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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와 멸시 (잠 11:12-13)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받는다 (잠 11:4-11) +++ 지략이 없으면 (잠 11:14-15)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들의 이웃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요. 어리석은 자는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비난하는 반면에,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을 보더라도 비난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하며 또한 그것을 드러내고 까발리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덮어두며 숨겨주는 그런 자가 지혜로운 자요. 신실한 자라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고요. 그렇지 않고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그 잘못들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며 잘못을 또 이야기하고, 또 비난하고 이야깃거리 삼고 가십거리로 삼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것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씀이니까,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실 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허물이 많고 실수 투성이고, 뿐만 아니라 모순 투성이인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입으로는 거룩한 것을 말하고, 입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실제 우리들의 삶은 이율배반적이고, 그리고 뒤로는 여러 가지 악하고 잘못된 일들을 많이 저지르는, 허물많은 그런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연약한 자요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허물이 많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지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그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용서함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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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고, 실수가 많은 사람들이고, 악한 일들을 많이 하는 사람들인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는 그러한 허물들을 쉽게 알아채지만, 내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별로 보지 못하면서, 그래서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만 분개하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은 너무나도 크게 보이고, 다른 사람의 실수는 너무나 심각한 실수인 것처럼 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허물이나 실수들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리는, 정말 이기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하여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3절 말씀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형제의 눈 속에 들어 있는 아주 작은 잘못, 우리 이웃에게 있는 너무나도 작은 실수, 허물들에 대해서는 아주 심각한 것처럼,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그렇게 화를 내고 분노하면서, 그렇게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는 반면에, 정작 내 자신에게 있는 들보와 같은 커다란 허물들, 너무나도 큰 악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보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의 허물에 대해서만 집중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이 우리들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내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우리의 부모님이나 우리들의 자녀들이, 우리 성도들의 모습 가운데 나타나는 허물과 실수들이, 그리고 우리가 직장에서 만나고 또 여러 사회 관계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잘못과 허물들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고, 그러한 잘못된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허물이 있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경멸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며, 그리고 그 잘못을 자꾸만 드러내고 말하고 다니고, 그 사람을 모욕 주려고 하는 그런 태도는 아주 어리석은 자의 태도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볼 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잠잠해야 하는 것이고, 덮어두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모습을 보여야, 그게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지, 그렇지 아니하고 비난하고 멸시하고, 그리고 떠들고 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라고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으십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교훈이 되는 아주 중요한 교훈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모습,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모습, 다른 사람들이 실수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그런 실수를 하고 잘못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냐면, 그 사람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 옆사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나의 영적인 거울입니다.

한번 옆사람을 한번 바라보세요. 거울처럼 보입니까? 거울처럼 안 보입니까? 거울이에요. 거울 한번 보세요. 내 얼굴이 보이나. 사람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거울로 봐야 하는 겁니다. 저 악한 사람들은 누군가? 바로 내 더러운 모습을 그냥 드러내주는, 나의 영적인 더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영적인 거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수많은 허물과 단점들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사람을 향해서 욕하고 비난하고 멸시하고 그 사람의 죄악을 떠들고 다닐 게 아니라, 내가, 나도 그러한 상황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나도 저 사람의 형편에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똑같은 실수와 똑같은 잘못과 악을 행할 수 있는 내 모습이 거기에 도사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니, 더 더 심각한 모습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하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들의 남편과 우리들의 아내와 우리 부모님과 자녀들이 그리고 우리 주변에 상사와 직원들이 우리가 관계하는 그 모든 사람들이 잘못하는 모습을 보면 분노하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내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측은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내게도 그러한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분노하는 모습이 없는지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실수하는 면이 없는지,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무책임한 면이 없는지,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모습이 내게는 없는지, 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 내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볼 때 어떠한 모습을 보이냐면, 그런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멸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왜 멸시합니까? 왜냐하면 그렇게 비난하고 비판하고 멸시하게 되면 멸시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을 욕하고 비난하는 그 순간, 나는 그런 죄에서부터 자유롭다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마취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꿰뚫어보고 계셔요. “너도 똑같은 죄인이로구나” 하는 사실을 우리 주님께서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경고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절 2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옆 사람의 실수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 이웃의 잘못을 바라보게 될 때,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잠잠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나의 죄악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잘못한 사람을 보면서 숨겨주고 사랑으로 덮어주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다른 곳을 살펴보면 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편 15편 4절 말씀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시편 15편 4절의 말씀은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며, 주의 성산에 살 수 있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분으로 나온 구절이 바로 1편 15편 4절의 말씀인데요. 누가 여호와의 장막에 거할 수 있겠는가? 누가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그 자격을 이야기하면서, 의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 이런 자격과 이런 조건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그 항목 가운데 하나가 어떤 항목이 있냐면,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라고 시편 15편 4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서 11장의 말씀과 시편 15편의 말씀은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잠언서의 말씀에서는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 멸시하지 않는 자가 지혜로운 자요. 멸시하지 않는 자가 신실한 자라고 잠언서에서는 가르쳐주고 있는데, 시편에서는 말하기를 “누가 의로운 사람인가?” “누가 경건한 사람인가?” 망령된 자를 멸시해야,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춰야 합니까? 시편을 썼던 다윗의 말에 장단을 맞추어야 됩니까? 잠언을 쓴 솔로몬의 말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됩니까? 누구 말을 따르는 것이 맞습니까? 어느 게 맞죠? 시편을 따라야 한다? 잠언을 따라야 한다? 다윗을 따라야 한다? 솔로몬을 따라야 된다? 애라, 모르겠다?

