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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이신 하나님 (마 6:5-1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 당시에는 아주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가르침이었다고 합니다. 아주 유명한 독일의 신약 학자가 한 명 있었는데요.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라고 하는 그런 학자가 있었는데, 이 학자는 1세기의 유대 문헌들을 깊이 연구하고 내린 결론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러면 어떻게 불렀는가? 정말 가까이 하기엔 너무 존귀하신 하나님, 친근하게 다가가기에는 너무 무서운 하나님, 장엄하신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을 부를 때는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존귀가 많으신 그 아버지 하나님, 그 하나님, 하늘의 하나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불렀지, 하나님에 대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그렇게 부르지 못했다고 그렇게 연구해 놓았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유태인들을 향해서 기도를 가르칠 때, 너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불러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이 가르침은 정말 놀라운 가르침이고 획기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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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아바”라고 하는 이 아람어는 우리나라 말에 “아빠”와 같은 단어입니다. 마치 꼬마 아이가 자신의 아빠를 부르듯이, “아빠” 친밀하게 그렇게 부르듯이,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 되는가? 두려워서 가까이 하기 뭐 하기에는 너무 먼 하나님이 아니라, 너무나도 장엄한, 그래서 우리가 가까이 하려면 무서운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마치 우리들의 사랑이 많은 아빠처럼, 마치 사랑이 많은 우리 엄마들처럼, 그렇게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서 부를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부를 때,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주기도문에서 맨 처음에 하나님을 부를 때 부르는 그 호칭을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주기도문 번역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번역하는 것은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번역입니다. 헬라어를 한번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지금 이렇게 쓰여진 것이 헬라어 단어들입니다. “파테르 해몬 호 엔 토이스라노이스”(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라고 하는 헬라어 표현인데요. “파테르”(πάτερ)라고 하는 말은 아버지라고 하는 말이고, “헤몬”(ἡμῶν)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들의라고 하는 말이고, “호”(ὁ)라고 하는 것은 정관사인데, 마치 관계 대명사처럼 쓰이는 것이고, “엔”(ἐν)은 인(in), “안에”라고 하는 말이고, “토이스”(τοῖς)는 정관사이고, “우라노이스”(οὐρανοῖς)라고 하는 말은 하늘 들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직역하면 “하늘에 있는 하늘의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표현인데, 그것을 우리가 잘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할 때 “계신”이라고 하는 말을 집어넣어서 번역한 겁니다.

그러니까 “계신”이라고 하는 말은 원문에는 없어요. 없는데 우리가 이해하기 좋도록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렇게 번역을 하다 보니까, 우리들의 생각에 어떤 생각이 드냐면, 하나님의 “거주 장소”가 저 하늘이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번역을 했으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장소적인 의미에서 하늘에라고 하는 말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장소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차원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것을 상징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이라고 하는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저 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의미는 우리들의 육적인 아버지 우리들의 혈통의 아버지, 이 땅에서 우리를 낳아주신 그런 아버지와는 차원이 다른 영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 영적인 의미에서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땅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하나님의 거주 장소가 저 먼 하늘, 저 먼 천국의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이 땅의 일은 관심도 가질 수 없거나, 이 땅의 일은 잘 참여하기 어렵거나,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의미는 영적인 아버지라, 우리들의 육적인 아버지 이 세상의 아버지와는 다른 영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를 때 하늘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표현을 보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땅이 아닌 저 먼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식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의 인간적인 아버지와는 달리, 이 땅의 아버지와는 달리,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죠. 이 땅의 아버지는 시간적인 제약과 공간적인 제약 때문에 우리들에게 빨리 다가올 수가 없어요. 우리들은 시간에 제한을 받고 공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필요할 때 바로 달려가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영적인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언제든지 다가오실 수 있고, 우리들의 기도를 언제든지 들을 수 있고, 언제든지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시며,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을까요? 마태복음 6장 7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가르쳐주시기를 너희가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도대체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는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일까요?