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요압의 항의 (삼하 19:1-8)

할렐루야.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서 일어났던 그 전쟁, 그 싸움은 승자가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압살롬을 죽이고, 그리고 이제는 모든 반란군들을 제압하고, 쿠데타를 진압하게 되었지만, 그렇게 해서 모든 위험 요소들을 다 제거하고, 반란군을 없앴다고 하는 그 사실이 모두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이겼다고 하는 그 소식을 듣고, 뿐만 아니라 그 전쟁 가운데서 압살롬이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기뻐할 수 있었는가? 기뻐할 수가 없었죠. 왜냐하면 그 전쟁 가운데서 죽은 자가 누구냐면, 바로 자신의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싸워야 했지만, 전쟁을 해야 했지만, 그 전쟁을 통해서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 슬픔, 그 고통,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가 읽으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사실은 이 모든 전쟁이 싸움이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는 싸움이 아니라, 사실은 모두가 다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적을 만들고, 그 적과 싸우고, 그리고 그 적을 물리쳐서 이겨서 승리하게 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적과 싸워서 이기면, 승리의 기쁨이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사실은 그게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전쟁에서 이긴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패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다윗과 압살롬 사이의 전쟁의 이야기를 통해서 얻어야 할 교훈이라고 믿습니다.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 가장 좋은 것은 적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적을 만들지 않고, 친구를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 싸우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성도들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서로 싸우게 되면, 피차 멸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싸워서 어느 한 편이 이기고, 어느 한 편은 지게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뿐이오. 사실은 이겨도 이겨도 지는 것이다. 우리말에 져야 이긴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전쟁을 통해서 싸움을 통해서 이긴다고 해서, 그것이 이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진 것이고, 사탄의 전략에 말려서, 사실은 우리가 영적으로 져버린 그런 결과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이 다윗과 압살롬의 전쟁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 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들 사이에 서로 싸우고, 남편과 아내가 싸워서, 남편이 이기면 그게 이긴 거겠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싸워서 아내가 이기면 그게 이긴 거겠습니까? 두 사람이 서로 이혼 법정에 가서, 서로 자신의 주장을 하고, 그래서 재산을 더 많이 분할받고, 그리고 자기가 친권을 가져간다 한들, 그게 이긴 재판이 아닌 것이죠. 우리 가족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요. 사실은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원리가 작동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인가? 성도들은 주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우리는 한 영적인 가족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누구라고요? 영적인 가족이오. 우리 주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친형제 자매와 같은 그런 관계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옆사람을 보고 한번 얘기해 볼까요? 아이고 오빠셨네요. 우리 동생이었네요. 누님이셨네요. 우리 성도들도 주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되는가?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고 힘들 때 손 내밀어주고, 그리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눈물로 같이 기도해주는 그런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교회 내에서, 사탄의 속삭임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적대관계를 만들어 버리고, 그리고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인정받기를 원하고, 그리고 저 사람의 의견과 내 의견이 서로 싸워서, 그래서 내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하고, 내 말이 더 잘 들리게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면서, 교회 내에서 보이지 않는 그런 경쟁과 은근한 다툼이 있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요. 그러한 것을 통해서 얻게 되는 그 결과가 무엇이냐면, 이 모든 전쟁은 모든 전쟁은 이겨도 지는 것이 전쟁이다. 이겨보았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전쟁이고, 사실은 이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은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우리가 영적으로 패배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평화를 추구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평화를 추구하고 화평을 추구하는 일들을 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가 서로 경쟁을 하고 싸우게 된다고 하면, 결국 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 압살롬과 싸워서, 결국은 압살롬을 죽였지만 죽였는데, 누구를 죽인 거예요? 자기 자식을 죽인 거예요. 