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국진
박찬욱 감독이 만들고 배우 이영애, 최민식 씨가 주연한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금자씨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지만,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백 선생에게만큼은 친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친절한 금자씨가 그렇게 잔인하게 원수를 갚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영화 속의 금자씨는 그렇게 이중적이고, 그렇게 잔인할 수 없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친절한 금자씨에 심리적인 동조를 느낀다. 사법제도는 백 선생 같은 사람을 적절하게 벌주지 못하는데, 금자씨의 복수를 통해 정의가 선다고 믿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그렇게 그려나가고 있기 때문이지만, 금자씨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금자씨의 복수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 무의식적으로 쌓여있는 복수의 한이 카타르시스를 통해 풀린다. 우리는 우리에게 친절한 자에게는 친절하고, 우리에게 나쁘게 하는 자에게는 잔인하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은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은 그런 점에서 “친절한 금자씨”와는 다르다.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기록한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7-8)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태복음 5:43-45)
만일 하나님이 친절한 금자씨 같았다면, 이 세상에 아무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 하나님은 악인이며 불의한 자들에게도 해를 비취시고, 비를 내리신다. 그래서 우리가 해의 혜택과 비의 혜택을 입는다.
그런데 우리에게 친절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서만큼은 잔혹하셨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은 진노를 쏟아 부으셨다. 애처롭게 부르짖는 예수님의 절규에 매정하게 대하셨다. 친절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우리에게 친절하시기 위하여.
생각해볼 문제 / 토론 문제
1. 사랑이 실천되지 않고 관념의 테두리 안에서만 머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직접적인 실천을 할 수 있을까?
2.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먼저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친절을 베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생각들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4. 내가 베푼 작은 친절 하나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어떤 점에서 그런가?
5. 친절을 베풀 대상과 친절을 베풀지 못할 대상의 구분은 어디서 생기는가? 그리고 그 구분은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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