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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 (삼하 17:15-29)

오늘 설교의 제목을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라고 제목을 잡았는데요.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라고 하는 세 사람이 다윗 일행을 맞이하고, 가져온 여러 물품들 식품들 중에서 제목을 잡았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가져온 모든 것들을 다 말해야 되겠죠.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포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왔는데, 그거 전부를 다 제목으로 잡기는 어려워서, 그냥 뒤에 있는 네 개만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우리나라 한국말 성경이 번역이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왜정시대 때, 그때 번역이 된 것인데요. 그때 번역을 하면서 사무엘하 17장 29절을 번역할 때, 버터라고 하는 단어, 그리고 치즈라고 하는 단어를 번역했을 때, 과연 100년 전 사람들이 그 말을 과연 이해했을까? 흥미로운 질문이 생기곤 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아히도벨이라고 하는 사람은 다윗이 약해져 있을 때, 지금 당장 추격을 해서, 지금 공격을 해서 지금 제압해 버려야 된다고 제안을 했었고, 후새는 그러지 마시고,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 완전히 군대를 잘 정비해서, 그래서 친이 압살롬이 진두지휘를 하면서, 다윗을 무찔러야 한다고, 그렇게 상반된 작전을 내놓았을 때에,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는 후새의 전략을 선택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에 대해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이 상반된 전략 가운데서 왜 압살롬은 잘못된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따지고 보면 아히도벨의 전략이 훨씬 더 뛰어난 전략인 겁니다. 지금 다윗이 지쳐 있을 때, 경황이 없을 때, 지금 쫓아가서 제압해 버리는 것이 그게 더 뛰어난 전략인데, 왜 압살롬은 그 전략을 선택하지 않고, 첩자인, 다윗의 첩자인 후새가 내놓은 그 전략, 이 전략은 압살롬을 위한 전략이 아니라, 다윗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그런 전략인데, 그 전략을 왜 압살롬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보면서, 그것은 우리 인생들이 종종 잘못된 정책을 선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죄성에서부터,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죄성의 발로일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선택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하나님께서 압살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그리고 그러한 전략의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호하시고, 그리고 다윗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이러한 계획들이 하나씩 둘씩 진행이 되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뒤의 이야기입니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을 전략을 선택하지 않고, 후새의 전략을 선택하게 되었을 때, 이제 시간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아직 여유가 있을 때, 최대한 빨리 멀리 도망가서, 그 뒤에 전열을 가다듬고, 그 뒤에 좀 정신을 차리고,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이 압살롬 진영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다윗에게 알려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니까, 이 후새가 다윗의 첩자로서, 압살롬의 궁정에 와 있는 이 후새는 빨리 메시지를 보내서, 다윗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메시지를 보냅니다. 먼저 사독과 아비아달이라고 하는 두 제사장에게 그 말을 전달했는데, 그 제사장들이 직접 가서 전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제사장들의 움직임이 발각될 수도 있고, 제사장의 움직임이라고 하는 것들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자신들이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여종에게 시켜서, 에느로겔이라고 하는 지역에 숨어 있던,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그 소식을 전하게 했고,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다시 또 다윗에게 달려가서, 그래서 다윗에게 이 압살롬 진영에서 어떤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는 그 과정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 가운데서 어떤 한 소년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다윗의 편에서 다윗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는 사실을 눈치채고, 이 두 사람을 신고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도망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 두 사람은 바후림에 있는 어떤 사람의 집 속에, 우물 속에 들어가 버렸고, 그리고 그 집의 여주인이, 여자 주인이 그 우물을 덮고, 짚으로 덮고 숨겨주어서, 압살롬의 군인들이 쫓아왔을 때, 그 사람들이 이미 요단강을 건너갔으니, 빨리 쫓아가라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결국 안전하게 보호하게 되었고, 결국 그 두 사람은 다윗에게 달려가서, 후새의 전략이 어떠한 것인가 압살롬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가에 대해서 다윗에게 전달해 주었고, 그래서 결국 다윗은 무사하게 도망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형성이 됐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마치 하나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주 긴장감 넘치는 그런 드라마, 혹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손에 땀이 쥐는 그런 긴박한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아마 영화를 만든다고 한다면, 이 이야기로 영화를 만든다고 한다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걸어가는 그 길에, 소년이 바라보는 그 장면이 오버랩돼서 아마 보여줄 것이고, 그리고 빨리 도망가서 우물물에 숨는 그 장면, 그리고 군인들이 쫓아와서 수색하고 있는데, 거짓말해서 무사히 그 말에 속지 않고, 그 순간에 이 군인들이 그 우물을 한번 싹 봤는데, 그 보는 순간에 이 여인이 마음이 쫄려가지고, 저 우물을 들춰보면 어떡하나? 이렇게 쫄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군인들이 그 우물 옆을 가서 짚더니만, 그 우물의 짚을 확 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쓱 지나가면서 안도의 숨을 내시는, 어쩌면 긴박한 드라마의 한 장면을 오늘 보는 것 같습니다.

