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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태어난 자 (민 3:11-13)

제가 어떤 사업가 한 분을 알고 있는데요. 이분은 꽤 경영 능력이 뛰어나서 자신의 사업을 아주 크게 일으킨 분이셨습니다. 부친으로부터 조그마한 사업체를 하나 물려받았는데, 그것을 잘 운영을 해서 그래서 아주 큰 회사로 발전시킨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참 회사도 잘 이끌고 잘 운영하고 하시는 그런 분인데, 이런 분에게도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분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그분의 고민을 제가 들어볼 수가 있었는데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장자인데, 성경 말씀을 보면 장자는 하나님께 속했다. 처음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고 하는 그 말씀 때문에 고민이 된다고 하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바로 그런 말씀이 있는 것이죠. 민수기 3장 13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구분해냈다고 하는 겁니다. 구별했다는 것이죠.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따로 떼어놓은 것을 가리켜서 거룩하게 구별했다고 하는 것인데,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따로 선택해서, 따로 구별해서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이 누구냐? 처음 태어난 사람들, 장자, 처음 태어난 짐승이든 사람이든, 처음 것은 하나님께서 따로 떼어 놓으신 따로 구별하신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시 장자 있습니까?

첫 열매, 처음 태어난 것은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할 하나님의 것인데, 자기가 목회자의 길로 가지 않고, 이렇게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마음속에 걸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사업을 해서 열심히 성공하고 있지만, 과연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일까? 내가 목회자의 길을 가고, 또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되지는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진지한 고민을 가지고 계신 그런 분이었습니다. 사실 그분의 부모님들도 이러한 성경 말씀에 따라서 자녀를 낳을 때 기도를 했다고 그래요. 우리 아이를 낳게 되면, 첫아들은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서원하면서 기도까지 했는데, 목회자의 길로 가지 않고, 자기 자신은 이렇게 세속적인 일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대답을 해드렸습니다. 뭐라고 대답을 했을 것 같은가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목회자의 길로 굳이 가실 필요가 없다고 제가 대답을 해드렸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고자 한다면,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가 있겠는데요. 그 외에도 많은 이유들을 댈 수가 있겠지만, 첫 번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것이 다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목회자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회자의 길만이 하나님의 일이고, 성직자의 길이 아닌, 일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 아니라, 사실 성경적인 관점에 보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그런 성경적인 관점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일이든, 사업을 하는 일이든, 아니면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이든, 아니면 공직자로 삶을 살아가든, 아니면 부모로서 자녀를 돌보는 일이나, 아니면 자녀로서 부모를 돌보는 일이든,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모든 일들이 사실은 세속적이고,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 아니라,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오.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주신 자리라고 하는 그 사실을 먼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따라서 목회자의 길만이, 성직을 수행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이 가운데 목회자가 있다고 한다면, 목회자로 일을 하다가, 그러나 때로는 목회자의 일을 그만두고, 일반적인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일반적인 일을 하다가 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목회자의 길로 갈 수가 있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일이지, 목회자의 일만, 성직자의 일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먼저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무엇(what)을 하는가보다도 어떻게(how) 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하느냐? 무엇을 하는가? what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판검사가 되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판검사에 올라갔는데,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거나, 정의를 내버리는 일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실 일이 되는 것일 겁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간다고 할지라도, 만일 그 자리에 올라가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산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산다고 한다면, 그 일은 나쁜 일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목회자의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어떠한 거룩한 직책을 맡았다고 할지라도, 그 직책에 앉은 사람이 잘못된 일을 하거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일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일이지, 책망받을 일이지, 거룩한 일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나옵니다. 홈리와 비느하스라고 하는 두 아들이 나오는데, 이들도 제사장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들을 했던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특별히 성막의 일을 하라고, 제사의 일을 하라고 구별된 사람들이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라고 하는 제사장들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한 것이죠. 제물을 마음대로 편취하고, 성전에서 악을 행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고요.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하나님의 뜻대로 수행한다고 한다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하나님의 뜻대로 진지하게 해 나간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우리 자녀들을 가르칠 때에도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녀들에게 꿈을 심어주면서,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네가 커서 무엇이 되고 싶느냐?”를 질문합니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대통령이 되고 싶니? 아니면 사업가가 되고 싶니? 연예인이 되고 싶니? 아니면 어떤 판검사가 되고 싶니? 그런 직책만을 생각하면서, 어떤 직책을 하겠다고 하면, 그것을 좋아하고 박수 쳐주고, 그리고 격려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꿈을 갖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강조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일을 맡게 되었을 때, 너는 무엇을 하고 싶느냐? 만일 의사가 된다고 한다면, 그 의사가 되어서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 그저 돈을 버는 일이 제일 좋아서가,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해 주는 그런 마음이 더 중요한 것이죠. 판검사가 된다고 한다면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사람들, 정의를, 정의를 받지 못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일들을 할 수 있게 만들어야 되는 것인데, 아무리 높은 위치에 올라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그 어떠한 직분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어떤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하고 좋은 일들을 우리가 해나간다고 하면,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옆에 사람들한테 한번 격려하면서 이야기해 주십시다.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계시군요.” 