성경이 모순되는 표현을 하고 있을 때에는, 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잠언에서 멸시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실 때는 어떤 의미에서 멸시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시편에서는 망령된 자를 멸시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는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멸시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죠. 묵상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시편 15편에서 의로운 자 경건한 자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갈 수 있는 자는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 말은 누군가 잘못을 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저런 나쁜 놈” “저런 악한 사람” “저런 정말 의롭지 못한 사람” 하면서 비난하고 욕해도 괜찮다고 하는 의미에서 멸시하는 자가 의롭고 경건한 자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가는 자라고 말씀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시편에서 망령된 자를 멸시해야 한다고 하는 그 말은 “부러워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망령된 자들이 잘 나가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살려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정말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는데, 거짓말을 슬쩍슬쩍 하면서, 남의 것을 훔쳐가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압제해가면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부를 축적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고, 잘 나가는 그런 모순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의롭게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을 믿어봤자, 성공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어봤자, 아무런 이 세상에서 낙이 없고, 오히려 악한 자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 이 하나님의 믿음의 길을 가는 것보다, 믿음을 저버리고 저렇게 저 악한 사람들처럼, 저 사람들처럼 그냥 마음대로 살면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싶다”고 하는 그런 부러운 마음이 우리들 마음 가운데 문득 문득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이 듭니까? 안 듭니까? 그런 마음이 들 수가 있어요.

