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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략이 없으면 (잠 11:14-15)

배려와 멸시 (잠 11:12-13) +++ 사랑의 역설 (잠 11:16-31)

우리는 두절을 읽었는데요. 14절의 말씀 그리고 15절의 말씀이 각각 다른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5절의 말씀의 경우에는 보증을 서는 것에 관한 교훈을 해주고 있는 것인데요.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 보증을 서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서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보증 서지 마라. 보증을 서게 된다면, 해를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그러니까 함부로 보증을 서는 일을 하지 말라고 15절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보증 서는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작년이었던가요? 작년이죠! 작년 9월에 잠언서 6장 1절에서부터 5절 말씀에 근거해서, <우매한 보증>이라고 하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서, 보증에 관한 성경적인 교훈을 아주 깊게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보증을 안 서버리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어려움에 처한 우리 이웃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힘들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이웃들을 못 본 척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정말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보증을 서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은 무엇인가 등등. 보증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살펴본 적이 있는데, 벌써 시간이 꽤 오래 지나서 다 잊으셨다고 한다면, 예전에 제가 했던 그 <우매한 보증>이라고 하는 설교 영상을 다시 한번 찾아서 들어보시기를 권고드립니다. 이번 주 이 설교를 홈페이지에 올리게 될 텐데요. 이 설교 홈페이지에 링크를 걸어 놓을 테니까 , 예전에 우매한 보증에 대해서 설교했던 내용을 링크해 놓을 테니까, 보증에 관해서 다시 한번 듣기 원하시는 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설교를 다시 들어보시기를 권하는 것으로 15절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매한 보증(잠 6:1-5) http://iwbs.org/?p=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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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두 절을 읽었지만 한 절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14절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14절 한번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14절입니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대요.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게 된대요. 그러니까 지략이 있는 게 좋겠죠? 지략이 있어야 됩니다. 끝! 결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지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 지략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을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겠죠. 지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한국말 사전을 살펴보니까, “어떤 일이나 문제를 명철하게 포착하고 분석 및 평가하여 해결 대책을 능숙하게 세우는 뛰어난 슬기 그리고 계략”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제, 어떤 사건, 어떠한 난처한 일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빨리 분석 평가하고, 그 해결책을 빨리 해결해낼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지혜, 슬기, 계책, 계략, 그런 것을 가리켜서 지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지략들이 많으면 평안하겠지만, 이런 지략이 없다고 한다면, 삶이 힘들어지는 것이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이고, 정말 힘들게 된다고 하는 것인데요. 지략이 많아야 된다. 지략이 있어야 된다고 오늘 잠언서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근데 지략이 많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알지만,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지략이 많아집니까? 아니잖아요.

