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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예루살렘 (삼하 14:1-24)

오늘 성경 말씀을 읽었는데, 성경 말씀의 이야기가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좀 이해를 하셨습니까? 이 당시에는 소위 복수의 법(lex talionis)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고요. 그리고 마을에서는, 그리고 동네 공동체에서는 재판할 수 있는 그런 권한들도 있었습니다. 복수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요. 이 복수의 법을 가리켜서 라틴어로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라고 하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복수의 법 무슨 말이냐 하면, 누군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면, 그 죽임을 당한 피해자의 제일 가까운 가족이, 혹은 친척이 그 살인자를 찾아내어, 그 살인자에게 원수를 갚는 것이 정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내 자녀를 죽이면, 그러면 그 자녀의 아버지가 그 죽인 살인자를 찾아가서 죽이면, 그것은 범죄가 아니라, 복수를 한, 정당한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하는 법이 이 당시에 구약시대 때 있었던 복수의 법, 렉스 탈리오니스라고 하는 그런 법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이런 법이 구약 성경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있었고 행해졌다고 하는 사실이,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우리도 복수를 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원수를 갚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셨으며, 뿐만 아니라 원수들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용서의 법에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 복수의 법에 따라서 살아가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서, 이제는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한 처벌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겠고요. 그래서 이제는 사회가 발달되어서, 어떠한 억울한 일이 있을 때, 누군가 우리 가족을 죽였을 때, 그것을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아버리는 것은 그건 범죄 행위가 되는 것이고, 우리가 잘 알듯이 개인적으로 원한을 갚는 것은 감정이 실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공평한 대로의 보응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하게 공격하는, 더 심하게 복수를 해버리는 그런 성향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적인 복수를 하는 것은 옳지 않고, 법에 의한 심판, 재판에 의해서 그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아무튼 이 당시에는, 다윗이 살고 있던 이 당시에, 그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던 법이 무엇이냐 하면, 복수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복수의 법만 통용이 된 것이 아니라, 이 마을 자체가 하나의 재판정에 역할을 해서, 그래서 그 마을에서 심판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마을에 어떤 범죄자가 있으면, 그 범죄자를 마을의 장로들에게 데리고 가서, 그 장로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이고, 그 재판의 결과에 따라서 형벌을 가하는 그런, 동네마다 그렇게 동네의 장로들 앞에 가서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게 되는 그런 제도들이 이 당시에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압살롬의 살인 행위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압살롬의 여동생이었던 다말이 암논이라고 하는 배다른 형제에 의해서, 배다른 오빠에 의해서 겁탈을 당하게 되는 그런 불상사가 다윗의 가정 가운데 있었고, 그것을 알게 된 다말의 오빠였던 이 압살롬이 암논을 향해서 원수를 언제 갚을까, 언제 갚을까 하고 기회를 보고 있다가, 그 일이 일어난 지 2년이나 지난 뒤에, 양털 깎는 날, 그가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을 때, 부하들을 시켜서 살해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자기 친 여동생이 그런 성적인 그런 추행을 당하고 폭행을 당하는 그 모습을 듣게 되었을 때, 오빠로서 그 사람을 그 당사자를 죽이는 것도 아마 시원치 않았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겁탈한 것에 대한 처벌로서 살인은 과도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으로 본다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만한, 그런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 것이고요. 결국 이 압살롬은 이 암논을 죽인 다음에, 자기가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도망가야만 했었습니다. 압살롬은 살인죄에 대한 처벌을 그 마을에서 받든지, 아니면 국가로부터 처벌을 받든지, 아니면 복수의 법에 의해서, 그 암논의 가까운 친족이 이 압살롬을 죽이게 되는, 그런 복수의 법에 따라서 죽임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이 압살롬은 멀리 도망가야만 했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어디 가서 살았는가? 그술이라고 하는 지역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성경에서 그술이라고 하는 지역 이름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처음 들어보시죠? 그술이라고 하는 곳이 어디냐면, 지도상으로 보면, 저 갈릴리 바다 동쪽 편에 있는 지역입니다. 영어로 써놔서 좀 잘 안 보이시겠지만, 파란색으로 이렇게 동그라미 이렇게 쳐놓은 데 있지 않습니까? 보이시나요? 보이면 보인다고 얘기를 해 주세요. 파란색으로 동그라미, 이렇게 타원형 동그라미 쳐놓은 거 보이십니까? 거기가 그술 지역인데, 갈릴리 호수 오른쪽 편에 있는, 동쪽 편에 있는 지역이 그술 지방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살고 있는 지역은 어디죠? 예루살렘이잖아요. 그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아래쪽 파란색 동그라미, 동그라미가 아니고, 아무튼 잘못 그렸지만, 아무튼 그게 하나 있는데 저기가 바로 예루살렘인데, 예루살렘은 어딥니까? 사해 바다 북서쪽 근처에 있는 도시가 바로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 예루살렘에서부터, 그술 지방까지 떨어진 것이 약 거리가 얼마큼 되냐면, 마일로는 70마일, 킬로로 바꾸면. 몇 킬로미터 정도 될까요? 112km 떨어진 곳입니다. 112 킬로면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이죠? 