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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분도 화로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 이국진

의분을 낼 수 있으며, 당연히 의분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의분을 가지는 것이 곧 화를 내도 좋다는 면허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를 위하여 분노하는 것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이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성경은 기록하기 때문이다(야고보서 1:20).

여기서 우리는 분노를 “생각으로서의 분노”와 “표현으로서의 분노”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생각으로서의 분노는 어떤 불의한 일을 보았을 때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가지게 되는 정서적 상태를 의미한다. 표현으로서의 분노는 생각으로서의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으로서의 분노는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조정하기 어렵다. 부당한 일을 보거나 당했을 때, 마음속에서 분노의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은 어쩌면 자동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발생한 분노의 감정을 밖으로 표출할 때이다.

우리는 앞에서 의분의 종류를 구분하면서 자신을 위한 정당한 분노를 하는 것은 의분이라 할 수 없음을 조심스럽게 구분했다. 반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보다 큰 대의를 위한 분노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가져야 할 우리의 자세일 것이라고 분석해 보았다. 하지만 더 나아가, 아무리 의로운 분노라 할지라도 그것이 표출하는 방식이 화냄의 형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예수님의 분노나 모세의 분노는 속에서 솟구하지는 분노(=생각으로서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여 분출된 분노(=표현으로서의 분노)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의롭게 분노하더라도, 그것은 다양한 요소에 의하여 콘트롤되어야 하며, 분노의 감정에만 콘트롤되어 발산되어서는 안 된다. 나의 의분을 일으키도록 만든 행동이 있다면, 과연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그 이유를 들어보아야 한다. 아무런 이유를 들어보지도 않고, 섣부른 판단 하에 분노를 표출한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의로운 분노도 아니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언 18:13). 뿐만 아니라, 과연 화냄의 형식으로 표출된 분노가 과연 그 목적을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사숙고가 병행되어야 한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씀(야고보서 1:20)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정당한 이유로 분노하면서 부당하게 그 분노를 표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정확하게 의분을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분노하면서도 유일하게 그 사랑의 순도가 영향 받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맥스 루카도는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단정한다.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분노처럼 충동적이어서 감정의 폭발이나 폭력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분노는 무시당했을 때 표출하는 인간의 분노와는 다르다. 1 따라서 예수님처럼 분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섣부른 결론일 수 있다.

의분이 “정의감”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정의감이 “분노의 형식”으로 분출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지적한 선지자들의 메시지들이 분노의 카테고리로 설명할 수는 없다. 종교개혁을 단행한 칼빈이나 루터의 메시지를 분노의 카테고리에 넣어, 정의감이 있다면 분노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분노하지 말라는 권고는 “성질을 못 이겨 폭발하는 상태”에 들어가지 말라는 권고이다. 아무리 옳은 것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이 무례함이나 분노함이라면 잘못이다.

자녀들이 잘못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자녀들이 잘못할 때, 부모는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화를 냄으로써, 자녀들이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하지 않도록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테드 트립(Tedd Tripp)은 말한다. 2 불의와 잘못을 보면 분노의 형식으로 성질을 폭발시킬 것이 아니라 애통하는 마음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는다고 10번째 정의에서 규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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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맥스 루카도, [은혜가 내 안으로 들어오다] (규장, 2004), 39.[]
  2. 테드 트립, [마음을 다루면 자녀의 미래가 달라진다] (디모데, 1998),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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