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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의 믿음 (히 11:31)

오늘은 라합이라고 하는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은 누구입니까?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 왕의 고조할머니입니다. 고조할머니면, 가까운 관계입니까? 아주 먼 관계입니까? 굉장히 가까운 관계예요. 지금 제 외할아버지께서 아직도 생존해 계시는데, 금년 102 세시거 든요. 그런데 우리 딸이 아기를 낳으면, 우리 외할아버지와 우리 딸의 아기는, 마치 라합과 다윗의 관계처럼 증조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멀지 않은 관계예요. 멀지 않은 관계. 오늘날에는 결혼을 늦게 하니까, 이 정도 먼 관계지만, 예전에는 결혼을 틴에이저(teenager) 때 15살이나 17살이나, 그때 결혼을 했다고 생각을 한다고 하면, 다윗 왕과 그리고 라합과의 관계는 굉장히 멀지 않은 그 관계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 왕의 고조할머니라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누구랑 연결이 되죠? 예수님이랑 연결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라합이 누구냐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 가운데, 족보 가운데 등장하는 여인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라합의 이름을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넣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라합이라고 하는 이 여인, 다윗의 증조 고조할머니이면서, 예수님의 선조의 이름 가운데 들어가 있는 이 라합이라고 하는 이 여인의 출신을 우리가 살펴본다고 하면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라합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라합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여리고 성의 주민이었던 이방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이방 사람 그러면, 그냥 이방 사람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인류란 다 똑같은 것이고, 사람은 인종과는 관계없이 다 존중받아야 될, 그러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이방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큰 이슈로 다가오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라합 시대의 이방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적인, 구약 시대 때의 이방 사람이라고 하는 그 신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이방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선택받은 민족이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들은 선택받지 못한 민족이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방 사람의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속으로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이방 민족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라합이라고 하는 이 여인은 선택받지 못한, 이스라엘의 회중 가운데 들어오지 못한 이방 사람이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사람이요. 버림받은 민족 가운데 있는 여인이었다고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인데요. 더 나아가서 이 여인의 직업이 무엇이었느냐?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 가운데 보면, 이 라합에 대해서 설명할 때, 이 라합은 기생이었다. 창기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이 라합을 설명하는 용어로 기생이라고 표현하고, 창기라고 표현했을 때, 그 표현이 우리가 정말 이 여인이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우리가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기생 그러면, 창기 그러면, 몸을 파는 여인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러나 구약 성경에 사용되는 이 단어가 꼭 그렇게만 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냥 이 여인을 그냥 주막 주인 정도로만 이해해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정말 이 여인의 실제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몸을 파는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아무튼 그런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뭔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위대한 왕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기생 출신이었다. 창기 출신이었다. 어쩌면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일 겁니다. 족보 가운데서 지워버렸으면 좋겠고,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그 이름이 라합이라고 하는 이름일 겁니다. 북한식으로 말하자면, 백두혈통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조상 가운데, 이런 여인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일 수 있겠고, 아이러니(irony)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여리고 성의 이방 여인이었던 이 라합이, 그리고 아마도 기생이라고 하는 그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그 라합이 어떻게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그리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가운데 들어가는 그런 놀라운 영광을 누릴 수가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 이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 히브리서 11장에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열거하고 있는 그 가운데, 정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사람으로 이 라합이라고 하는 이름을 기록하고, 라합의 믿음에 대해서 하나의 샘플(sample)로 예시로 제안하고 있는가? 어떻게 이런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주목해보고자 하는 그런 질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이 라합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된 것이 이렇게 영광스러운 위치 가운데 믿음으로 발행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 모습을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가 먼저 주목해 봐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라합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을 소개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선지자가 여리고성에 들어가서, 여러분 망하면 안 되니까 하나님을 믿으세요. 회개하세요. 전도자가 그 여리고성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라고 그렇게 전도해서 이 라합이 그 전도하는 말을 듣고 주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라합은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그렇게 전도도 받지 않고, 누군가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혹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하는 그렇게 전도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라합이라고 하는 사람은 전도를 받지 않고서도, 구원을 얻을 만한 그런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질문입니다. 라합이 들었던 것은 들려오는 소문이었습니다. 여리고성 안에 바닥에 퍼져 있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라합이 정탄꾼들을 만나서 나누었던 대화가 여 호수 아서 2장 9절부터 11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거기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이 들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는데, 그 종살이하다가 그 애굽을 물리치고 기적적으로 애굽에서 해방되어서 탈출해서 나왔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들은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주셔서, 가나안 땅으로 몰고 오고 있는데, 요단강 동쪽에서 그쪽에 있는 아모리 왕들을 무찌른 그 이야기를 들은 겁니다. 