여기서부터 대전, 대전은 한 90km 떨어져 있습니다. 대전보다 좀 더 멀리 가 있는 어디가 어느 정도냐 하면, 순천 정도? 여기서부터 순천 정도 떨어져 있는 그곳에 압살롬이 도망간 겁니다. 그러면 그 거리가 얼마 큼의 거리가 되는가요? 드라이브한다면 지금이야 1시간 반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겠지만, 당시에는 자동차가 없으니까, 걸어서 가든지, 나귀를 타고 가든지 한다고 하면, 하루 8시간씩 걷는다고 한다면, 5일이 걸리는, 그러니까 넉넉 잡아서 일주일이 걸려야 갈 수 있는, 그 당시로서는 정말 먼 타양에 가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나그네로서, 이방인으로서 저 구슬 지방에서 살아가야만 했었던 것이 바로 압살롬의 형편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서 살다가 구슬 지방으로 갔으니까, 그곳에서의 삶이 행복하고 너무나도 재밌고 즐거웠을까요? 아니면 정말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려웠을까요? 고통스러웠겠죠. 나그네로서 그곳에서 살아야 되는 것이죠.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타지에서 혼자 외롭게 살아야 되는 그 삶이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그 삶을 그곳에서 살아가야만 했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죄가 우리들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화가 나서 죄를 짓기도 하고요. 또는 탐욕하는 마음 때문에 욕심 때문에 죄를 저지르기도 하는데, 어떠한 것이 동기가 되었든지 간에, 그로 인한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결과는 무엇이냐면, 압살롬이 분노 가운데 살인을 저질러서, 결국 그 평상시 누리던 그 삶에서부터 멀리 도망가서, 저 먼 곳에서 정말 힘들고 어렵게 살아야만 했었던 것 같은 그런 결과를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하면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압살롬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압살롬에게만 고통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입니까? 아버지 다윗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죠. 자식이 저 멀리 도망가서 살고 있는데, 그 자식을 보지 못하는 다윗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편하지 않겠습니까? 편하지 않는 거예요! 맛있는 진수성찬을 먹어도, 우리 자식 생각에 그것이 넘어가지 않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먼 곳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식 생각하면 기쁘지 않은 거예요. 이 다윗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압살롬이라고 하는 그 아들이 자기의 또 다른 자식을 죽였지만, 그래서 악한 일을 했기는 했지만, 그 자식이 자기로부터 멀리 떠나가 있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압살롬도 물론 고통스러웠겠지만, 그 떠나버린 압살롬을 생각만 하면, 이 아버지로서 이 다윗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그 모습이 그 주변에 있던 요압 장군의 장군이 보니까, 너무나도 안타까운 거예요. 우리 주군인 다윗 왕께서 자기 아들 압살롬 때문에 이렇게 마음 아파하고, 그 아들 생각 때문에 잠 못 이루고 이 아들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이 요압 장군이 중재자로 나서게 됐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저 죄를 짓고 살인죄를 저지르고 멀리 도망가 있는 그 압살롬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살인자를 다시 심판하지 않고, 죽이지 않고, 처벌하지 않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다시 무사하게 데리고 돌아올 수 있을까? 그 작전을 누가 세웠는가? 요압이라고 하는 사람이 세우게 된 것입니다. 요압 장군은 어떤 한 여인을 수소문해서 구했습니다. 연기를 잘할 수 있는 한 여인을 수소문해서, 그래서 다윗 앞에서 연기를 하게 만듭니다. 상복을 입고 다윗왕 앞에 나가서, 펑펑 울면서 다윗왕 앞에 하소연을 하는 겁니다. “다윗 왕이시여, 큰일 났습니다. 제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두 아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하나를 잃어버린 것도 내게 큰 아픔이오. 과부로서 너무나도 큰 힘든 일인데,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살인자를 그냥 놔두면 안 되니까, 그 아들을 우리한테 내놔라. 그러면 우리가 저 아들에게 살인죄를 처벌해서, 저 아들을 죽이겠다고,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고 있으니, 왕이시여, 이거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하루아침에 내가 한 아들을 잃은 것도 너무나도 마음에 슬픈데, 또 하나의 아들을 또 잃게 생겼는데, 왕이시여, 어떡하면 죽겠습니까?” 하면서, 그 앞에서 펑펑 우는데, 연기를 얼마나 잘했던지, 여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연기를 정말 잘했는지, 다윗 왕이 그걸 보고 감동을 한 거예요. 저 불쌍한 여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정의라고 한다면,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살인죄에 응당한 처벌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여러분, 죄를 저지르면 죄지은 것에 대해서 처벌을 하는 게 옳은가요? 옳지 않은가요? 옳아요! 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죄에 상응한 처벌을 받아야, 그래야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말할 수 있지, 처벌받지 않는 사회는 좋은 사회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정의에 따르면, 자기의 동생 자기의 형제를 죽인 그 사람도 사형 선고를 받아서 죽어야 되는데, 그러면 그 엄마는 어떻게 되냐면, 엄마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그 엄마는 살인죄를 저지른 그 아들도 죽게 생겼으니, 그 엄마는 어떡하냐? 그 엄마를 바라볼 때, 너무나도 불쌍하고, 자식을 향한 하소연을 하고 있는, 불쌍한 여인을 보게 되는 그 순간에, 다윗 왕이 왕으로서 판결을 내려주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비록 당신의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아들을 생각한다면, 아들의 그 죄를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데리고 와서 살인죄에 해당하는 그 심판을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그러나 누구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 어머니 때문에, 그 아들을 용서해 주고, 그 아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왕이 보호해 주겠다고 하는 특별한 명령을 내리게 되는 것이죠.