지략이 있고 싶어요. 근데 지략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생각이 안 나는 걸, 어떡하겠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어떤 문제를 만났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났습니다. 정말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일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이 문제를 아주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것을 완전히 잘 깨끗하게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슬기로움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뭐 노력한다고 됩니까? 어떻게 그런 지략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내가 머리를 굴린다고 해서, 지략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 아무런 지략이 없는 지혜가 없는 사람을 향해서, 좀 머리 좀 써라. 좀 생각 좀 해봐라. 좀 지략을 세워서, 좀 대처를 해라. 백날 이야기한다고 해서 됩니까? 안돼요. 그렇게 태어났는데, 아무리 지략이 있으라고 이야기한다고 한들, 지략이 생겨나겠습니까? 생겨나지 않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략이 없으면 망하고,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지략을 많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단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지략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런 지혜가 없어도, 내게서는 그런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머리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당신 같으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나 혼자 생각하면 해결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노인들에게 가서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경험이 많은 사람들 앞에 가서 그런 일들을 경험했을 때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어머니는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아버지는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면 되는 것이죠. 전문가에게 찾아가면 되는 겁니다. 나는 의학 지식이 없어요. 나는 아무런 건강에 대한 상식이 없어요. 하지만 의사에게 가서 물어보는 겁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 아이들의 문제를 가지고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오은영 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보는 것이고, 이런저런 전문가들에게, 아니면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게 된다고 한다면, 나는 비록 우둔해서, 나는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없지만, 지략이 부족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귀를 기울이면 지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머리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혜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고요.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아서, 그들의 조언을 들으면, 그리고 그 조언을 듣다 보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얻느니라.” 평안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지략이 “뛰어나면”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지략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이 사람의 지략을 듣고, 저 사람의 지략을 듣고, 이 사람의 지략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많은 지략을 우리가 듣게 된다고 한다면, 실수를 줄이게 되는 것이고, 잘못된 판단을 줄이게 되면서, 그래서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왕의 경우에 한 나라를 다스리면서, 자기가 독단적으로 독불장군이 되어서, 그래서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고 한다면, 백성들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왕이 여러 사람들의 신하들의 이야기들과 백성들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사람들이 무슨 불평이 있고, 어떠한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면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결정하게 된다면, 백성들이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게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요. 왕이 아닌 우리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도 사람들의 지혜를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혼자 생각해서 결정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쪽 면만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한쪽 면만 바라보기 때문에 내가 보면, 이것은 네모나요. 이런 컵이 있으면, 이 컵을 이쪽에서 바라보면, 네모나게 생겼어요. 그래서 내가 이 컵을 바라보면서, “아, 이것은 네모나구나”라고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네모나다고 보았기 때문에, 내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컵을 위에서 보면 동그랗습니다. 한 사람은 네모나다고 보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동그랗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것만을 그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아니하게 된다고 한다면, 이 컵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내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지략에 귀를 열어야, 지략이 많아지는 것이고, 지략이 많아져야, 평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이야기 가운데, 소경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코끼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한 소경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서, 코끼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코끼리라고 하는 것은 마치 나무둥치와 같다. 나무둥치처럼, 커다란 둥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코끼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소경은 코끼리의 코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뱀처럼 생겼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소리냐? 코끼리가 나무둥치 같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코끼리는 뱀처럼 생겼다. 흐물흐물하고, 이렇게 길쭉하게 생겨서 움직이는데, 마치 뱀처럼 생긴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코끼리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소경은 코끼리의 귀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마치 나뭇잎과 같이 생겼다고, 그 넓은 나뭇잎과 같아서, 그래서 그 나뭇잎과 같은 것으로 내에게 부채질을 하면 시원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3명의 소경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한 소경은 코끼리에 배를 만지면서, 이 코끼리는 마치 커다란 바위와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코끼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커다란 바위와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고요. 또 다른 소경은 코끼리에 그 뿔을 만지면서, 이 코끼리는 어떤 창과 같은 것이라고 아주 뾰족한 창처럼 생겼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소경들이 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각각 조그마한 부분을 만져놓고,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죠. 왜? 내가 만졌으니까, 내가 경험했으니까, 이것은 내가 확실히 느낀 것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데, 이 세상에 코끼리에 대해서 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내가 경험한 것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서로 싸우고 서로 다투는 겁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그게 아니라, 우리는 코끼리의 일부분만을 만지고 있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리 앞에서 우리 인간은 너무나도 조그마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깨달을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진리라고 하는 그 엄청나게 큰 진리를 우리들의 알량한 머릿속으로 다 집어넣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진리의 일부분만 볼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 일부분만 보고 있는 우리가 내가 진리를 다 보았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가 조금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지하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다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귀를 기울여야 되는, 그래서 그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종합하면서, 저 사람이 틀렸다가 아니라, 나랑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내가 본 부분과 저 사람이 본 부분이 다른 부분을 보고 있고,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보고 있고, 그래서 그 다른 사람들의 나의 의견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의견을 그냥 내 팽개쳐 버릴 것이 아니라, 함께 마주 앉아서 나는 이것을 보았는데, 너는 무엇을 보았는지, 그래서 우리가 함께 맞추어 보면서, 코끼리 코끼리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하게 되고, 더 나은 그런 파악을 하게 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가지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지략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한다고 하면, 문제들에 대해서 바른 해결책을 얻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100% 확실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정말 완벽하게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내가 경험하지 아니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와의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략이 많아야 돼요! 지략을 하나만 가지고 있을 게 아니라, 다양한 지략을 같이 모아서, 들어야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해결책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은 종종 믿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 귀를 닫아버리고, 내가 이해한 성경 말씀, 내가 알고 있는 신앙, 내가 알고 있는 그 교리,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을 죽여야 될 대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결국 진리에 다가가지 못하고, 내가 이 컵에 한쪽 면만 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우둔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해 버리는데요.

그런 우리들을 온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면서, 똑같이 무시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거 원인데, 왜 네모라고만 이야기하느냐고 무시를 당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이 교조주의에 빠져서, 도무지 들으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망하게 될 것이다.

