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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의 능력 (삼하 15:24-29)

아주 오래전에 우리 목사님들께서, 부흥사 목사님들께서 설교하실 때 사용했던 설교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혹시 들으셨는지, 기억이 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청년이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입대하게 되었을 때 그 어머니가 조그마한 포켓 성경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 성경을 군대에 가서 늘 읽으라고 그렇게 주었던 것이죠. 그랬더니 그 청년이 군대에서 군복 상의에 그 포켓 성경을 넣어두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그 전쟁 가운데, 참 전쟁의 포화가 치열한 가운데, 총탄을 맞게 되었는데 그래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살아났어요. 총알에 맞은 줄 알았는데, 그 총알이 어디에 맞았는가? 바로 여기에 맞았던 거죠. 심장 위에 있던 그 포켓 성경에 총탄이 날아들어서, 만일 그 포켓 성경이 없었다고 한다면, 심장을 뚫고 그 청년이 죽었을 수 있었겠는데, 그 포켓 성경이 있어서 총탄을 막았고, 그래서 살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들어보신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저도 그 설교를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나도 군대에 가게 되면 포켓 성경을 넣어가지고 다녀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원진이한테도 하나 줬나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오늘 우리가 사무엘 하의 말씀을 읽게 되었는데요. 다윗은 피난의 길을 떠나는 가운데, 포켓 성경과 같은 것을 챙겨가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다윗이 압살롬의 쿠데타로 인해서 급하게 피난을 가는 길 가운데 있었던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급하게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도망을 가야 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놓고 가야 했는가? 아주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 결정을 해야 했었는데요. 무엇을 가져가게 될까요? 이런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져가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놓고 가게 되는 것이죠. 아마 대부분의 것들을 다 가져가지 못할 겁니다. 대부분의 것들을 다 남겨두고, 정말 긴요한 것만 몇 개 가지고 가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보니까 가족들은 데리고 갔습니다. 피난길이 아무리 급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 가족일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하지만 후궁들은 남겨두고 떠났어요. 다윗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 가운데서 사독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들도 다윗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사독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어 가지고 와서 같이 피난길에 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판단이고, 그 당시에 신앙이 가장 중요한 시절이었던 그 시절에, 그 무엇보다도 언약궤를 가지고 가야겠다고 하는 판단은 가장 중요한 판단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언약궤가 무엇이었습니까? 언약궤라고 하는 것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안겨주었던 승리의 언약궤였습니다.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한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언약궤였습니다. 출애굽 하는 동안에 언약궤와 함께 행진하면서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데 언약궤를 메고 그 여리고성을 돌았던 기억도 있고요. 이 언약궤와 관련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승리의 추억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도, 그 요단강을 건너갈 때 언약궤를 먼저 지고, 그 언약궤를 메고 그 요단강에 발을 담글 때, 요단강이 갈라지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요단강을 한번 볼까요? 지난번에 성지에 갔을 때, 요단강을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비가 어느 정도 넓이냐면, 지금 요르단과 이스라엘 국경을 저렇게 나무로 막아놨는데요. 저 정도 거리밖에 안 됩니다. 전주천이나 삼천보다도 작은 너무나도 작은 조그마한 또랑 같은 강이 요단강인데, 그런데 비가 많이 내리게 되면 우기가 되면 그 높이가 굉장히 높아서 사람들이 지나갈 수 없는 그러한 곳이 바로 요단강이었다고 하는데요. 그 요단강을 갈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게 만들었을 때 함께 했던 것도 언약궤였던 것이죠.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누가 정치적인 정당성을 가지게 될까요?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과연 이 다윗과 압살롬 가운데서 누가 정치적인 정당성을 가지게 되고 백성들은 누구를 따라갈까요? 당연히 언약궤가 있는 사람에게로 백성들이 몰려갈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권력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누가 옥새를 쥐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게 되었던 것처럼,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누가 언약궤와 함께하고 있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따라서 이 언약궤를 가지고 간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보나 정치적으로 보나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언약궤를 가지고 같이 다윗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언약궤를 보면서, 언약궤를 다시 메고 돌아가라고 말을 했습니다. 같이 피난길에 오를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언약궤를 원래 있던 곳에 그냥 두라고 이야기했던 것이죠.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언약궤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옛날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다가 다윗의 성으로 돌아오게 되는 그 광경 가운데서, 너무나도 기뻐서 춤을 추면서, 체통도 없이 그냥 너무나도 좋아하면서 춤을 추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고, 그 언약궤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 그 언약궤를 너무나도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기 때문에, 이 언약궤를 보면서 “맞아.” 