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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을 베푸는 자에게 상이 있을 것

– 이국진

성경 말씀 중에서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라는 메시지가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 속에서 사랑을 베푸는 모습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대비해 볼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서 1:2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자 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7-8)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태복음 5:4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당연히 베풀어야 할 것이 친절인데, 성경은 친절을 베푼 자에게 상(償)이 있을 것이라고 기록한다.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것은 나에게 손해가 아니다. 나의 소유를 나누어 주어야 하고, 나의 시간을 사용하여 친절과 사랑을 베풀어야 하기 때문에, 나의 소유와 시간을 손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성경은 친절을 베푸는 자에게 상이 있을 것을 약속한다. 물론 이러한 상은 사업의 성공이나 건강의 축복 등과 같이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개념으로만 재단될 수 없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10:42)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34-36, 40).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는 사랑의 7번째 정의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친절을 베푼 자가 받는 상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친절을 베푸는 것은 결코 진정한 사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일관적으로 사랑과 친절을 베푼 자에게 결과적인 복이 있을 것을 보장하고 있다.

반면 사랑과 친절을 베풀지 않는 자들은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어떤 일에 대해서 가장 무거운 징계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코 행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내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C.S.Lewis의 말은 의미가 있다. 1

1960년에 만들어진 “비토리오 데 시카”, “산드라 미로” 주연의 [로베레 장군] (Il Generale della Rovere)이란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였다. 독일군이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저항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처형시킬 때였다. 그런데 거기에 저항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잘못 잡혀온 사람이 끼어 있었다. 그는 억울하다고 항변하였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억울합니다!” 그러자 같이 잡혀와 있던 어떤 레지스탕스가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아무것도 안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전쟁이 5년이나 계속되는 동안,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죽어갔고, 조국이 나치 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말이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죽어 마땅하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편안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나치를 반대하다가 나치의 수용소에서 고통을 당했던 독일의 목사, 마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1892–1984)는 이렇게 시를 썼다. “독일에서는 처음에 공산주의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때 나는 잠잠히 있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는 독일에서 유대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때에도 나는 잠잠히 있었습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는 독일에서 노동조합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때에도 나는 잠잠히 있었습니다. 나는 노동조합에 속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는 독일에서 천주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때에도 나는 잠잠히 있었습니다. 나는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나를 위해서 외칠 사람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2

내가 사랑을 베푸는 것은 이타적인 것 같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본다. 쉰들러는 독일인 사업가로서 유대인들을 살려내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는 이익을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사업을 하였다. 그러한 사랑의 표현은 나중에 연합군이 이겼을 때 유대인 직공들로부터 돌려받는다. 쉰들러 공장에 있던 유대인 노동자들은 쉰들러를 보호하기 위해 서명한 편지를 전달한다. 그들에게 베풀었던 친절들이 그에게 친절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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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C.S. Lewis, [시편 사색] (홍성사, 2004), 20.[]
  2. 이 글은 뉴잉글랜드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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