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그 단어의 의미를 좀 아시겠습니까?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혹시 이해가 안 되신다고 하면 그 문장 전체를 천천히 문맥에 따라서 읽어보시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마태복음 6장 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7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니까 중언부언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 말을 많이 하지 말라. 이방인들처럼 그렇게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이 무슨 의미냐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기도를 우리가 한 번만 하는 것보다는, 작정하고 오랫동안 계속해서, 기도의 양을 많이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정성을 보시고, 우리들의 정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개념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게 기도 많이 할 필요 없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좀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인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기도를 안 해도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기도할 때 우리가 기도를 잘 안 하다가, 정말 필요한 일이 있을 때 그때만 하나님 앞에 한 번씩, 필요할 때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겁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본다고 한다면, 성경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그게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성경적인 가르침이 항상 기도해야 되는 것이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에서는 가르쳐주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말을 많이 하지 말라. 기도를 많이 할 필요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기도의 양을 많이 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필요할 때만 기도할 게 아니라, 언제든지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고, 우리가 절망하고 낙망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포기해 버리고 기도하지 않을 게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기도해야 되는 것이고,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기도하라는 이야기고, 그 어떠한 일들이 우리들 앞에 펼쳐 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항상 하나님과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기도하라고 하는 그런 말씀인 것이지, 기도의 양이 응답을 결정한다는 식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해야만 정성을 아주 다해야만 그리고 하나님을 감동시킬 정도로 그렇게 우리가 정성을 들여야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라 미신적인 관점입니다. 우리 안에 많이 들어와 있는 미신적인 관점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야 되는 경우는 언제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아닐 경우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들의 아버지세요. 우리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계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누가 아닌가? 사악한 재판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악한 재판관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난한 과부가, 불쌍한 과부가 나아가서 그 재판관을 향해서 간청을 합니다. 내 어려운 사정이 있는데 내 어려운 사정 좀 해결해 주세요. 그랬을 때 이 사악한 재판관은 그 과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아는 척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척 해버립니다. 그런 상황이 있을 때 이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또 가서 조르고 또 가서 조르고 계속해서 간청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도 간청을 하니까, 이 사악한 재판관은 그때서야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이 여인이 자꾸만 와서 나를 괴롭히는데, 이 여인을 더 이상 오지 않게 만들 묘수는 없는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생각하면서 이 재판관은 차라리 이 여자의 간청을 들어줘버리고 말겠다. 그러면 더 이상 이 여인이 나를 괴롭게 하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에서 그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만일 그런 사악한 재판관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양을 많이 해서 괴롭게 해서.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응답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길 가다가 어쩌다가 만난 아저씨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사악한 재판관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심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마치 우리의 아버지와 같아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그런 부모님과 같아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은 부모로서 어떻게 아이들을 대하셨습니까? 우리 아이가 어느 날 우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빠, 나 저 장난감 갖고 싶어”라고 그 이야기를 하면, 그 말이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말이 내 가슴 속에 박혀요. 이 아이에게 장난감 사줘야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이 내 마음 가운데 콱 박혀서 돈을 버는 겁니다. 그래서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이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싶어서 가게로 달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 그 장난감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 거죠.