그 이야기는 누가 들었는가? 모든 사람들이 다 들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었던 라합의 마음 가운데,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셔서, 애굽을 물리치시고 아무리 민족을 물리치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라합의 마음속에 내렸던 결론이 무엇이냐면, 이 세상에 참된 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마음속에서 결론을 내린 겁니다. 그리고 그 결론 가운데 생각하기를, 우리 여리고 성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겠구나.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해서 들었을 때에, 소문을 듣게 되었을 때, “이 땅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겠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고, 그리고 그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결국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여리고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항복하고 정탐꾼들에게 도움을 주고, 구원을 요청하는 것 밖에는 내가 살 길이 없다고 하는 데까지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믿음이 생기는 것은 복음을 전해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아니 우리가 구체적으로 전도를 하고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하는 걸 통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한 것이 없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경우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경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변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봤다고 한다면, 나도 하나님을 믿을 텐데. 나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 누구도 나에게 하나님 믿으라고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나는 몰랐어요. 몰라서 내가 하나님을 안 믿은 거지, 알았더라면 믿었을 텐데. 나한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서, 나는 하나님을 못 믿은 건데, “어떻게 나를 심판할 수 있습니까?”라고 그렇게 항변할 수 있느냐면, 그렇게 항변할 수가 없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초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초대가 전방위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도자가 직접 가서 예수님 믿으세요. 전도자가 직접 가서 “하나님을 믿으셔야 됩니다”라고 전도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의 양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한 줄기 빛을 비추어 주시고,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라”라고 하는 그 양심의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초대해 주고 계십니까? 왜냐하면 우리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님과 같다는 거예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는 그 얼굴을 닮아버리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다”라고 하는 이야기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다는 얘기는 우리가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우리들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결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강아지 태어난 거 봤습니까? 여러분 강아지 태어난 거 보셨어요? 강아지 태어난 거 봤는데요. 강아지가 태어나면, 그 태어난 강아지들이 어떻게 하죠? 태어나고 나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합니까? 어디를 향해 찾아갑니까? 엄마의 젖을 물으러 가요. 그 강아지의 주인이 “얘야, 엄마 젖이 여기 있으니까, 엄마 젖 물어야 네가 산다.” 말해서 가나요? 아니요. 강아지가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눈도 떠지지 않는 그 상황 가운데서, 엄마 젖 냄새를 맡고 엄마의 젖을 물러가서, 엄마의 젖을 물어요. 그리고 그 물면 젖이 나오는 줄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알죠? 그냥 쭉쭉쭉쭉 빠는 거예요. 그렇게 태어나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그런 자동적으로 찾도록 만들어져 있는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정당한 항변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에 초대를 하신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양심이라고 하는 것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거짓말하는 것은 나쁜 것이며, 그리고 우리가 선을 행하면 마음이 기쁘고, 악을 행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그런 그런 양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심어주셔서, 하나님의 법에 대한 개념을 이미 하나님께서는 심어주셨기 때문에, 회개를 촉구하고 계시는 그 양심의 소리들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몰랐어요. 난 그런 법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라고 항변할 수가 없는 것이죠.

더 나가서 온 세상은 하나님의 지문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 만드셨구나”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도록,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셔서, 그 이 세상의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이미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이죠. 매일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계절이 바뀌어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생명이 탄생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인체의 신비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부르심, 이것을 일반적인 초대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요. 전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주님을 발견하도록 그렇게 초대해 주시는 것을 일반적인 부르심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이러한 일반적인 부르심에 대해서 사람은 세 가지로 반응을 합니다.

첫 번째 반응은 스스로를 세뇌시키면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양심은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찾게끔 되어 있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자꾸만 누르면서, “하나님은 계시지 않아. 하나님이 없어.” 그렇게 자꾸만 귀를 막아버리고,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불편해지는 것이죠. 죄를 지을 때마다 마음이 두근두근거리고, 여러 가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까 봐 걱정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우리 자신을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그런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반응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없다고 부인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즘 우리가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이러스 이것은 가짜야.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게 무슨 바이러스, 이거 아픈 것 별거 아니야라고 큰소리 뻥뻥 치던 사람들이 어떻게 돼요? 자기가 바이러스 없다고 이런 것은 엉터리라고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바이러스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노출되면 걸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이 없어져 버리는 게 아니에요.