다른 것은 다 놓고 가더라도, 이 언약궤만은 가지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법한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는데, 놀랍게도 이 순간에 다윗이 언약궤를 그냥 제자리에 돌려두라고 했다고 하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읽은 사무엘하 15장 25절에서부터 26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그와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다윗은 이 피난의 길 가운데, 쿠데타가 일어나서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 위험한 상황 가운데, 언약궤를 가지고 가서 그래서 내가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고, 다시 왕권을 얻게 되고, 언약궤와 함께하면서 승리를 쟁취하고 그래서 내가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오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놀랍게도 다윗의 고백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내주실 것이겠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면, 나를 이곳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실 텐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언약궤를 가지고 가서 승리를 쟁취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서 또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이루어지기를 겸손하게 이야기했던 것이죠.


다윗은 이 언약궤를 가지고 가면 자신에게 승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언약궤를 반드시 가지고 가서 정치적인 정당성을 얻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고 그래서 내가 이 싸움 가운데서 내가 승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죠. 그 옛날 언약궤가 함께 했을 때 여러 가지 능력이 나타났지만, 그러나 언약궤가 함께 했을 때 능력이 나타났던 것은 언약궤 자체의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언약궤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이 더 소중하고,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는가? 언약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약궤가 누구에게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려고 했었던 것이 바로 다윗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리 언약궤를 가지고 간다고 하더라도, 피난길에 그 언약궤를 가지고 내가 피난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언약궤를 가지고 내가 정치적인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을 다윗은 너무나도 잘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보여준 예가 블레셋과의 전투일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 시절에 이스라엘 민족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전쟁 가운데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함께 전투를 하게 되었는데요. 어떻게 해도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전세가 불리한 겁니다. 이러다가는 완전히 망하게 생겼습니다. 이러다가는 큰일 나게 생겼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의 생각을 해냈는데요. 어떻게 할 것인가? 전쟁에서 지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언약궤를 가지고 오자.” 그 옛날 우리를 이기게 만들었고, 그 옛날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고, 그 옛날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었던, 그 언약궤를 가지고 오면 우리가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사무엘상 4장 3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옴에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스라엘 장로들이 생각한 것은 이 위기의 상황 가운데에서 언약궤를 가져오자는 거였습니다. 실로에 모셔져 있던 그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와서, 그 언약궤를 통해서 승리해보고자 했던 이 생각이 신앙적인 생각이고, 믿음의 생각인 것처럼 생각이 되었고, 그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도착하는 순간,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가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겼다. 이젠 됐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제는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환호성을 지르게 되었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블레셋 진영에까지 그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이겼느냐 하면, 이기질 못했어요. 무참히 전쟁에서 깨져버린 것이죠. 이길 줄 알았는데, 언약궤만 있으면 우리가 승리할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한 그 이스라엘 민족은 무참히 깨져버렸고, 자신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던 그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언약궤가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참히 깨져버린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언약궤가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이죠. 언약궤를 가지고 갔을 때 승리가 있었고 기적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 언약궤를 메고 가는 그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승리했던 것이지, 언약궤 자체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인 거죠. 하지만 우리는 늘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언약궤가 어떤 능력이 있는가 하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고, 포켓 성경책이 능력이 있는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어서, 전쟁 가운데서 목숨을 건져주었는데, 그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기보다는 “포켓 성경책이 있어야 되겠구나” 생각하고, 포켓 성경책을 내 군복 안에 넣어두면 나도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포켓 성경이 나를 살릴 거라고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다윗은 그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언약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생생하게 함께하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었고, 그 언약궤 자체에서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했다고 하는 것이죠.