우리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우리 아이가 말을 합니다. “엄마, 나 떡볶이 먹고 싶어. 나 치킨 먹고 싶어.” 그러면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아요. 일을 하면서도 내가 빨리 집에 가서 우리 아이에게 이 맛있는 거 만들어줘야 되겠다고 하는 그 생각이 마음속에 박혀 있어서, 그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바로 부모님들의 마음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 그것밖에 안 한 것 가지고 내가 들어줄 리가 없다”라고 하면서, 외면해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신음소리조차도, 우리의 울부짖음을 주님께서 보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11절의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 원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영적인 하나님이라고, 영적인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 아버지는 한계가 있죠. 부모로서의 사람 부모는 한계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과는 달리 우리들이 어리석어서 좋은 것을 주기보다는 나쁜 것을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이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주었는데,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요. 이 아이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주었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아이에게 독이 되는 것 같은 것을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제가 그랬어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제 마음 가운데 있었고, 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제 마음 깊은 곳에 있었어요. 그런데 아빠로서 훈련받지 못하고, 서툴고 너무나도 어리석어서, 그리고 죄성으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 아이에게 가장 좋은 걸 주고 싶은데 오히려 아이에게 좋지 못한 것을 주었어요.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이 아이가 너무나도 겁이 많은 겁니다. 용기가 없는 겁니다. 부모님과 분리 불안 증세가 있는 겁니다. 제 마음 가운데 우리 아이가 이렇게 크면 안 되는데, 이 아이가 좀 잘 자랐으면 좋겠는데, 용기가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고, 이 아이가 자신 있게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고, 정말 인생을 멋지게 개척해 나가는 그런 위대한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 아이는 불안 증세가 있고, 부모님과 떨어지기를 두려워했고, 용기가 없고 자신감이 없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제 마음 가운데 너무나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 아이를 용기 있게 만들고 싶어서, 제가 했던 어리석은 행동이 무엇이냐 하면 아이를 다그친 거죠. 다그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이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하면, “그래. 아이스크림 사줄 텐데, 네가 슈퍼마켓 들어가서 네가 사가지고 나와.” 얘기를 하니까 아이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도, 두려워서 못 들어가는 거에요. “아빠가 좀 갖다 사다 줘. 아빠가 사다 줘. 아빠 손이 붙잡고 가고 싶어.” 이야기하는데 이 어리석은 아빠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네가 가서 못 사오면, 못 먹어.” 윽박지르고, 그러자 이 아이는 펑펑 울면서, 그렇게 하는데도 모질게 이 아이의 용기를 길러주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했는데, 오히려 그것은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더 세상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더 용기가 없게 만들어버리고, 이 세상이 너무 무섭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되고, 아이를 정말 자신 없는 아이로 길러버리고 만 그 책임이 책에 있더라고요.

지금 같으면 그렇게 안 할 것 같아요. 울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손 붙들고 “걱정 마. 아빠가 함께 갈 테니까, 같이 가보자. 뭐 먹고 싶니?” 골라보라고 말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옆에서 다정하게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이 세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충분히 살만한 곳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세를 보여주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우리 딸아이 결혼할 때, 제가 했던 말이 뭐냐면, “미안하다. 아빠가 바보 같아서 미안하다.” 얘기한 건데요.

우리 인간 부모는 어떤 부모인가? 가장 좋은 걸 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어리석어서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나오는 일들을 하는 게 우리 부모의 마음이에요. 하지만 우리들의 하늘의 하나님 우리들의 영적인 아버지는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 하나님은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주님을 신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 부모님은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능력이 없어서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다 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연로해지면서 이제는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더 이상 해줄 것들이 줄어가고 있고, 그리고 우리들의 호흡이 끝나면 멈추면 더 이상 해줄 수 없게 되는 연약한 존재가 인간 부모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아버지 우리들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능력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간들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지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는 저와 여러분들이 기대하면 기대할수록,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게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어떻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일까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무엇이 필요하죠? 피를 물려받아야 자식이 되는 겁니다. DNA가 같아야 부모와 자식이라고 하는 사실이 확인이 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러다 보니까 자식은 부모를 빼다 닮게 되어 있는 겁니다. 붕어빵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전혀 닮지 않았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나?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닮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닮기보다는 마귀를 더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왕따 시키고, 아는 척하지 않고, 여러 가지 악한 모습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자꾸만 솟아나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마치 마귀의 자녀와 같은 모습을 보여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들의 아버지는 마귀라고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8장 44절에 말씀해 보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한 그 모습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기보다는 마귀의 자녀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이 없다고 할까요?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닮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은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닮지 못했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자격이 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어려운 겁니다.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당당하게 부모님에게 나가지만, 그러나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여러 가지 힘든 일을 당하게 되면 아버지 앞에 부모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악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죠.