망하게 되는 길로 가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눈을 닫아버리고, 귀를 닫아버려서, 내가 잘못 보고 있다고 하는 것, 내가 부분적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리고 그 부분적인 진실 속에서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를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지략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내려놔야 해요. 우리들이 진리 앞에서 겸손해져야 되는 거예요. 내가 일부만 볼 수 있구나! 내가 전체를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모습만을 보고 바라보고 있고 저 뒤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구나! 내가 보지 못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겸손하게 인정하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극히 일부분이며,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이 지략이 많아지는 길이고, 그 지략이 많아져야 평안함을 얻을 수 있으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신앙생활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려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래서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단독자로 서는 것이 그게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체면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순 엉터리고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그게 진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내가 단독자로 서는 것이 신앙생활인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두 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깨닫는 것이 얄팍하고, 부족하고, 제대로 깨닫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이해는 우리들의 지략은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지략에 의해서 교정받아야 되고 수정받아야 되고 보완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신앙생활해 나가는 가운데, 영적으로 같이 성숙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전도서 4장 9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믿습니까? 한 사람이면 어떻게 된다고요? 패하는 거예요. 한 사람이면 어떻게 돼요? 망하는 거예요. 내가 독단적으로 독불장군처럼 행동하면, 내가 맞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 교만한 마음 가운데 있으면, 망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되고, 세 사람이 되고,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렇게 깨달은 것이 내가 잘못 깨달을 수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교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것이 진리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면을 내가 보지 못했었구나! 우리가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가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내가 보아서, 서로 보완해 주고, 그리고 함께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될 때 성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로, 해석 공동체로 우리들을 불러주신 것이죠.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한 것이 잘못 이해했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해석 공동체의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다른 사람은 똑같은 본문을 읽고, 어떻게 이해했는지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 전혀 잘못된 길로 성경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해석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고, 우리 모두가 함께 같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결정을 할 때, 어떻게 결정해야 되는가?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고민하고, 혼자 나 홀로 있다가, 그렇게 해서 내가 결정해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혼자 결정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결정해야 됩니까? 같이 의논하고, 같이 대화하고, 그래서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부로 만드셨어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 가운데 하나가, 세 가지 규례 가운데 하나가 결혼의 규례입니다. 하나는 노동의 규례이고, 또 하나는 안식의 규례이고, 또 하나가 이 결혼의 규례라고 하는 것인데, 태초에 만드신 이 세 가지 법칙이, 이 규례가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인간을 이 부부로 짝 지어주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남자 혼자 살아가게 만들지 않고, 여자 혼자 살아가게 만들지 않고, 이렇게 같이 살아가게 만들어 주셨습니까? 그것은 서로 보완하고 도우라고 하는 것이죠.

남편과 아내가 같던가요? 생각하는 것이 완전 정반대던가요? 완전 반대예요! 왜 그렇게 반대인지 모르겠어요. 꼭 반대로 생각해요. 왜 반대로 생각할까요? 그래야 온전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똑같이 보면 망하는데, 다르게 보기 때문에, 보완하고 완충하고 모든 것들을 다 살펴보아서, 실수하지 아니하도록 만들어주는 방법인 것이죠. 그래서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됩니다. 믿습니까?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아내의 말을 잘 듣자!” 이런 얘기하면, “목사님, 왜 남편 말을 잘 듣자는 얘기는 안 합니까?” 물어보시는 분이 계세요. 보니까, 아내분들은 말 안 해도 잘 들어요. 남자들이 문제지! 자기들이 옳은 줄 알고, 그냥 자기 멋대로 하려고 하는 그런 게 문제란 말이에요.

서로 남편과 아내가 이야기하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야기하면서 같이 의논해야 되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도 들어야 돼요? 부부가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도 더 들으면 좋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도, 그 아이가 3살짜리 꼬마 애든지, 다섯 살짜리 꼬마애든지, 아직 세상 물정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아빠 생각에는 이렇고, 엄마 생각에는 이런데, 너의 생각은 무엇이냐고 그 아이에게 물어야 해요. 왜냐하면 그 꼬마 아이는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또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꼬마 아이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 꼬마 아이들이 우리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그 측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가정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면서, 우리 꼬마 아이들에게 물어봐야 되고, 또한 우리 부모님들에게도 물어봐야 되고, 친구들에게도 물어봐야 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실수를 적게 하고, 우리가 평안의 길로 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미국에 가보니까요. 정말 그래요. 부모님들이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애들은 가라”가 아니라, 아이들도 같이 앉혀놓고, 처음부터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빠가 직장을 옮기고 싶은데, 내가 이 직장을 옮겼으면 좋겠니? 안 옮겼으면 좋겠니? 아내랑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런데 부부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꼬마 아이를 앉혀놓고 같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아이에게 아빠가 직장에서 이런 일 때문에 고생이 많고, 이런 일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그래서 직장을 어떻게 옮기고 싶은데, 그런 이야기를 아이들과 공유하면서, 네 생각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거예요.