이 과정 가운데서 실패가 발생하려면, 여러 군데에서 실패가 발생할 수 있었을 겁니다. 발각되려고 한다면, 여러 단계에서 발각될 수가 있었을 겁니다. 후새라고 하는 사람이 압살롬의 충신이 아니라 다윗의 첩자라고 하는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고,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압살롬의 편이 아니라 다윗의 편이라고 하는 것이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고,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또 압살롬의 군사들에 의해서 또 밝혀질 수도 있는 것이고,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긴박하게 상황이 돌아가면서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잡히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연결이 잘 되어서, 결국 다윗은 무사하게 압살롬으로부터 피하고 전열을 가다듬는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긴박한 이 상황이 한 치의 오차가 딱 생겨버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일들이 착착 맞아떨어지면서, 어떻게 다윗이 무사히 도망갈 수 있게 되었겠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그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고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셔서, 범죄한 다윗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다윗을 완전히 내친 것이 아니라, 다윗이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다윗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이제는 포기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그 순간순간마다,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키고, 보호해 주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쩌면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던 이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심판해 버리시고, 이제는 너 같은 사람 필요 없다 하시며, 새로운 사람을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을 향한 끈질긴 사랑과 은혜를 계속해서 보여주시는 그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27절에서부터 보면 다윗이 마하나임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다윗과 그 일행들이 마하나임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게 되자, 세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 세 사람은 누구냐면 암몬 족속,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이라고 하는 소비라고 하는 사람과,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라고 하는 사람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이라고 하는 바르실래라고 하는 이 세 사람이 다윗 왕 앞에 나왔는데,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가득 가지고 갔어요. 다윗의 일행들이 먹을 수 있는 수많은 음식들과, 필수 용품들을 잔뜩 실어가지고, 다윗 왕 앞으로 나오게 된 것이죠.

