임권자가 맡긴 일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지교회의 위임권자는 누구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목회자에게 그 지교회를 목양하도록 일을 맡기셨기 때문에, 즉 위임하셨기 때문에, 위임목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인 관점이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렇게 위임을 하는 절차는 노회가 시행한다. 장로교회 시스템에서 지교회는 독립적이지 않고 노회의 관할을 받아야 한다. 장로교회 시스템에서 사실 노회가 각각의 지교회를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 점에서 지교회의 위임권자는 노회이기도 하다. 노회가 맡긴 지교회 목양의 일을 하도록 위임받은 자가 위임목사인 것이다. 따라서 노회가 그 위임을 취소한다면, 더 이상 그 목회자는 그 지교회의 위임목사가 될 수 없다. 위임받은 목사는 위임이 유효할 때에만 위임목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년이 보장된 것이 위임목사라는 생각은 오해일 뿐이다.

이러한 오해는 어디서 왔는가? 일반적으로 노회가 한번 위임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정년까지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교회 내부에서 목회자를 보이코트하는 여론이 형성되어 있어도, 실제적으로 물러나게 할 방법이 거의 없다. 노회에서 위임목사의 위임을 해제하는 일을 좀처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번 위임을 받으면, 정년까지 보장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렇게 정년이 보장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목회는 영적으로 보면 영적인 전쟁과 같은 것이고 사탄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목사를 먼저 공격하기 때문이다. 목자를 치면 자동적으로 양들이 흩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자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부당한 시도들에 대한 적절한 방어책이 있어야 했고, 위임목사의 정년을 보장하는 방식이 그 방어책이었다. 그래야 목회자가 소신껏 목회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좋은 제도는 악용되기 쉬운 법인데, 사실상 축출되어야 하는 자격 미달의 일부 위임목사가 이러한 제도를 빌미로 물러나지 않는 폐해가 반복되어 왔다. 심지어 성추행을 하거나 재정적인 사고를 일으키는 등 나쁜 목사들이 위임목사라는 것을 무기로 물러서지 않아서, 결국 교회가 풍비박산 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위험성이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년제만이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 되어왔다. 하지만 부도덕한 목사를 축출하지 못하고 버티는 사이에 교회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리고, 전도의 길은 계속해서 막혀 버린다. 오늘날 기독교인 숫자가 대거 급감한 이유는 자정 능력을 상실한데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6.2 민주적 절차로 해약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야

사실 총회 헌법은 담임목사와의 계약을 해약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 있다. 헌법 제17장 제2조 “권고 사면”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지교회가 목사를 환영하지 아니하여 해약하고자 할 때는 노회가 목사와 교회 대표자의 설명을 들은 후 처리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를 거쳐 해약할 수 있는지 규정이 없어서 이러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혼란만 있었고, 결국에는 교회가 망가지는 결과만 가져왔다.

