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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기의 방식을 구하지 않는 것

– 이국진

많은 현대 영어역본이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의 7번째 정의는 자기의 “방식”을 구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내 방식대로가 아니라, 상대방의 방식을 배려하여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교만함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자신의 방식도 양보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사랑이 있다. 하지만 정말 부족한 분야가 있다면, 이런 점에서이다. 자신이 가진 방식을 양보하는 데에는 서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게 옳다면, 다른 사람이 다치든지 말든지 무조건 주장하는 경향을 소위 신앙이 좋은 크리스천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참된 사랑은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바울 사도의 경우, 고린도 전서 10장에 보면, 우상의 제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기록되어 있다. 바울 사도는 우상에게 바친 음식도 크리스천들이 먹을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다른 신들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신들에게 바친 제사 음식이라 할지라도 감사함으로 먹으면, 괜찮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구약 다니엘서에 나와 있는 태도와는 상반된 태도였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채식만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셨다(마가복음 7:19).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태도가 이제(그리스도 이후에는) 신학적으로 옳은 것이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자신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있어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시험 드는 일이 있다면, 먹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23-24)

내 신앙 양심으로 보면, 먹어도 아무 문제없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서는 먹지 않겠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태도였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고린도전서 8:13)

내 방식을 양보할 수 있는 아량과 유연함이 있어야겠다. 아내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말고, 남편의 방식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남편은 자신의 방식대로 할 것이 아니라, 아내를 섬세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교회 내에서도 내 방식을 주장할 것이 아니다. 예배당에는 반드시 빨간 색 카페트만 깔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배를 드릴 때, 미국에서 전래된 찬송가만을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지만, 방식의 문제라고 한다면 충분히 양보할 수 있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나는 복음성가를 꼭 불러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찬송가가 주는 감동이 있기에 찬송가를 부르는 것도 참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청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복음성가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의 가장 연세가 많은 집사님(84세)께서 하셨던 말씀에 나는 감동했다. “나는 예배 때 부르는 복음성가가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우리 교회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전도라는 것을 생각할 때, 청년들이 좋아하는 복음성가를 기쁘게 부르기로 했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 운동을 하고 있는 마크 드리스콜(Mark Driscoll) 목사는 “열린 손, 닫힌 손”(Open Hand and Closed Hand)라는 비유를 말하기를 좋아한다. 교리와 같이 변할 수 없는 진리는 양보할 수 없고, 꼭 지켜야 할 것이지만, 문화와 관련된 것이라면 열린 손처럼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 맞는 문화적 표현을 가지고 복음을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어디까지가 껍질이고 어디서부터가 알맹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양파 껍질처럼, 어느 선까지 우리가 손을 열어야 하는지 실제적인 각론에 들어가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열린 손, 닫힌 손”의 원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런 원리는 드리스콜이 처음 착안한 것이라기 보다는 바울 사도의 전략이기도 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하라. (고린도 전서 10:3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고린도 전서 8: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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