제일 어리석은 반응이라고, 또 하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그런 부르심에 대한 또 하나의 반응이 무엇이냐면, 잘못된 반응인데,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닮은 하나님을 모방한 가짜 신들을 만들어 놓고, 그 신 앞에 나아가서, 자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대리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두 번째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두렵고 떨리기 때문에,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 놓는 겁니다. 그저 나에게 복을 주시기만 하는 그런 용도 활용 가치가 있는 가짜 신 우상을 만들어 놓고, 때로는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겠고, 명예가 될 수도 있겠고, 그 자존심이 될 수가 있겠고, 때로는 그것이 우리 자식이 될 수도 있겠고, 우리에게 좋은 유익한 그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가 있겠는데 그것들을 만들어 놓고, 그걸 통해서 대리 만족,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 대한 대리 만족을 하려고 하는 그런 반응을 보일 때가 있는데, 역시 이것도 잘못된 어리석은 반응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짜 하나님 대리 만족을 주는 그런 우상들은 우리들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배신해 버리고,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제일 좋은 반응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초대가 있다고 한다면, 그 초대 앞으로 나아가 반응하는 것이죠. 라합이 그렇게 했어요. 하나님의 부르심 누가 와서 이야기한 건 아니지만, 자기가 듣는 그 소문을 듣고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그 부르심을 느꼈고, 그 부르심에 반응하며 나아가다가 살아가는 것이고,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가운데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우리에게 무서우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고 행복을 주시는 그 주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라고 했을 때, 우리가 문을 연다고 한다면, 그것이 큰 축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라합의 반응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한다면, 매국노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정탐꾼들에게 첩보를 알려주었기 때문에, 이것은 반민족적인 행위라고 생각하고, 이것 때문에 마음에 걸리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반민족주의적인 행동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반응해야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환경 탓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 라합보다 더 어려운 환경이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께 나오기가 정말 어려운 환경이죠. 이방 족속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생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라합은 약간의 인포메이션(information)만 들었지만,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아니 여리고성에 있는 그 모두가 다 똑같이 들었던, 그 조그마한 인포메이션을 듣고 랍은 거기서 결단한 겁니다. 마음을 바르게 생각한 겁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구나. 참되신 하나님이구나. 결국 내가 살 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에게 귀의하는 것이 그것이 내가 살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고, 그 믿음이 있을 때, 결국 정탐꾼을 만났을 때, 그들을 숨겨줄 수 있는 것이었고, 그 정탐꾼을 숨겨준 것은 그냥 숨겨준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부터 나온 행동이었다고, 히브리서 11장 31절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인데, 그 결과 모두가 멸망할 때 함께 멸망하지 않고 라합과 그 가족들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행동으로 옮겨져야 믿음인 것이죠.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믿음이 아니라, 정탐군이 찾아왔는데도 그냥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25절의 말씀에서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며, 다른 길로 나아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마음속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믿음에서부터 정탐꾼들을 접대하는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멸망을 당할 때 그는 구원을 받고, 다윗과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은 라합만 들었던 것이 아니라, 여리고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었다는 것이고, 여리고 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그 이야기를 들었고 똑같이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똑같은 내용을 들어놓고도 구원을 얻는 믿음으로 반응을 하지 않았어요. 그게 아쉬운 거죠. 똑같은 자연환경을 보면서 마음이 열리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의 일반적인 초대가 있는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거죠. 종종 교회에 아무도 전도하지 않아도 제 발로 걸어오는 사람이 있어요. 왜 하나님의 그 일반적인 초대를 보면서, “아, 그냥 있으면 안 되겠구나.” 주님 앞에 나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면, 구원을 얻는 것인데,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여리고성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아서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에 “만일”이라고 하는 가정을 할 수가 없다고 하죠. “만일 이랬다면 어땠을까? 이랬다면 어땠을까?”라고 하는 그런 가정은 없다지만, 그래도 한번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만일 여리고 성에 있는 그 사람들이 라합처럼, 라합과 같은 반응을 여리고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라합처럼 반응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리고 성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민족을 다 진멸하라고 말씀해 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인데, 만일 여리고 성에 있는 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접하고 라합처럼 반응을 했다고 한다면, 여리고 성을 하나님께서 진멸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래도 진멸했을까요? 역사는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받아주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요?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뜻을 돌이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예를 우리가 어디에서 봅니까? 니느웨 백성들에게서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 니느웨 백성들을 40일 만에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이 회개하며 나올 때 뜻을 돌이켜 그냥 살려주신 그 하나님일뿐만 아니라, 어디서 그 예를 또 볼 수가 있습니까? 기브온 사람들에게서 볼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기브온 족속이 있었는데요. 이 기브온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가나안 땅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자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장하고 와서 조약을 맺었어요. 우리가 서로 조약을 맺자. 우리가 서로 침범하지 말자. 함께 살자. 멀리서 찾아온 것처럼 해서, 그 이스라엘 민족과 조약을 맺어서 결국 그 기브온 민족은 멸망당하지 않고, 살게 되었던 그 실제적인 예가 있었다고 한 것을 알 수만 있다고 한다면, 여리고도 만일 회개한다면 전체가 돌아온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 모든 사람들이 라합과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놓고도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고, 귀를 닫아버린 것이 아쉬운 것이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신데, 그 똑같은 하나님이 라합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이요. 라합이 아닌 여리고 성 모든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인데, 어떤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시기를 원하십니까? 마음의 문을 열고 회개하고 나오면, 구원의 하나님인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거부해버리면, 그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옛날 라합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던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적극적으로 우리들에게 초대의 말씀을 해 주실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우리들의 양심을 통해서 세밀하게 들려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를 향해서 이런저런 모양으로 우리들에게 불러주실 때, 그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양심의 소리를 자꾸만 눌러버리면서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하나님이 계실 리가 없어.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것이 아니야.” 자꾸만 외면하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면서, 하나님에게 이로서 멀리 떠나 있을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한다면 망하게 될 것인데,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습니까? 성경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고, 또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자연 만물을 보면서, 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세심한 음성이 들릴 때, 그것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해야 할 것인데,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회개하는 모든 자들에게 부어줄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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