그래서 총회는 교인들의 의사를 충분히 보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위임목사 해약 절차에 관한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면, 등록 교인의 1/3 이상의 청원으로 담임목사 신임투표를 위한 공동의회 청원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면 어떨까? 당회는 이미 담임목사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으니 당회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를 강제하면, 일을 더 어렵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부전지를 첨부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어차피 담임목사의 임면권이 노회에 있으니, 노회에 직접 청원하는 것이 일을 간단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면 노회는 이런 문제를 처리를 위임받은 곳(예를 들면, 정치부, 시찰회 또는 임원회 등)에서 이러한 청원을 올린 대표자들을 만나 어떠한 상황인지를 들어보고, 이에 대한 담임목사의 변론도 들어본 다음에 화해나 중재를 시도하거나, 도무지 화해나 중재가 되지 않는다면 대리 당회장을 파송하여 담임목사 신임투표를 할 수 있도록 길을 분명하게 명시해줄 필요가 있다. 청빙 때에는 2/3의 찬성으로 위임을 하게 되었지만, 해약할 때에는 과반수의 불신임이 필요한 것인지와 같은 것을 규정해 놓으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노회에서는 조사하여서 만일 담임목사에게 심각한 범법 행위(성적인 문제나 재정 횡령의 문제 등등)가 있었다고 한다면, 즉각적인 재판을 통해 면직시키는 등 징계 절차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노회 서기가 자동으로 기소위원이 되어 재판을 진행하는데, 우리 교단에 적절한 방법으로 기소 위원을 선정하여 악을 행한 자에 대한 적절한 시벌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의 거룩성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데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회의 거룩성은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적절하게 제거함으로써 유지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 범법자들은 우리가 판단해서 쫓아낼 것을 명하고 있음(고전 5:12-13)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교단의 규정은 이런 부분에서 규정이 미흡하기에 재판을 잘 할 수 있도록 절차를 규정해 놓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담임목사에게 심각한 도덕절 결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교우들이 그 목사를 원하지 않아서 신임투표에서 불신임 되었을 때, 노회가 중재하여 잘 헤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담임목사의 임면권은 노회에 있지만, 그 지교회 구성원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하는 게 장로교회의 원칙이기 때문이다(헌법 총론 제5항). 더 이상 각 지교회의 분쟁이 발생되는 것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절차적 정비를 통해 신사적으로 서로 좋게 헤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한다.

6.3 방탄 노회, 방탄 총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전전 타락을 받아들인다. 즉 이 세상에 그 누구도 타락으로부터 면역된 사람은 없다. 이 말은 목회자도 예외가 아니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서 성적인 문제로 또한 금전적인 문제로 타락한 목회자들을 만나게 된다. 하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가룟 유다도 있었으니, 아무리 선별하고 또 선별해도 타락의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거룩한 교회가 되는 길은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 데 있지 않다.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서 완벽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아예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거룩한 교회가 되는 길은 그러한 죄의 문제가 불거졌을 때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달려 있다.

성경은 믿음의 형제 중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 교회가 치리하여 다루라고 가르치고 있다(마 18:15-17; 고전 5:12-13; 딤전 5:20-21). 따라서 만일 목회자가 범죄하였다고 한다면 이를 노회와 총회에서 다루어서 징계해야 하고,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제명 출교까지 시벌해야 할 것이다. 물론 목회자에 대한 고발은 함부로 받을 것은 아니지만(딤전 5:19), 정말로 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그것이 그 영혼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히 12:11).

그런데 제대로 악한 자들을 징계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교회의 정화를 위해 노력하거나 바른 사역을 하고 있는 단체들을 보복하는 일에 노회나 총회가 악용되는 황당한 일이 종종 벌어진다. 지난 107회에서 몇몇 기독교 사역 단체들을 반기독교 단체로 낙인을 찍어 조사해달라고 요청하는 헌의안이 올라왔고, 이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낙인을 찍어 총회에 보고하는 일이 108회 총회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헌의는 사실상 인천 모 교회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을 돕던 단체들에 대한 보복성 헌의였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재판국에서도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을 돕던 박 모 목사를 면직시켜버렸다. 이런 일들은 총회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호하는 방탄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가라지 또는 양의 탈을 쓴 늑대는 결국 돈의 문제나 성폭력의 문제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비호하는 것은 옳지 않다.

6.4 제대로 된 성폭력 대응 매뉴얼이 필요하다

참담하다. 성폭력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달라고 헌의했는데, “성윤리 예방” 매뉴얼이 나왔다. 그 내용도 두루뭉술하고 실제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할지 안내가 없다. 장로교회 시스템 속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면 어떻게 당회나 노회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안내가 없고, 또한 이러한 문제 제기가 있을 경우 어떻게 당회나 노회가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도 없다. 있으나 마나 한 매뉴얼처럼 보인다. 이런 중요한 매뉴얼을 만들기 위해서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1년만에 뚝딱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매뉴얼을 만들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는데, 시간에 쫓기고 괜히 트집잡는 이들의 몽니에 만신창이가 된 매뉴얼로 탄생한 느낌이다.