내 사랑할, 사랑의 대상을 죽인 것이 결국 이겨도 슬플 수밖에 없는 전쟁의 결과 앞에서 다윗은 울부짖는 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울부짖게 되는데, 안타까운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아니하도록, 우리는 싸우기보다는 평화를 추구하고, 서로 돌보고 아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 사랑의 가정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싸워야만 하는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싸우기를 싫어하지만, 그러나 싸움을 걸어올 때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싸움을 걸어올 때는, 지금 그 경우가 바로 다윗의 경우입니다. 지금 다윗은 압살롬을 향해서 은총을 베풀었고, 그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아들로서 그 자리로 복권시켜주기도 하고,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지만, 그러나 압살롬이 어느 날 계획을 세워가지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싸우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안 싸워야 되는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져보게 되는데요. 다윗의 경우에 보면 다윗은 싸우려고 먼저 달려들거나 그리고 전쟁을 추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는, 피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수적이고 불가피한 그런 조치들을 어쩔 수 없이 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잘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연구하면서 각각의 기독교 종파들마다 입장들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일부 기독교 종파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저항하지 않고, 폭력을 쓰지 않고, 그냥 무조건 당하기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원칙이고, 예수님의 방법이기 때문에, 누군가 우리를 죽이러 온다고 할지라도 저항하지 않아야 되고, 누군가 우리를 향해서 목숨을 앗아가려고 하고, 전쟁을 하려고 하는 그 순간에 우리가 같이 맞서서 싸울 것이 아니라, 그냥 무저항으로 있으면서, 무조건 당해야만 하는 것이 가장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주장을 하죠? 역사적으로 보면 재세례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 가운데 재세례파(anabaptists)라고 하는 그런 집단들이 있었는데요. 그 사람들은 정말 순수한 신앙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리고 산상수훈대로 우리가 살아야 된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 너희들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 갖다 대는 것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비폭력적인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에, 그래서 만일 적군이 쳐들어와서 우리들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총을 겨눈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에 저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군사적인 대응을 하는 것도 역시 잘못된 것이고, 무조건 죽이면 죽고, 때리면 맞고, 그냥 무조건 피해만 당하는 피해를 당하는 것이 그게 크리스천의 입장이지, 그러한 것에 저항을 하거나 대응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주장을 재세례파 쪽에서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노나이트라고 하는 그런 교도들도 그런 식의 주장들을 하고, 퀘이커 교도들도 그런 주장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정신에 의하면 절대로 우리가 폭력을 써서도 안 되고, 방어적인 폭력도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안식교도들도 그런 식으로 주장을 합니다. 안식교도들은 무엇으로 유명하죠? 집총 거부로 유명합니다. 신앙적인 이유로 나는 군대에 갈 수가 없다. 군대 가서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는 연습을 하고 훈련을 하고 그렇게 군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런 군대에 갈 수가 없다고 해서, 안식교도들은 집총 거부를 하게 된 것이고, 국방의 의무를 회피해서, 결국 재판을 받아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을 살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왔는데, 최근에는 대법원에서 양심의 자유에 근거한 집총 거부로 신앙의 자유에 근거한 집총 거부를 인정해서, 이제는 대체 복무를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긴 했는데, 아무튼 기독교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성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수많은 종파들 가운데서, 어떤 일부 종파들의 주장이 무엇이냐면, 우리는 평화를 추구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 내 목에 칼을 대기도 하고 권총을 들이대면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그 위협 앞에서도, 결코 대응해서는 안 되고, 폭력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그런 사람들의 주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장로 교회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칼빈 선생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그렇게 집중 그렇게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고, 우리가 폭력을 사용하거나 우리가 악한 일을 하기 위해서 또 전쟁을 하고 싸우는 것을 시도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 경우에서는 방어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정당방위와 같은 그런 차원에서, 그러한 나쁜 짓을 막고 그래서 가족을 보호하고 내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그것은 허용되는 일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괜찮은 일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강도가 들어와서 우리 가족을 죽이려고 하고, 혹은 성폭력을 저지르게 된다고 