맞아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세속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어서, 그 자리에 들여보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내가 있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주신 자리라고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일들을 다 내팽개쳐버리고, 그저 목회자의 길로, 종교적인 일을 하도록 그렇게만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생각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그분이 그렇게 목회자에 갈 필요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목회자의 길로 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특별히 목회자의 길로 불렀을 때라야만 그 길로 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불렀다고 하는 그런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 길로 가게 만드신다고 하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가게 되는데요. 그런데 사실은 아무나 그렇게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하는 확신도 필요하지만, 또 하나 더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목회자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도록 나를 그런 특성들을 주셨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걸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가 “내적인 소명”과 더불어서 “외적인 소명”도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내적인 소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 길로 가게 만드셨구나.”라고 하는 그런 확신을 가리켜서 내적 확신이라고 하는 것인데, 내적 소명이라고 하는 것인데, 외적 소명이 무엇이냐 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인정해 줘야 되는 것이오. “당신은 목회자에게 일로 가야 될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는 이런 달란트가 있고, 은사가 있으니까, 목회자의 길로 가야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교회 공동체가 인정해 주고, 그 사람의 길을 축복해 주면서 가게 만들어 줄 때,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이 함께 있을 때, 목회자의 길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 그저 본인이 은혜받았다고, 내가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 같다고 하는 그런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결정만 가지고 나갔다가는, 그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그분과 대화를 하면서 그리고 그분을 살펴볼 때 그분이 꽤 건실한 아주 좋은 신앙인이었기는 하지만, 목회자적 자질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런 대답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목회자로 나아가는 것보다는, 그저 사업을 하면서 그리고 그 사업을 하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만드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의 자리가 그 자리인데, 그 자리를 팽개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지도 않은, 그런 자질도 없는 목회자 길로 억지로 갔다가는, 고통을 당하게 되고, 오히려 힘들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누가 목회자의 길을 가야 되는가? 마음의 감동뿐만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 길로 가야 한다고 하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함부로 그런 결정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완벽해야만 목회자의 길로 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모두가 다 부족한 사람들이고, 여러 면에서 약점들이 있기 때문에, 완벽해야만 주님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아무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그 길로 가야 한다고 하는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이 있을 때 가는 것이 맞기 때문에, 함부로 가서는 안 되는 것이죠.

세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해 주셨다고 하는 이야기는 오늘 민수기의 말씀에서처럼, “처음 태어난 자들은 내 것이다.” 내가 특별히 구분해서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이렇게 말씀해 주셨을 때, 그 사람들이 성전에서 일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민수기 3장 전체를 살펴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처음 태어난 사람들, 장자들을 내 것이다. 너희는 내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서,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하도록 만들었느냐? 성막에서 일을 시킨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집에서 자기 할 일 하면서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자들을 나의 것이라고 말씀해 주실 때, 그 배경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하던 그 사건이 배경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앞에 울부짖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주셨는데, 그렇게 건져주실 때 애굽 왕 바로가 거부하는 바람에,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내려서, 그 애굽 왕을 혼내주시고, 그리고 그들을 건져내주셨는데, 그 10가지 재앙이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지만, 마지막에 강펀치를 날린 재앙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재앙이 어떤 재앙이죠? 장자의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서, 그날 밤에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태어난 생물들을 다 죽여버리신 겁니다. 바로 왕의 장자에서부터 시골 마을의 한 아녀자의 그 장자에 이르기까지, 짐승의 첫 새끼까지, 그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태어난 것들을 다 죽이는 그런 장자의 재앙이 마지막 10번째의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민족들의 장자들은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특별하게 지시를 내려주셨기 때문인데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는 어린양을 준비해서 그 어린양을 잡아 죽이고, 그 피를 받아서 그 피를 문에 바르라고 했습니다. 그 피를 문에 바르게 되면, 하나님의 사자가 죽음의 사자가 온 땅을 지나다니면서, 모든 처음 태어난 것들을 다 죽일 때, 그 피를 문에 바른 집만큼은 그냥 건너뛰어서, 그 집은 안전하게 해 줄 거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날 밤이 바로 유월절인 것이죠. 유월절. 그냥 건너뛴, 죽이지 않고 건너뛰게 만든 그날이 바로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장자들이 한 명도 죽지 않고 다 온전하게 살 수 있었던 그 이야기를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원래 장자들이 죽어야 하는데, 그 장자들이 죽지 않고 내가 살려주었으니, “그 장자들은 내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죠. 원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인데, 살게 된, 그 살아나게 된, 그 인생을 가리켜서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너희는 내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나의 종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뜻대로 살아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장자들은 내 것이다.” “내게 바쳐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장자들은 다 하나님께 구별해서 바치게 되었는데요. 그 장자들은 그러면 하나님의 것이니까, 성막에 가서 거기서 주의 일을 하면서, 성전의 일을 하면서, 그렇게 지냈었어야 했느냐면, 그게 아닙니다. 그냥 자기 집에서 살았어요. “하나님의 것이다. 내 것이다. 너희는 이제는 내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 장자들이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막에 와서 일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집에 살면서, 자기 일을 하면서 그냥 살았어요. 오늘 우리가 다 읽진 않았지만, 민수기 3장 후반부에 가면, 40절에서부터 51절에 보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자들의 숫자를 다 세보니까, 23,273명을 헤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자들 2만 3천273명 대신에, 레위인 2만 3천 명으로 하여금 성전에서 일하게 만들고, 몇 명이 부족합니까? 