7. 개혁 총회를 위한 길은 없는가?

7.1 탐욕스러운 자들의 먹잇감이 되어버린 교권

교단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사람이다. 총회의 돈은 눈먼 돈이 되어 정치꾼들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버렸고, 목회자들의 노후를 위해 마련하려고 했던 기금이나 구제나 선교를 위한 헌금은 일부만이 목적대로 사용될 뿐 중간에 정치꾼들이 빼돌리거나 유용했다. 교회의 문제들은 여기에 빨대를 꽂고 단물을 빨아대는 영적 흡혈귀들에게 악용당했다. 교권은 실제로는 이 세상의 맘몬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겉으로는 목사나 장로의 옷을 입은 현대판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선량한 목회자들은 그런 꼴이 보기 싫어 총회는 관심에 두지도 않고 그저 목회에만 매진한다. 그렇게 눈감아 버리고 신경을 꺼버려서, 더욱 마음대로 행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교묘하게 마치 교단의 중진이나 교단의 영향력 있는 목회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교단의 위상은 날로 실추되어가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을 전혀 준비하지 못하는 현실이 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총대는 그저 거수기 노릇만 할 뿐, 교단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7.2 좋은 총대를 총회로 보내야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좋은 총대를 총회로 보내는 것이다. 또한 나쁜 사람을 총대로 보내지 않는 것이다. 교단 총회는 교단의 신학적 정책적 결정을 하는 교단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이다. 교단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가는 여기서 결정된다. 따라서 총회를 구성하는 총대를 바르게 선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맹인이 맹인을 이끌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15:14)대로 맹인과 같은 총대들로 총회가 구성된다면, 총회의 미래는 어두워질 것이다. 각 노회는 좋은 총대들을 선출하여 보내야 한다. 그래야 총회의 미래가 밝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좋은 총대들을 총회로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노회원들이 면밀하게 살펴서 좋은 총대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보내면 된다. 노회원들이 신실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고 교단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좋은 총대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총대로 선출해 보내야 하고, 총회 정치를 사적인 탐욕을 위한 도구로 악용하는 그런 질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총대로 보내지 않아야 한다. 정말 간단하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현재 각 노회가 총대를 선출하는 방법은 좋은 총대가 선출되는 것을 막기도 하고 나쁜 총대를 걸러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식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후보를 내지 않고 무기명 비밀투표로 하여 다수 득표자를 총대로 선출하는 방법(무기명 직접 투표 방법)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무기명 직접 투표방법을 사용하면, 결국 다수 노회원의 뜻이 반영되어 총대가 선출될 수 있다. 물론 아무런 단점이 없는 완벽한 장치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나마 제일 깨끗하고 정당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많은 노회에서 “무기명 직접 투표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목사회 추천을 통해서, 증경단 추천을 통해서, 혹은 전형 위원회 추천을 통해서, 또는 입후보를 해서 총대 후보가 되고, 노회원들은 거의 형식적인 찬성 절차를 걸쳐 총대를 선출한다. 물론 이러한 방법도 노회의 절차상 정상적인 선출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대체로 나쁜 총대를 걸러내기 어렵고 좋은 총대가 진입하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노회들이 “무기명 직접 투표” 방식으로 스스로 바꾸는 것을 기대하기는 정말 어렵다. 왜냐하면 그동안 이런 방식을 통해서 기득권을 누려왔던 사람들이 이 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이고, 이러한 방식을 변경하려고 하면 미운털이 박히기 십상이어서 섣불리 이런 방식을 바꾸자고 제안하는 것 조차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대 선출방식의 개혁은 총회의 결의로 이루어지는 수밖에 없다. 총회가 결의하여 총대 후보를 제시하지 않은 채 “무기명 직접 투표방식”으로 선출해야만 천서를 인정하는 결정하든지, 후보를 제시한다면 제시된 후보 외에도 제3의 후보에게 투표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상태에서 선출된 총대만을 천서로 받아주도록 결의하면 좋겠다. 나는 이런 방식을 “열린 투표방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하는 투표 용지는 우리나라의 투표용지와는 다르다. 지난 2020년 선거에서 투표용지에는 바이든 민주당 후보, 트럼프 공화당 후보 그리고 조르겐슨 자유당 후보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밑에 빈칸 하나(write in)가 더 있었다. 이름이 적힌 세 사람 외에 투표하는 사람이 아무 이름이든지 적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렇게 그곳에 이름을 적는다고 해서 당선될 가능성은 전혀 없겠지만, 적어도 제시된 후보에서만 고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적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당연한 조치다.

