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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는다

– 이국진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의 이익을 목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보상(reward)이 행동의 동기로서 작용한다면, 그 행동은 더 이상 도덕적이지도 않고, 더 이상 참된 신앙(true, natural religion)일 수 없다고 하였다. 1

문제는 과연 우리가 정말 100% 자신의 유익과 상관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유익과 관련이 없는 사랑을 베풀 수 있는가? 아마도 우리는 100% 자신의 이익과는 상관이 없는 사랑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한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수단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사람은 행복이라는 목적을 향하여 나간다. 혹자가 전쟁에 나가는 이유도 행복이요, 혹자가 전쟁을 피하고 반대하는 이유도 행복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모든 행위는 바로 이 행복을 위한 것이요, 심지어 목을 매어 자살하는 그것도 바로 이 목적 때문이다 (파스칼, 팡세 6.425)

행복을 추구한다는 말을 “자신의 유익을 구한다”는 말로 바꾸어도 말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자신의 유익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행동하는 그 밑바닥에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들어있는 것이고,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심지어 목을 매어 자살하려는 이유도 행복의 욕구 때문이라고 하는 파스칼의 말은 참으로 일리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하면, 사람들이 사랑을 베푸는 이유도 자기의 행복(유익)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사랑을 베풀면 뿌듯한 마음이 든다. 언젠가 맥도날드 햄버거 식당에 들어갔을 때였다. 백인 거지 한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구걸을 하였다. 그래서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어보고, 그가 원하는 메뉴를 주문해 주었다. 겨우 5불 정도를 가지고 선심을 쓴 것인데도,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사랑을 실천하면, 기쁜 마음이 있다. 사랑을 실천하면, 행복을 느끼게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행복한 느낌이 있다. 온갖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사랑을 베푸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자신의 행복과 관련되어 있으며, 필연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사랑의 7번째 정의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자신의 이익(유익)과 전혀 관계가 없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씀은 반대급부를 바라고 사랑을 베푸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반대급부를 바라고 사랑을 베푸는 전형적인 예를 찾는다면, 경찰 기금에 기부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미국에서 경찰 기금에 기부하면, 그 사실을 표시하는 스티커를 보내준다. 어떤 사람들은 그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니면서, 혹시 신호 위반을 하거나 과속을 하다가 경찰에게 적발되었을 때, 혹시라도 이 스티커를 보고 한번 봐주지 않을까 하는 소망으로 기부금을 내기도 한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부행위의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소방서, 경찰서 등 여러 기관에서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들을 교회가 많이 받는다. 그럴 경우, 우리 교회는 도움을 조금씩 주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도움을 주는 동기 가운데 하나는 우리 교회가 커뮤니티 안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가야한다는 어떤 손익계산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역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이 된다.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고 베푸는 사랑의 행위가 진정한 사랑일 수 없다는 점에서, 성경은 사랑은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6)

반대급부를 바라고 사랑하는 사랑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종종 이러한 반대급부는 “명예”이기도 하다. 바리새인들의 구제와 자선행위는 외식적이었다. 그들은 구제와 자선의 대상으로부터 어떤 반대급부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자선행위를 드러내길 좋아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다.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을 기대하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6:2-4). 문자적으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기 위해 떠벌리지 말고, 가능하면 은밀하게 구제하고 자선을 행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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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Immanuel Kant, Religion within the Boundaries of Mere Reg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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