그 타이밍을 잃지 않고, 이 여인이 다윗왕 앞에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시여, 그런데 왜 압살롬은 그냥 그렇게 방치해 둡니까? 한 아들을 죽였다고 할지라도, 그 죽인 아들을 사형시키지 않고, 살려줄 수 있다고 한다면, 왜 압살롬은 죽였다고 해서,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도망갔는데, 그냥 왜 방치해 두십니까? 그 말 한마디에 다윗 왕은 완전히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 구약 시대 때 사람들이 참 지혜로웠다고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윗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찾아가서, 단도직입적으로, 왕이시여, 압살롬을 좀 데려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을 용서하고 다시 돌아오게 만들도록, 여러 가지 상황극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고, 그래서 결국은 압살롬에 대한 분노, 그리고 압살롬에 대한 응어리들을 다 씻겨버리고, 압살롬을 용서하도록 유도하는 그 방법, 지혜로운 방법을 썼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참 이때 이 사람들이 얼마나 참 지혜로웠던가 하는 것을 느껴볼 수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들은 옳은 말이라고 한다면,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든지 되어 있지 않던지, 그냥 말해버려서, 결국 상대방으로 하여금 마음에 상처를 받게 만들고, 그리고 너무나도 힘들어하게 만드는 일을 우리가 얼마나 쉽게 하는지 몰라요. 특히 교회 안에서도, 교회 주방에서 일을 하다가, 그냥 뭐가 좀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저 사람이 뭐 잘못하는 거 같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얘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얘기해서 상처를 주고, 그래서 시험 들게 만들고, 교회에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만들고, 같이 교회 버스를 타다가 마음에 안 들면 뭐라고 한마디 하고, 그렇게 옳은 말이라고 해서, 그냥 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지혜로운 요압처럼,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의 마음을 열리게 하고, 저 사람의 그 옹고집을 가지고 있는 그런 마음이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비춰보게 만들고, 옳은 말이라고 해서 그냥 내뱉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니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지, 세심하게 헤아려보면서, 그 말을 지혜롭게 말해서, 그 말이 잘 전달이 되고, 그래서 그 말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렇게 말해주는 지혜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필요를 느끼십니까?