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한다면, 언약궤가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언약궤가 없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일 함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셨다고 한다면 아무리 언약궤를 가지고 간다고 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죠.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언약궤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종교적인 요소들입니다. 예배, 기도, 찬송, 성경, 예배당 헌신, 그 모든 것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언약 때와 같은 것들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그것이 마치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껍데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죠. 우리의 마음 가운데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서, 언약궤를 꼭 챙겨야 되겠다. 언약궤를 가지고 가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버리는 경우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너무나도 자주자주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가 그랬냐면 바로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사울왕은 전쟁을 앞에 두고 제사를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블레셋 민족과 전쟁을 해야 하는데 전쟁을 하기 전에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으면 좋겠어요.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나가야 되는데, 제사를 드리고 싶은데 사무엘이 오지 않는 겁니다. 사무엘이 와서 제사를 드려줬으면 좋겠는데,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자 사울의 마음 가운데 조급함이 생겼어요. 빨리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야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 가운데 기다리다 못해 자신이 그냥 제사를 드려버린 것이죠. 사울이 이렇게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나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너무나도 간절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던 건가요? 그게 아니에요. 사울의 마음 가운데는 전쟁을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언약궤와 같은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포켓 성경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와야 제사를 드려야 내게 능력이 생기고, 그래서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해 버리고 그런 제사를 그냥 들여버린 것이죠.

이게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종종 이런 식으로 잘못되어 가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꼭 포켓 성경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다니기 쉽게 우리가 필요한 때 써먹을 수 있게 하나님이 포켓 성경만큼 작았으면 좋겠고, 하나님이 알라딘의 마술 램프처럼 편리하게 꺼내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내가 문지를 때 나타나주면 좋겠어요. 평상시는 그냥 처박혀 있다가 내가 필요할 때만 꺼내서 문지르고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는 그런 편리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내가 그렇게 그런 언약궤를 가져오는 것이 그게 진짜 믿음이고 포켓 성경을 챙기는 것이 진짜 믿음이고, 그렇게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그게 참된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라고 이스라엘 장로들이 언약궤를 가져와야 된다고 말했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우리들을 향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면서도 종교 생활을 철저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종교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종교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쉽게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이것을 얼마만큼 했는가 얼마만큼 하지 못했는가? 쉽게 측정 가능한 것이 종교생활인데, 그것은 우리가 편리하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서는 것, 측정될 수 없는 쉽게 무엇으로 재단할 수 없는 그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서는 것이 믿음이 되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은 구제를 하고 기도를 하고 금식을 했는데, 얼마만큼의 구제를 하고 얼마만큼의 기도를 하고 얼마만큼의 금식을 하는가 쉽게 측정할 수 있었고, 그 바리새인들의 그 양은 일반 평민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구제를 했고 훨씬 더 많이 기도를 했고 훨씬 더 여러 번 금식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이 더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이 다 가짜일 뿐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다윗의 고백은 참으로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25절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이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26절 말씀 가운데서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이루어질지다라고 고백을 한 것이죠. 이 말은 “그냥 될 대로 돼라” “케 세라 세라”라고 하는 의미로, 그냥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될 대로 되겠지. 내가 뭘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베푸시는 거고 하나님께서 나를 거부하시면 할 수 없다. 그냥 될 대로 되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윗은 어떻게 하면 이 쿠데타 상황 가운데서 다시 복귀할 수 있을 것인지, 다시 왕자로 돌아올 수 있는지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철저하게 그것들을 준비하고 대비했습니다. 후새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과 함께 같이 도망가려고 할 때 후새를 향해서 말합니다. “너는 나와 같이 가지 말고, 너는 압살롬에게로 가라.” 