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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없는 분노는 없다

– 이국진

하지만 옳은 이유 때문에 분노하는 것을 의분라고 정의한다면, 모든 분노는 의로운 분노일 것이다.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화를 내지 않고 숨을 것이다. 사람들이 화를 내는 데에는 정당한 이유가 항상 존재한다. 그래서 정당한 이유에서 내게 되는 분노를 의분이라 한다면, 비록 그 판단이 상대적이라 하더라도 모든 분노는 의로운 분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단순히 분노의 근거가 옳은가 하는 것으로만 의분인지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 우리에겐 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의로운 분노와 의롭지 못한 분노를 조심스럽게 나눌 수 있는 기준은 누구를 위한 분노인가이다. 만일 자신을 위한 분노라고 하면,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이유로 포장되더라도 의로운 분노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분노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타인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의로운 분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내지 않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사랑의 7번째 정의와 연관이 있다.

아쉽게도 우리는 분노해야할 상황에서는 침묵(비겁)하고, 분노하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는 분노한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땅 주인이나 구청 직원 또는 동회 직원, 소위 가진 자, 힘 있는 자에게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이발장이나 야경꾼들로 대표된 가지지 못한 자, 힘없는 자에게는 단돈 일 원 때문에 흥분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고,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다 붙잡혀 간 소설가를 보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대항하지 못하고, 겨우 설렁탕집에서 오십 원짜리 갈비탕에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그 불의함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채찍질 당하고, 침 뱉음 당하고, 가당치 않는 욕설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부당함에 대해서 예수님은 침묵하셨다.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이 모습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고 의분을 일으키신 모습과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노를 하실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분노하지 않고 침묵하실 수도 있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하는 모습을 보고서 분노할 수 있었던 모세는, 자신이 구스 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던 미리암과 아론에 대해서는 온유함으로 대하였다.

하지만 칼로 무를 베듯이 정당하고 의로운 분노가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를 위하여, 옳은 이유 때문에 분노한다. 하지만 이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자신의 분노를 의로운 분노로 위장하고, 정의와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포장하여도, 그 속에 죄성의 요소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사탄은 우리의 정의감에 호소하여, 분노하도록 유도한다. 여기에 우리가 속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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