한다면,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나는 그냥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겠다고 그냥 지켜보고 당하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는 그런 강도의 나쁜 짓을 막기 위해서라도 위해서라면, 할 수 없이 우리도 어떤 그에 상응하는 어떠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 그런 해석이 칼빈이나 루터나 이런 종교 개혁자들의 그런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의 경우가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다윗은 가능하면 적으로 삼지 않고 친구로 사귀고 그리고 악을 행하기보다는 평화로운 방법을 사용하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지만, 그러나 이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자신의 목숨을 해하려고 하고, 또한 백성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될 때 할 수 없이 다윗은 그 순간에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방어적인 전쟁을 하는 것, 싸움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런데 싸움을 걸어오고 그래서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백성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그 순간이 되면, 그 순간에도 그냥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는 할 수 없이 싸워야만 했던 것이고, 그래서 공격해서 그 압살롬을 물리치고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는 했지만, 그러나 그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내가 승리했으니까 기분이 좋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 승리를 바라보면서 슬퍼하고, 울고 고통스러워했던 모습이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서 볼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요압 장군이 와서 다윗에게 항의하였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너무나도 기뻐하고 이제 승전고를 올리며 이제는 모든 고통이 다 끝났다고 좋아하려고 하는 그 순간에, 다윗이 슬퍼하며 애통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다윗의 부하들 백성들이 적지 않게 당황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변해버렸고, 그래서 백성들은 부끄러워서 도망하는 것처럼, 도망, 가만히 자기 집에 자기 부 집으로 돌아가고 자기들의 마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오늘 3절 말씀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요압 장군이 다윗의 왕에게 찾아와서 말을 합니다. “왕이시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왕이 지금 전쟁에서 이겼는데 전쟁에서 이겼는데, 그 전쟁에서 이긴 공을 세운 부하들에 대해서 전혀 모른 척하시고, 오히려 죽은 아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렇게 슬퍼하고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되는 노릇입니까? 만일 정말 압살롬이 이기고, 우리가 죽었으면 그때는 왕이 좋아했을 것 아닙니까?” 하면서, 이 요압 장군이 다윗왕에게 항의하고, 그리고 왕이 그런 식으로 처신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간곡하게 충언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그 말을 들은 다윗은 그때 정신을 차리고, 슬픈 일이지만 그 슬픔을 억제하고 이제 백성들을 돌아보는 왕의 자리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다윗의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정말 슬프고 고통스러운데 아들을 잃었다고 하는 그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왕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그 슬픔을 억제하고 다시 백성들을 돌보아야 하는 그리고 백성들을 잘했다고 칭찬하고 격려해야 되는 그런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왕이 가지는 그런 여러 가지 슬픈 모습인 것이죠. 하지만 다윗은 그 순간에 요압의 이야기를 듣고, 아 내가 왕이기 때문에 내 슬픔에 따라서 움직여서는 되는 것이 아니라, 슬프다고 할지라도 백성들을 위해서 다시 왕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 슬픈 건 슬픈 것이지만 내 슬픔 때문에 왕의 직분을 수행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그 슬픔을 억누르고 다시 왕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왕의 자리가 무엇이냐면 백성들을 돌보는 자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고 자신이 누려야 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자리가 바로 왕의 자리인 것이죠. 다윗이 지금까지 살아온 그 삶을 우리가 쭉 살펴본다고 한다면, 다윗은 왕이 되기 전부터 이미 왕 같이 살았고 왕의 일을 수행했던 모습을 우리가 성경에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이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을 때, 그 그일라 지방이 블레셋 군대에 의해서 착취당하고 약탈당하고 노략질당했다고 하는 소식을 다윗이 듣게 됐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블레셋 민족에 의해서 약탈당했다고 하는 그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에, 다윗은 어떻게 반응했냐면, “아, 거참 안 됐구나. 하필이면 왜 그런 노략질을 당해서 1년 농사 다 망쳤구나. 아이고 참 안 됐네.” 하고 끝내버린 것이 아니라,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어요.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갔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들려주시는 그 음성이 무엇이냐면, “네가 가서 그일라 백성들을 구원하라.”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가 이 다윗의 마음 가운데 확신으로 다가서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 다윗이 어떻게 했냐면, 지금 도망 다니는 신세에 있는 그 다윗이, 발각이 되면 사울 왕에게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한 상황 가운데 있던 그 다윗이 자기 부하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민족, 우리 동포, 그일라 백성들이 약탈을 당했으니, 우리가 가서 저 그일라 백성들을 구원하자.”