내가 이 말을 하면 옳은 말이니까,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고,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할 수 있는 말이니까, 말을 할 수 있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그 모습을 보면서,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그냥 이야기를 해버리면 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돼요? 이 말을 했을 경우에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기보다는 부정적인 역효과가 날 거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고, 차라리 말을 하지 않거나, 지혜롭게 바꾸어서, 오히려 더 사랑을 베풀고 오히려 더 사랑의 손길을 내밈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정말 지혜롭게 말을 하고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들에게 필요한가? 그러한 지혜가 얼마나 필요한가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고, 우리가 기도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늘 엎드려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오늘 만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옳은 말이라고 해서, 그냥 막 말하지 않게 해 주시고, 내가 했던 이 말이 저 사람에게 상처가 되거나,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거나, 마음속에 불편한 마음을 느끼게,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아니하도록,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주셔서, 말 한마디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아서, 나로 인해서, 내가 한 말로 인해서,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아니하도록,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매일매일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해놓았던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말이라고 하는 것은 내 입에서 나가는 화살과 같다고 그랬어요. 화살과 같아서, 이 화살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시위를 당겨서 화살을 쏴버리면, 한 번 그 활시위를 떠난 그 화살은 반드시 날아가서, 어딘가 과녁을 맞혀 버리고, 심장을 꿰뚫어버리는 것처럼, 우리들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 내뱉으며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날아가서 상대방의 마음의 심령에 꽂혀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아주 많은 사람들을 상처를 입히는 그런 아주 위험한 거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요압과 같은 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예수비전녀에 속한 모든 성도님들은 모든 순간순간마다 요압과 같은 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언제 우리가 실수합니까?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됐을 때, 내가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 내가 옳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는 잘못할 가능성이 많아요. 내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는데, 거기에 대한 마땅한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우리들의 말이 잘못 나갈 가능성이 많아요. 내가 시어머니로서 대접을 받아야 될 것 같은데, 못 받는 것 같으면 말이 잘못 나갈 가능성이 많아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오늘 요압이 한 여인을 들어서, 다윗 스스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도록, 사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들의 거울인데, 그 사람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지혜로운 방법을 썼던 요압처럼, 우리들도 그런 지혜가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국 이 요압의 지혜에 감탄한 다윗은 압살롬에게 용서를 선포하고, 도망갔던 그 구슬 지방에서부터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왕이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물론 완벽한 복권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다윗 왕 앞으로는 갈 수가 없었고, 그냥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만 했었던 것이니까, 완벽한 결과는 아니지만, 완벽한 복권은 아니지만, 그래도 먼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고 왕자로서 그 권위를 회복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이 압살롬에게는 큰 은혜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압살롬에게 있어서 요압 장군은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정말 어려운 일을 해냈습니다. 사실 이 일이 그냥 쉬운 일인가요? 아주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인가요?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에요. 왕을 지금 기망하는 일이거든요. 한 여인을 사주해서 그래서 가짜 상황을 만들고, 그래서 그 모든 계획을 세워서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 이런 일을 지금 계획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이 성경 말씀에서 읽을 때는 해피 엔딩으로 끝났으니까, 그나마 다행인데 이 똑같은 일을 경험한 왕이 다윗 왕처럼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만, 어떤 반응을 보일 수도 있을까요? 진노하면서 “이런 나쁜 놈들” 하면서, 그 여인을 향해서 진노할 수도 있겠고, 어떻게 왕을 속일 수 있느냐고 하면서, 그 여인에게 진노할 수도 있었고, 그 일을 꾸민 요압 장군을 향해서, 정말 화를 내면서 그 요압 장군을 내칠 수 있는 그런 위험성도 있었던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누구의 일입니까? 요압의 일도 아니에요. 압살롬이 오든 말든, 요압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어요? 아무 관계없어요. 내 일도 아니에요. 그냥 압살롬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런 남이에요. 그런데 이 요압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압살롬을 위하여서, 나와는 상관이 없는 그 다윗 왕을 위해서 이런 일을 꾸미고, 목숨을 걸어가면서 위협을 무릅쓰고, 이 일을 꾸며서 결국 다윗 왕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데 성공을 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요압 장군과 같은 분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누굽니까? 어쩌면 우리는 압살롬과 마찬가지로 죄를 지은 사람들이고, 문제 투성이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고, 우리는 늘 생각하는 것이 약하고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한, 저 지옥불에나 합당한 인생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죄악 가운데 고통 가운데 살다가 멸망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냥 “망할 사람, 망하라지” 하고,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면서 너무나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안타까움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고,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품 안으로, 백투가 압살롬은 백두 예루살렘을 했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다시 백투, 백투 해븐 천국으로 다시 인도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인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자녀의 위치로 회복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우리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권리가 있어서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우리가 값없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늘 매 순간순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죠.

나중에 사무엘하서의 말씀을 보면, 이 압살롬이 돌아왔다가 나중에 무슨 일을 저지르죠? 반역을 저지릅니다. 다윗왕은 용서해 주고, 다윗왕은 그 압살롬을 포용해 주었는데, 압살롬은 그 다윗왕을 반역해서 그 왕자를 빼앗아버리려고 했던, 그런 파렴치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그 압살롬이죠. 그런데 우리들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불구하고, 값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제는 구원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감사하며 살아가야 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우리는 사랑을 베풀며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됩니까? 요압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마음의 태도는 긍휼과 배려의 마음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의 마음 가운데 사랑이 넘치고 긍휼이 넘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보다는, 우리의 마음이 종종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요. 마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그런 형처럼, 탕자가 돌아오는 그 모습을 보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감사해야 될 바로 그 형이 오히려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동생을 향해서 원망하고 손가락질했던 그 형처럼,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의 마음 가운데 모지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죠.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보면, 맨 마지막에 왔던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고, 자기 자신도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면서 분노해 버렸던, 하루 종일 일했던 그 품꾼처럼, 어쩌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런 성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압살롬과 같은 죄인이었으나, 회복받아서 하나님 앞에 돌아온 그런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내가 무엇인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은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한다면 긍휼과 자비와 배려의 마음으로 가득 찬 우리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긍휼의 모습을 보이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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