그들이 가져온 것이 무엇이냐?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와 치킨, 치킨은 아니고, 아무튼 그 당시 얻을 수 있는 그 당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구해가지고, 지금 빈털터리로 도망하고 있는 다윗의 일행들에게 찾아와서 공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황급하게 왕궁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윗과 그 일행들은 제대로 갖춘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겁니다. 아마 무기도 변변치 않았을 것이고, 그리고 먹을 양식도 제대로 가져오지 못한 채, 그저 걸음 하나 살려라 하면서, 빈손으로 도망쳐야만 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황급하게 궁정을 빠져나와야 했던 그런 다윗의 일행들에게, 이 세 사람이 가져온 수많은 물품들과 먹을 것들을 보면서, 다윗은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아, 죽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그게 아니구나. 도대체 이 세 사람이 누구길래, 다윗에게 이런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일까요? 다윗과 이 세 사람 사이의 관계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누구냐면, 암몬 사람입니다. 암몬 사람 하면 이스라엘 민족과 어떤 관계입니까? 암몬 족속 하면, 어쩌면 적대적인 관계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사울 왕 시절에, 암몬 족속은 야베스를 공격했다가, 사울 왕이 그 암몬 족속을 멸망시킨 그런 일이 있습니다. 전쟁을 해서, 그러니까 암몬과 이스라엘이 전투를 한 그런 경험이 있는 것이죠. 사울이 왕이 된 다음에 주변 나라들을 정복했는데, 그 정복한 나라 중에 하나가 바로 암몬이라고 하는 족속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그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했는데, 그 정복한 나라 중에 하나가 어떤 나라냐면, 암몬이라고 하는 족속을 다윗왕은 정복해 왔던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 왕은 암몬 왕 나하스가 죽고, 나하스의 아들 하눈이 왕이 되었을 때에, 사신들을 보낸 이야기를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왜 다윗왕은 사신을 보냈습니까? 그것은 그때 다윗이 했던 말이 무엇이냐면, 그 나하스라고 하는 암몬족 속의 왕이 내게 선대하였으므로, 내게 좋은 일을 하였으므로, 그 나하스가 죽는 그 소식을 들었게 되었을 때, 사절단을 보내서, 조문단을 보내어서, 위로하고 그렇게 교제하려고 하는 그런 제스처를 쓴 이유가 무엇이냐면, 어쩌면 우리가 적대관계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윗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 정복 관계가 꼭 결과적으로 사이가 나쁜 관계가 되는 정복 관계만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을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이 주변 민족들을 정복했는데, 그래서 정복한 다음에 항복하면, 그러면 서로 계약을 맺습니다. 조약을 맺습니다. 나라 대 나라로, 민족 대 민족으로 조약을 맺는데, 그 조약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이스라엘 민족이 당신 내 민족을 보호해 줄 테니까, 그러면 그 민족은 우리나라에게 조공을 얼마씩 바쳐라라고 하는 그런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아마도 다윗은 그 주변 민족들을 정복하면서, 그들을 속국으로 만들었지만, 그 속국으로 만들었어도, 이 이스라엘 민족이 다윗이 그 주변의 속국들을 아주 착취해버리고, 아주 극악무도하게 정말 이가 갈리도록, 그들을 지배하고, 그들을 못살게 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돕는 나라로서, 외적의 침입이 오면, 그 속국을 보호해주고, 그리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래서 속국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하나의 동맹관계로, 적대관계로 우리가 지내지 말고, 이제는 우리 민족과 그 민족이 동맹관계로 지내자라고 그렇게 조약을 맺어서, 그래서 어쩌면 암몬 민족의 나하스 왕과 다윗 왕 사이에 우호조약, 동맹조약, 비록 주 종의 그런 속국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극악무도한 일본이 우리나라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식의 그런 지배가 아니라, 정말 그 주변의 나라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고 교류하고, 우호관계를 가지고 동맹관계를 가지고, 그래서 주변 나라들로부터 보호해주는, 그런 친절을 다윗이 베풀었기 때문에, 나하스 왕과 이 다윗 사이에 그런 좋은 관계가 세워져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나하스가 죽자, 나하스의 아들 하눈이 왕이 되었을 때, 다윗은 조문단을 보냈는데, 하눈은 그 조문단을 모욕해서 돌려보냈죠. 결국 하는 수 없이 하눈이 다스리고 있는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을 하고,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됐지만, 그래서 적대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오늘 등장한 이 사람은 누구냐면, 나하스의 아들인데 소비라고 하는 아들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나하스의 여러 아들들이 있는데, 그중에 하눈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하스를 뒤이어서 왕이 된 반면에, 이 소비라고 하는 아들은, 어쩌면 이 하눈이라고 하는 그 왕하고는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윗이 이 하눈을 제압해 주는 것은, 결국 소비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소비라고 하는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고, 어쩌면 이 소비에게는 그동안 다윗이 암몬 족속에게 선한 일을 했던 것, 그리고 소비에게 좋은 일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서, 지금 이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그 소비가 암몬 족속의 왕이었던 나하스의 아들 소비가 지금 다윗이 힘들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 이 순간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일은 누구입니까? 이 암미엘이 누구냐면, 그 사람의 집에 므비보셋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므비보셋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 므비보셋을 죽인 것이 아니라, 므비보셋을 대접하고 자기 왕자들과 똑같이 대우를 해주고 선대하는 그 모습을 보고, 어쩌면 이 므비보셋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암미엘의 아들 마길도 다윗왕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 나왔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바르실래는 누굽니까? 바르실래는 그전에는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고 오늘 처음 등장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의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이전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오늘 처음 등장하는 사람이지만, 아마도 이 바르실래도 다윗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그동안 입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힘들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세 사람들이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공궤했을 거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우리 주변에게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이 친절을 베풀 때, 내가 힘든 상황이 언젠가는 생길 텐데, 그 언젠가 힘든 상황이 생기면, “내가 지금 도와준 사람이 언젠가는 나를 도와주겠지”라고 그렇게 예상을 하고서 도와줬을까요? 아니죠. 다윗은 그런 생각으로 도와준 것이 아니라, 다윗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늘 친절을 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어느 경우입니까? 사울에게 은혜를 베푼, 사울을 용서한 그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은 선대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자기를 향해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도, 용서하면서 선대하는 그런 삶을 살아왔는데, 그렇게 살아온 다윗의 삶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죠.