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의 부하들이 무슨 말을 합니까? “다윗이여, 다윗 장군이시여, 지금 우리가 그 일라 백성들을 가서 구원한다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도망자 신세입니다. 그 블레셋의 군대와 더불어 싸우는 것도 힘든 일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등장했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되면 사울 왕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우리를 잡으려고 하는데, 그 위험한 짓을 왜 합니까? 우리는 지금 도망 다녀야 되는 사람들인데, 도망 다니다 말고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우리, 내 코가 석자입니다. 우리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데, 어떻게 그일라 백성을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다윗의 신화 그 부하들이 다 반대를 하는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다윗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이니까, 도와주지 말아야 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다윗은 그 순간에 그일라 백성들에 대한 그런 사랑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일 년 농사 다 망쳐버린 고통스러워 울고 있는 그 그일라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그냥 놔둘 수가 없어서, “내가 가서 저 사람들을 도와줘야겠다”라고 하는 그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까, “가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왕의 마음이죠. 왕의 마음은 무엇인가? 지금은 도망자의 신세였지만, 그러나 다윗은 이미 왕 같은 일들을 하게 되었는데, 그 왕의 마음이 무엇이냐 하면, 나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의 안전을 무릅쓰고라도 백성들을 위해서 도와줘야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으로 달려갔던 것이 바로 다윗의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부터 자신들의 자신의 동포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한다면, 나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가서, 나의 안전을 포기하고라도 가서, 도와주고 그들에게 봉사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투철한 마음으로 그일라 백성들을 구했던, 바로 그 다윗인데 이번에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제는 무엇을 포기합니까? 개인의 감정을, 어쩌면 이 순간은 아무것도 하기 싫을 거예요. 슬픔에 가득 잠겨서 아들을 잃었다고 하는 그 슬픔 때문에, 정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요압이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시여, 지금 이러시면 안 됩니다. 민족들을 돌아보셔야 됩니다. 백성들을 돌아보셔야 됩니다.” 그 순간에 다윗은 자신의 슬픔을 내려놓고, 백성들을 위하는 왕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서, 왕의 역할을 수행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왕의 모습인 것이죠. 오늘날 우리들은 참된 왕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 세상에는 마치 자기들이 왕인 것처럼 우리들에게 다가와, 우리들로부터 왕의 모습을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어떤 정치인들은 우리들을 위해서 일해주겠다고 말하면서 우리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이익을 주겠다고 그렇게 표현하면서, 우리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고, 우리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온갖 힘을 쓰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가 깨닫게 된 결론이 뭡니까? 알고 보니까? 국민을 위한다고 했던 그 정치인들이 사실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다고 하는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데, 사실은 자기 뱃속만 채웠던 아주 얄팍한 인간들이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은, 자신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 일라 백성들을 도왔던 그 다윗이, 지금은 이제는 왕이 되어서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만, 슬픔이라고 하는 그 큰 짐, 어찌 할 수 없는 그것마저도 다 내려놓고 왕을 다스리려고 한 왕으로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 모습을 보여주면서 참된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참된 왕 참된 구세주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게 누구시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인지상정이겠지만,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울부짖는 것이죠. “아버지여, 만일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피 땀 흘리며 기도하고 간청하였지만,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시고, 이 십자가는 내가 져야 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발견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가신 그 놀라운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이 받은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이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늘 감사하며, 주님의 은혜에 찬양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왕 같은 제사장처럼,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고 하나님의 사랑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복된 통로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