273명이 부족하니까, 273명에게는 5세겔씩 받아서, 1365세겔의 그 물질을 드려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드려서, 대신 레위인들이 일하게 만들고, 대신 헌금을 드려서 문제를 해결해 버린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 장자들은 내 것이다 말씀해 주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장자들이 모두 다 차출돼 가지고, 일하게 된 것이 아니라, 레위인들이 일하게 됐고, 레위인이 부족하면, 돈을 드려서, 그래서 그 경비를 충당하게 하면서, 이 장자들은 그냥 자기 집에서 산 겁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농사짓고, 목축하는 사람 목축하고, 아무튼 다른 일들 하면서, 일반적인 일을 하면서 산 것이지, 이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일, 소위 성전에서의 일을 하는 사람들로 차출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 구별되었고 바쳐진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성전에서의 일 성스러운 일, 종교적인 일들을 해야만 했었던 것이 아니라, 레위인들이 대신 일을 해야 했었고, 그 장자들은 그냥 자기 자신의 일생을 살아도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장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셔서 살려주셨구나”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면 되는 것이었던 것이죠. 자기 자리에 있는 그 자리에서, 내 인생은 하나님께서 살리신 거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감사함으로 살아가면 되었던 것이지,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성전으로 와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또 이 얘기 외에도 다른 몇 가지 더 이유가 더 있습니다마는 아무튼 그렇게 말씀을 드려서, 그분이 근심을 덜고 열심히 사업을 해서, 지금도 아주 열심히 잘 사업을 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민수기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구약시대 때에는 장자들을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신약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것입니까? 신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 다”입니다. 그 옛날 출애굽 시대 때는 장자들이 죽을 뻔했으나,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서 살아났다고 한다면, 우리 신약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 영원히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죄인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 옛날 문설주의 피를 바름으로 말미암아 장자들이 죽임을 면했던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위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음을 면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게 되었던,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된 것이죠.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것이다. 너희가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너희를 살렸으니 너희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다 그 옛날 장자가 하나님에게 속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오.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빚을 졌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덤으로 인생을 산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요? 모두가 다 목회자의 길로 가야 되나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찾아 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일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내게 맡겨주신 그 일이 그 사명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매 순간순간마다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일어날 때, “그냥 또 하루가 시작됐구나”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또 하루의 선물을 주셨구나.”라고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 날을 오늘 은혜로 주셨구나.”라고 생각해야 될 것이고, 따라서 감사함으로 매일매일 살아가야 할 것이고, 또 그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일까? “내가 목회자이고, 내가 성직자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왜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니, 내가 너희를 구별해서 나의 자녀로 삼았다. 나의 것으로 삼았다고 말씀해 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직자가 되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으로 우리 집안에서의 목회자요. 우리 사업터에서 목회자요.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목회자와 같은 마음으로, 거룩한 인생을 우리 모두가 다 살아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처음에 언급했던 바로 그분은 늘 고민이 있었잖아요. 내가 주의 일을 해야 되지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고민을 가지고, 내가 이렇게 함부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해야 되지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마음의 부담감을 가지고 살았는데, 사실 그런 부담감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 가정의 목회자로 불러주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 직장의 목회자로 불러주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의 목회자로 빛과 소금으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로 우리를 파송해 주셨는데, 내가 그러한 그 하나님의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잘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장자들만 그런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불러주셨기 때문에, 그 부르심에 부응하면서, 우리가 처해 있는 곳이 어디든지 간에 그곳에 파송하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을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이죠. 그 옛날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요셉은 어느 날 꿈을 꾸면서 놀라운 소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처음 맞이한 자리는 종의 자리였습니다. 그 종의 자리를 맞이하게 됐을 때, 우울해하면서 괴로워하고 절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주신 이유가 있구나 생각하면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자처럼 살았어요.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특별한 목적이 있구나 하면서 살 겁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을 본 거예요.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만드는 그런 일들을 하게 만든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그 요셉이 오히려 더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절망한 것이 아니라, 그 감옥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주신 이유가 있고, 사명이 있고 나를 이 감옥의 전도자로, 이 감옥에 사명자로 나를 보내주셨구나 생각하면서, 거기서 최선을 다하게 될 때, 그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감옥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있게 된 것이죠.

우리를 불러주신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직자로 불러주신 자리, 목회자로 불러주신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매 순간순간마다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고 빛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그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하신 일이에요.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고 천한 자리로 오시고, 종의 자리로 오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또 나를 부르신 그 자리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그 자리가 내게 주신 소명의 자리요 목회자의 자리요 성직자의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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