이러한 방식을 우리 교단의 총대 투표에서도 적용되었으면 좋겠다. 전형 위원회에서 또는 입후보를 통해서 4명을 후보로 내세운다면, 빈 칸을 네 개 더 제시해서 제시된 후보가 아닌 노회원 중에서도 반드시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적을 수 있는 “열린 투표방식”을 도입했으면 좋겠다.

존 달버그 액턴 경은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고 했다. 어쩌면 총대권도 일종의 종교 권력이다. 그 권력이 노회원들에 의해서 제지되지 않고 마음대로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방치되면, 결국 그 결과는 자명하다. 타락해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런 제지없이 계속해서 총대로 선출되는 것이 보장되면, 결국 타락한 총대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노회가 스스로 좋은 총대를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 어렵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겠는가? 노회 내에서 괜히 이것을 건들였다가는 어려움을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회적 차원에서 이 개혁적인 조치가 결의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총회에 소망이 생긴다.

7.3 21세기에 걸맞는 총회를 할 수 없을까?

사실 우리의 총회 방식은 아직 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구시대의 유산이다. 지금은 모이지 않아도 의견을 모을 수 있는 방법들이 얼마든지 있다. 21세기에 여전히 구시대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대의제도는 모든 사람이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최상의 방법이었지만,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치명적인 단점을 이용하여 악한 자들이 총회를 먹잇감을 사용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21세기에 걸맞는 총회를 하면 어떨까? 어떤 안건에 대하여 영상을 활용하고 토론을 할 수 있는 홈페이지를 활용하면, 하나의 문제에 대한 충분한 토론을 할 수 있다. 총대 몇 사람이 4-5일씩 한 자리에 모여서 안건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한 채, 그저 정해진 각본에 따라 거수기 노릇만 하고 돌아오는 총회를 할 게 아니다. 그것은 별 효용성이 없다. 그리고 일부 교단 정치꾼들에 의해 총회가 악용되는 일들이 발생한다. 21세기 전자회의 시스템을 연구하여 도입하면 된다. 총대를 굳이 선출할 필요가 없이, 모든 노회원이 다 총회 회원이 되어, 모든 안건을 전체 목사와 총대 장로들이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면 된다. 예를 들어, 어느 노회가 헌의안을 올리면, 그 헌의안을 다루는 위원회(헌의부)에서 헌의안을 심의하여 안건으로 올리고, 일정 기간 동안 이 안건에 대해서 찬반 토론을 하고, 회원들은 더 나은 제안들을 제기하고, 그래서 결국 동의와 제청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전자투표를 통하여 결정하는 시스템을 채용한다면, 안건을 함부로 아무런 토의 없이 결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정치꾼들이 총회를 악용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이런 방식을 채용하면 마치 국회에서 법안이 올라올 때마다 언제든지 심의하여 법률을 만들 듯이, 우리 교단의 당면한 문제들을 언제든지 논의하여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임원들을 뽑고 상비부원들을 뽑는 일들도 충분히 전자 투표 시스템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현재는 모든 총대들이 상비부에 조직되어 활동하게 되어 있는데, 이제는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을 천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면 될 것이다.