압살롬에게 투항하고, 그리고 그 압살롬에게 받게 되는 정보가 있으면, 그러면 사독이나 아비아달이나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그 정보를 나에게 전달해 주라고 그렇게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서 이야기한 것이죠. 그냥 될 대로 돼라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철저하게 자신이 준비했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다윗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하나님 필요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대답도 아닙니다. 언약궤 필요 없다. 나는 내 지혜로 내 내가 권력을 가진 차지할 수 있겠다. 내가 이런 방식을 통해서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하겠다고 한 말도 아닙니다. 다윗의 이 말은 언약궤를 다시 돌려가라고 하는 말은 내 힘으로 하겠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15장 31절 말씀에 보면은 아히도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이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린 것이죠. 아이도벨이라고 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아이도벨이라고 하는 사람은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략가였습니다. 삼국지로 말하면 제갈량과 같은 사람인 것이죠. 그의 조언, 그가 내놓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너무나도 뛰어나서, 듣는 사람들이 다 감탄을 하면서 그 사람 말이라고 하면 다 듣고 따르는 아주 놀라운 지략가가 우리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압살롬 편에 있는 겁니다. 그 소식은 아주 정말 절망적인 소식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 상황 가운데서 다윗은 “괜찮아. 내가 더 지혜가 많으니까.” 내 방식대로 하면 내가 이길 수 있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이죠. 하나님 아이도벨, 최고의 지략가인 제갈량과 같은 그런 엄청난 지혜의 사람 아이도벨이 압살롬에게 있는데, 하나님 그의 지략을, 그의 계획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에 응답을 하시기는 했지만, 아이도벨의 계획을 어리석게 만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이도벨은 정말 뛰어난 조언을 압살롬에게 합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그 아이도벨의 그 조언을 듣지 않아 버리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을 바꾸어 버리셨던 것이죠.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겸손하게 엎드린 것입니다. 될 대로 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요. 은혜의 하나님이기에, 그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모습이 오늘 이야기 가운데 있던 것이지,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내가 승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압살롬을 물리치고 다시 이 왕궁으로 복귀를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 나쁜 무리들을 내가 무찌르고 승리할 수 있을까?”가 다윗의 최우선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이 순간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피난길에 떠 간 나를 다시 돌려줄 수도 있겠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다시 복귀할 수 있게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했어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그럼 안 돼요”가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이루어 주옵소서.”

다윗은 지금 내가 반드시 이 나쁜 쿠데타 세력을 물리치고, 반드시 내가 이곳을 언약궤를 가지고 가서 반드시 승리하고 반드시 내가 이 왕좌를 되찾겠다고 하는 게 다윗의 목표가 아니었어요. 그게 종종 우리들의 목표가 되지만, 그게 종종 우리들의 욕심이지만, 다윗은 그런 마음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다시 돌아오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않으셔서 돌아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고, 나를 파멸의 길로 인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윗이 믿은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것을 허락해 주시든지, 이것을 허락해 주시든지, 어떤 결과를 내게 허락하셔도,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내가 승리하겠다고 하는 게 관심이 아니라, 다윗의 뜻은 다윗의 마음은 내 욕심으로 왕좌에 복귀하는 게 최우선순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엎드리는 것이 다윗의 믿음의 핵심이었던 것이죠.


이게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은 무엇인가? 엄마 아빠를 그냥 믿는 거죠. 엄마 아빠가 뭘 해도 믿어요. 그래서 아이를 높은 곳에 올려놓고 “얘, 뛰어내려. 내가 받아줄게.” 그런 얘기하면 아이가 위에서 바라보면서 “우리 아빠가 미친 거 아니야? 뛰어내리면 내가 다칠 텐데, 우리 아빠가 이거 돌아버린 거 아니야?” 못 뛰어내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뛰어내려요. 그냥 뛰어내려. 왜 아빠니까! 엄마니까! 어린아이가, 어린아이가 아빠를 믿듯이, 다윗은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결론을 내려준다고 한들 그것은 우리에게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도하시는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내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언약궤를 가지고 가서, 반드시 이겨내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그 사랑 앞에 내 자신을 드리는 것, 이것이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시편 23편의 고백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가운데서 나온 다윗의 고백인 것이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죽음의 골짜기로 하나님께서 나를 데리고 가더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걱정하고 불안에 떨게 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고, 그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실패도, 절망도, 고통스러운 일들이, 심지어 죽음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의 믿음이 그저 포켓 성경 하나에, 언약궤에 전전하고 긍긍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넓으신 품 안에 우리가 온전히 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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