물론 내가 선대를 베푼다고 해서, 내가 친절을 베풀고 사랑을 베푼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에게 똑같이 친절하게 대하고 친절하게 사랑을 베풀지 않는 그런 배은망덕한 경우가 우리 주변에 충분히 많이 있습니다. “나는 사랑하나, 그런데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할 수가 있고” 나는 친절을 베풀지만, 그것을 악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죠. 다윗의 삶에 있어서 그런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압살롬이죠. 압살롬이 누굽니까? 죄를 지어서 사형 선고를 받아야 될, 그런 아들을 다윗은 용서해 주고, 명예 회복을 시켜주고, 복권시켜주고, 다시 왕자로 받아주었는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그런 배은망덕한 행동을 한 것이 바로 압살롬의 모습이죠.

또 어떤 사람에게서 볼 수 있습니까? 사울 왕의 경우에 그런 경우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사울 왕을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고, 충성해 주었지만,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은혜를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그 모습을 보여준 것이 사울 왕의 모습입니다. 이것처럼 우리가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 때, 우리 주변이 늘 나에게 사랑을 베풀고, 우리에게 친절을 다시 되갚아주는 그런 일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일들이 항상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배은망덕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배은망덕한 경우를 만나게 되면, 그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까? 아, 소용없구나. 다시는 친절을 베푸나 봐라. 다시는 은혜를 베푸나 봐라. 다 쓸데없는 짓이다. 괜히 내가 어리숙하게 보여서, 이런 꼴을 당한다고 하면서, 다시는 그런 선을 베풀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배은망덕한 경우는 소수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수인데, 그게 너무나도 아프니까, 크게 느껴지는 것이죠. 여러분은 그런 경우가 없습니까? 내가 도와주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자비를 베풀어 주었는데, 물속에 빠진 사람, 살려줬더니 가방 내놓으라고 달려드는, 그런 경우를 종종 경험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목회하면서 그런 경우를 종종 나게 만난 적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성도들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고, 참 연약한 사람 감싸주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정말 잘 대해준다고 대해주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욕하고 떠나버리는 그런 성도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교역자들에게 정말 잘 대해주고 싶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해주려고 했는데, 비난하고 떠나는 그런 경우도 있었어요. 그때 그런 일을 당하게 될 때,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무엇이냐면, 너무 친절할 필요 없다. 너무 잘해줄 필요 없다. 그런 생각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생기는 거죠. 하지만 그 생각이 누가 주는 생각입니까? 사탄이 주는 생각이에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생각이에요.