8. 신학교 개혁

8.1 지방 신학교 폐지가 답이다

그 동안 지방 신학교는 서울에 있는 총신까지 올 수 없었던 지방의 목사 후보생들을 양육할 수 있는 좋은 기관이었다. 그리고 이런 지방 신학교를 통해서 수많은 좋은 목회자들이 양성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21세기이다. 이제는 양지에 있는 총신에 가서, 학업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굳이 지방 신학교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더 나아가 지금은 지방 신학교의 지원자가 급감하여 이제는 제대로 된 신학교육을 하기 어려운 형편에 이르렀다. 지방 신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원을 확보하는 것도 어려워졌고, 재정을 쏟아붓지만 별로 도움이 안되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는 모든 칼빈대학, 광신대학, 대신대학처럼 정규 대학이 된 학교를 제외한 모든 지방신학교를 폐지하는 것이 답이다.

지방 신학교가 평신도 교육 등을 통해서 활로를 찾아보려고 하지만, 사실 이제는 평신도 교육도 지교회가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으며, 더 나아가 지방 신학교가 아닌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아주 많이 열려 있다. 이제는 과감하게 지방 신학교를 정리하는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왔다.

8.2 총신 신대원의 입학 자격을 교단이 시비 걸지 말아야 한다

총신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목사 후보생이어야 하고 노회에서 추천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현재 시스템이다. 그런데 여학생의 경우에는 총신에서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또한 외국 학생의 경우에도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남학생의 경우에만 반드시 목사 후보생이고 노회의 추천을 받아야만 총신에서 공부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총신을 총회의 신학교라는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총신은 총회의 신학교로서 노회에서 위탁한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러한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대신 총신에는 누구든지 원하는 자가 수학할 능력과 인성을 갖추었다면, 목사 후보생이 아니어도 공부할 수 있도록 총신에 재량권을 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목회를 할 생각이 전혀 없는 평신도들이라도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과 교리에 대하여 좀더 많이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면 총신에 지원하여 공부할 수 있게 열어주어야 한다. 사실 이렇게 배울 수 있는 평신도들이 많아지는 것은 장려할만한 일이다. 또한 굳이 우리 교단에서 목회자가 되고 싶지 않더라도 총신에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도 입학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다만 우리 교단에서 목사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노회에서 목사 후보생이 되고 적어도 몇 년 이상은 수련의 기간을 지난 후에 강도사 고시를 치를 수 있게 자격을 규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목사 후보생이 되는 것은 노회에서만 관리하면 될 것이지, 총신에 목사 후보생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는 총신에서 여성과 외국학생들에게 그렇게 슬며시 문호를 개방해 놓았는데, 아예 모든 사람들이 목사 후보생이 아니더라도 공부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8.3 총회 신학교는 인준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

우리 교단의 유일한 신학교가 총신이었던 것에서 이미 칼빈, 광신, 대신을 포함하게 되어 4개의 신학교로 다양화 되었다. 그런데 총신이 유일한 교단 신학교이기 때문에 칼빈, 광신, 대신 신대원 졸업자에게 총신에서 몇 주간 수학을 하게 만드는 우수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게 할 게 아니라, 이제는 총신, 칼빈, 광신, 대신 4개의 교단 신학교를 교단 인준 신학교로 받아주어서, 어느 신학교를 졸업하든 강도사 고시를 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런 식의 시스템은 미국 교회가 채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에서는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신학교들을 인준신학교로 받아준다. 총신도 그 인준 신학교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총신을 졸업한 자가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에서 강도사 고시를 볼 수 있다. 강도사 고시는 우리 교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목사의 자격을 심사하는 중요한 관문이다. 여기서 걸러내면 된다. 사실 중요한 것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가 보다도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아무리 총신을 졸업했다고 할지라도 잘못된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목사가 될 수 없게 강도사 고시에서 걸러내야 한다. 반대로 미국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나 리폼드 신학교를 졸업했어도, 강도사 고시를 통해서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면 우리 교단의 목사로 받아주는 절차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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