그래서 집을 나갔던 탕자는 아버지 앞에 돌아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1절 말씀에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아들은 집에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늘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한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자격이 없는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내 백성이라고 칭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2장 23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 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를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1932년에 소설을 발표한 김동인이라고 하는 소설가가 있는데요. 일제시대 때 동광이라고 하는 문학잡지에 <발가락이 닮았다>라고 하는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 <발가락이 닮았다>라고 하는 소설은 의사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인데요. 젊은 시절에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기에, 성병에 걸려 생식 기능을 상실한 M이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노총각 신세로 있다가, 그래서 어쩌다 보니까 결국 결혼에 성공하게 되었는데요. 결혼을 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부인이 아기를 임신하게 된 겁니다. 자신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아내가 아기를 임신한 것이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M이라고 하는 사람이 의사를 찾아왔습니다. 의사를 찾아와서 자기 자신에게 생식 능력이 있는 것인지 검사를 맡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가도, 그런 검사를 받지 않고 그냥 다시 돌아가버렸어요. 또 다시 돌아와서 그런 기능이 있는지 검사를 맡고 싶다고 얘기를 했지만, 다시 받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나중에 이 의사는 자초지정을 듣고 나니까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에게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하루는 시름시름 아프게 되니까 그 아이를 그 M이라고 하는 사람이 안고 와서 그 의사에게 치료해달라고 하면서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의사선생님, 이 아이가 우리 증조 할아버지를 닮았어요. 그리고 나도 닮았는데, 저 발가락 가운데 발가락이 좀 길어요. 그게 나를 닮았어요.”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M이라고 하는 청년을 의사가 바라보면서, 대답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 아이가 선생님의 발가락만 닮은 게 아니라, 선생님의 얼굴도 닮았네요.” 그 이야기를 했지만 그 M이라고 하는 사람이 정말일까 하면서 의혹의 시선으로 또 희망이 섞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까 봐 두려워서, 그 사람의 시선을 피했다고 하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 M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 아닐 것 같은 그 아들을 보면서 내 아들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렇게 믿고 싶은 거죠. 아니라고 하면 자신의 삶이 부정을 당하고, 정말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어서, 그냥 이 아이가 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런 심리가 이 남자에게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우리가 전혀 하나님을 닮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딸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그 모습을 보면서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나의 아들이 아니다.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내 팽개쳐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우리들의 죄를 다 씻기시고 거룩한 옷을 입혀서 저와 여러분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한 목사님이 계시는데요. 그 목사님은 사춘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사람입니다. 사춘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학생들 모두가 다 동양인이라고 중국 사람이라고 놀리면서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었는데요. 그러니까 이 이 사춘기의 이 소년이 자꾸만 잘못된 길로 가는 겁니다. 학교에 가서 늘 싸우고 다투고 문제를 일으키고,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이 학교에서 문제만 일으키는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그 학생을 불러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 이런 식으로 하면? 넌 커서 뭐가 될래? 너는 커서 누가 되려고 이렇게 말썽을 비우느냐?” 그랬더니 이 학생이 대답하기를 “상관없어요. I don’t care. 내 미래에 뭐가 되든 무슨 상관이에요?” 그렇게 막 나가던 그런 학생이었는데, 그 학생을 향해서 교장 선생님이 얘기하는 거예요. “너 내일 어머니나 아버지 데리고 와라.” 그 이야기를 들은 이 학생이 집에 들어가서 부모님한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야기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겁니다.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자기 전에 엄마한테 이야기를 해요. “엄마, 내일 학교에서 오래요.”

다음 날이 돼서 그 어머니가 교장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 학교로 옵니다. 시카고 아주 추운 곳인데, 그 추운 겨울날 어머니가 버스에서 내려서 학교로 총총총총 걸어오고 있는데, 엄마를 마중하기 위해서 교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 아이가 자기 엄마를 본 거예요. 잘못은 내가 했는데, 엄마가 나를 위해서 그 모습으로 달려오는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그 아이는 그 순간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않으면서 공부도 열심히 해서 나중에 목사님까지 되었다고 하는 그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늘 잘못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우리들의 아버지처럼 우리의 잘못을 다 우리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저 높고 높은 곳에서부터 이 추한 곳으로 오셔서,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시고 해결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는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영적인 아버지 하늘의 아버지가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혼자 고민할 것이 아니라 늘 넘어지고 쓰러질 때 혼자 당황해 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다시 한 번 힘과 용기를 얻고, 다시 한 번 일어서고 또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주님 앞에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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