논어의 술이편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무슨 뜻인지 다 아시죠?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가 배울 선생님이 계시는데, 착한 사람이, 착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따르면 되는 것이고, 착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든,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든, 다 선생님이라는 거예요. 때로는 우리들의 긍정적인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어떤 사람은 반면교사가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의 눈을 겸손하게 열어서, 다른 사람들의 지략을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인데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따라가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많은 지략을 듣되, 그 지략들을 겸손하게 들으면서, 그리고 무엇이 가장 바른 선택인지, 스스로 그리고 바르게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죠.

이솝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죠.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당나귀를 끌고 시장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나귀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옆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사람들. 당나귀가 있는데, 왜 타고 가지 않고 걸어가는지 모르겠다”라고 옆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들을 태우고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또 이야기를 합니다. “저런, 젊은이는 나귀를 타고 가고, 어른은, 노인은 걷게 하다니, 이런 경우가 있는가?” 하면서 한마디 했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맞는 말이다. 생각해서 서로 바꿨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타고, 아들은 내렸습니다. 그렇게 한참 가다 보니까, 또 옆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저런 나쁜 부모가 있나, 어른은 자기가 편하자고 나귀를 타고 가고, 아들은 저렇게 걸어가게 만들다니, 부모가 나쁘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맞는 말이다 생각해서, 이번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 위에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니까, 사람들이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나귀가 얼마나 불쌍하냐? 저 나귀에게 두 사람이 타서, 저렇게 나귀를 힘들게 만들고 있다”라고 그렇게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도 맞는 말이다. 생각해서 두 사람이 나귀를 매달고, 시장을 향해서 가는 겁니다. 아빠와 아들이 나를 막대기에 매달고 나귀를 끌고 가다가, 아, 다리를 건너다가, 나귀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강에 빠졌다고 하는 이솝우화가 있습니다.

수많은 지략들, 수많은 지혜들, 수많은 사람들의 말들이 다 천차만별인데, 그러면 누구의 말대로 따라 하는 것이 옳을까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누구의 말에 비중을 두어야 할까요? 내가 생각한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내가 말한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부모님이 말한 대로 따르는 게 좋겠습니까? 자녀가 말한 것을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목사님이 말한 걸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누구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제일 좋을까요? 다 의견이 다르면, 누구의 뜻을 따라가는 게 제일 현명한 일이죠? 그런 경우가 없습니까?

(정답은) 옳은 걸 따라가야 됩니다. 누가 이야기를 했든, 옳은 것을 따라가야 하는 겁니다. 그 옳은 것은 때때로 우리 꼬마 아이가 말할 수도 있고, 그 옳은 것을 때때로 나를 미워하는 그 사람이 말해줄 수도 있고, 그 옳은 것을 때때로 이웃집 사람이 말해줄 수도 있고, 때로는 부모님이 말해줄 수도 있고, 때로는 아내나 남편의 입을 통해서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고민을 해야 되는 것이죠. 지략을 다 듣고 함께 고민하는 가운데, 아, 그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어떠한 것을 따라가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사역을 하실 때, 사탄이 다가와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내게 경배하라고 하는 말을 했는데, 그러한 말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것은 지략이 아니라, 잘못된 유혹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이곳이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 셋을 지어, 여기 있자고 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따르지 아니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말리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그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략을 듣는 것은 듣는 것이지만, 그러나 결정할 것은 누가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바른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우리들의 욕심에 따른 선택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고, 우리들의 탐욕의 마음에 따라 결정할 때가 많고, 때로는 내 자존심 때문에 이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려고 하는 그런 경우가 너무나도 많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시의 판단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고,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가면서, 그래서 그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나갔던 것과는 달리, 우리들은 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보다는 이 세상의 잘못된 길을 따라가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러면서 그것을 신앙적으로 포장하는 것이죠. 신앙적으로 포장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포장하고, 정말 정당한 것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교만함에 근거해서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이고, 담력의 마음 가운데 결정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게 우리들의 어리석음이고, 지략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략을 없게 만드는 결정이어서, 결국은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결정을 내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게 우리들의 약점이고 그게 우리들의 허물이에요.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 연약함, 우리들의 더러운 죄성을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에, 우리가 다시 한번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면서, 주님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면서, 수많은 지략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분별하여 따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에 맞는 바른 판단을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매한 보증(잠 6:1-5) http://iwbs.org/?p=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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