성령님의 속삭임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 10절의 말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선을 행하다가 낙심할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해봤자 아무 의미 없거나 소용없거나 실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 이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들이 많이 오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는 그런 말처럼, 지금 다윗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다윗을 배신하고, 이제는 새로운 권력자 편에 서게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제는 왕좌에서 쫓겨난,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다윗에게 찾아와 사랑을 베풀고 음식을 베풀어 주는 것이죠. 이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거기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있는 것이죠.

어쩌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고, 환란 가운데서도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주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3절에 보면 아히도벨이 죽음을 선택합니다. 아히도벨은 원래 다윗의 신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조언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반역이 일어나게 되자, 그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로 붙어버렸습니다. 압살롬에게 붙어버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소망이 압살롬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권력의 이동을 보면서, 한 사람은 쫓겨나고 한 사람은 세워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결단의 순간에 아히도벨은 머리를 굴렸습니다. 이 순간에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아무것도 없이 힘없이 쫓겨나는 다윗을 계속해서 추종할 것인가? “아니면 권력자로 새로 부상하고 있는 젊은 압살롬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하는 그 선택의 순간에 아히도벨은 압살롬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잘 풀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이 꼬여 나가는 것을 보게 되는 그 순간에, 자신의 계략은 먹혀들지 않고, 결국 이 압살롬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 이 아히도벨은 결국 자살을 선택하게 된 것이죠.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배반했던 가룟 유다의 모습을 오버랩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마치 아히도벨이 다윗과 함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에게도 결단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돈을 선택할 것인가? 예수님을 선택할 것인가? 가룟 유다는 그 돈의 위력을 알았습니다. 돈이 힘이 있거든요. 돈이 효용 가치가 있거든요.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돈 앞에 머리를 굴복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이 훨씬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어요. 아히도벨은 다윗보다 압살롬에게 소망이 있다고 판단한 것처럼, 가룟 유다는 예수님보다 이 세상의 물질이 훨씬 더 힘이 있고 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다윗이 아히도벨의 배신을 당하게 된 것처럼, 그래서 그때 다윗이 배신당했을 때 느꼈던 그 느낌을 쓴 것이 시편 55편의 말씀인데, 그 배신당했을 때의 그 쓰라린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2절 14절 말씀에,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데 내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함께 즐기던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떠나가 버리는 그 씁쓸한 상황 가운데서, 그의 시편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죠.

20절 21절에서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의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하지만 결국 가룟 유다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 던지고 맙니다. 왜 그랬습니까? 은 삼십이 자신에게 영생을 줄 수가 없는 것이죠.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승리하지 못할 거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아히도벨과 같이 선택의 순간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것인가? 그런데 그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되는가? 가룟 유다와 같이 은 30을 선택할 것인가? 주님을 선택할 것인가? 원하기는 바로 우리들의 눈앞에 보이는 알량한 이익보다는, 주님의 뒤를 끝까지 따를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질문을 한번 던져보십시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라고 하는 사람은, 아마도 다윗에게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어요. 예전에 사랑을 받고 예전에 도움을 받고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다윗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죠.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려고 하실까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해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이고, 적대시했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거부했던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런 과분한 은혜와 축복을 우리가 받은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 23편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아마 이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도망가서 죽게 되는 그 상황, 이제는 아무런 소망도 없고 끝났구나 되는 바로 그 상황에, 하나님께서는 어마어마한 잔치상을 차려주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풍성한 양식으로 공급해 주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게 왜 은혜입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고백과 그 찬양이 오늘 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이죠.

그런데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주시는 은혜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에게 아무런 은혜를 끼친 적이 없지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엄청난 은혜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셔서, 우리들에게도 하늘의 은혜와 축복으로 채워주시는데,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목이 타서 죽는 그 순간에, 외면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렇게 외면하신 이유는 우리들에게 배불리 먹이시고 영의 양식으로 채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또 날마다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해 주시는지, 감사하며 찬양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그리고 매 순간순간마다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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