이게 뭐지? 도대체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게 뭐지? 이렇게 우리는 고통 가운데 살아야 된단 말인가? 그런데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떵떵거리면서 잘 사는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 가운데 문득 문득 솟아오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시편 15편에서 권면하고 있는 말씀은 무엇이냐면, 그런 망령된 자들을 절대로 부러워하지 마라. 그들이 이름을 날리고 있고, 그들이 성공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서 박수를 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어도,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라. 시편 15편에서 말씀해 주시는 그들의 성공을 멸시해야 되는 것이지, 그들의 성공을 부러워하면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그들을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자가 의로운 자요. 경건한 자요. 주의 성산에 올라갈 수 있는 자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15편의 말씀은, 그러니까 그렇게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비판하고 욕하고 정죄하고 멸시하는 말들을 막 내 뱉어도,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잠언서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악한 자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고 멸시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겸손하게 주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했을 때, 우리 가운데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고 죄악을 범하고 여러 가지 실수를 하게 되었을 때, 그러한 잘못들을 사람들에게 소문 내며 다니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고, 두루 다니며 “너, 이런 얘기 들어봤어?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어!” 하면서 가십거리를 삼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것은 아주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더 나아가서 성경에서는 죄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흔히 죄책감을 안 느끼면서, 마음껏 죄를 짓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렇게 남의 일을 험담하며 다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아니요! 그거 죄가 아닌 것이 아니라, 정말 큰 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죄가 됩니까? 그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일들은 다 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실제적으로 우리 가운데 그 누구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누군가 죄를 범했다고 한다면, 누가 누군가 큰 실수를 범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잠잠하라고 했으니까, 멸시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한담하며 그러한 비밀들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모른 척하고 그냥 아 덮어두고,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냥 모른 척 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무조건 쉬쉬 하면서, 덮어두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성도님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의 중직자가 혹은 목사님이 혹은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어떤 분이 잘못을 하면, 그냥 쉬쉬하고 덮어두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모른 척 하는 것이 그게 은혜스러운 것이라고 굳건하게 믿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라고 하는 말씀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13절 말씀에서 신실한 자는 그러한 것들을 숨긴다고 하는 말은,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 악이 있어도, 우리 가운데 죄악이 있어도, 그냥 방관하며 방치해두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비난하고 욕하고 멸시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 것이지, 그리고 숨겨두라고 하는 것,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욕하고 그렇게 모욕을 주고 멸시하는 일들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에서 그런 의미로 말씀해 주시는 것이지, 정말 그냥 방치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말씀이 결단코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 가운데 허물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권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가운데 누군가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그냥 방치해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여,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게 만들고, 그래서 회복시켜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으로 그렇게 영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가족의 개념으로 생각해 보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가족입니다. 영적인 가족으로서 우리가 함께 영적인 가족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향해서 “형제님” “자매님”으로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영적인 가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가족의 개념으로 바라본다고 한다면, 우리 집안에 우리 큰아들이 잘못을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모른 척합니까?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그 잘못을 한 것을 다루어야 하는 것이죠. 다루어서 그 잘못을 교정하고, 회개하게 만들고, 그래서 다시는 그런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게 만들어서, 그래서 이제는 좀 더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족의 의무요. 가족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역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가 다 약점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완벽하다고 한다면, 우리가 아무런 잘못이 없을 수 있다고 한다면, 굳이 가족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굳이 공동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완벽하다고 한다면, 굳이 공동체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다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넘어지기도 하고, 쉽게 낙망하기도 하고, 쉽게 믿음이 떨어지기도 하고, 우리는 죄와 허물들이 많을 범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인데요. 그러한 우리들이 서로 모여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 가운데 누군가 잘못을 하게 되면, 그 잘못한 사람이 그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만들고, 그리고 회개해서 영적으로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교회 안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 안에 목사님들이 계시고 장로님들이 계시고 권사님들이 계시고 우리 집사님들이 계시고, 또 교사들이 있고, 그렇게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서, 그래서 우리가 함께 의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거룩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인, 근데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허물을 지었다고 한다면, “그건 내 일 아니야”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할 것도 아니고, 잠언서의 말씀에, 멸시하지도 말라고 했고, 드러내지도 말라고 했고, 그냥 잠잠하라고 했으니까, 그냥 숨긴다고 했으니까,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이냐면, 우리 가운데 아픔이 있으면, 잘못이 있으면, 그것이 새 살이 돋아나도록, 암이 있으면 잘라버리고, 상처가 있으면 잘 약을 발라서 온전한 새살이 도달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그래서 영적으로 함께 성숙해져 가도록 서로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를 만든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를 만들어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만나게 했는데, 왜 만났는가? 왜냐하면 다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서로 약점을 가지고 있고, 단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의 단점과 약점들을 보완해주고, 그리고 이제 더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부부가 만들어진 거죠. 그러므로 부부 사이에서 남편에게서 아내에게서 허점과 단점이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미워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그 사람을 더욱더 사랑해야 할 이유인 것이죠.

우리 자녀들이 약한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아이들을 내칠 이유가 아니라, 그 아이를 더욱더 품어주어야 할 이유인 것이죠. 우리 부모님이 더욱더 어떤 약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부모님을 미워할 이유가 아니라, 더욱더 품어주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를 온전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목회자가 성도들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님들에 의해서 목회자도 우리가 영적인 가족으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관계가 되어서 그래서 서로가 함께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가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 방법이 무엇인가? 마태복음 18장 15절에서부터 17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내가 내 형제를 얻은 것이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누군가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소문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만 만나서, 이런 잘못을 저지를 게 아니라, 믿음으로 살라고 권면해야 되는 것이죠.

조용히 권면해야 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이야기해줘야 할 것이고, 그래도 듣지 않는다고 한다면, 교회의 말해서, 교회가 권고하게 만들어야 되는 것이고, 교회의 권고도 듣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가족으로 참여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사람이 아니라, 가짜로 들어와 있는 외부인일 수밖에 없어서, 결국에는 출교시키는 조치를 취해야만 하는 것이죠.

그래서 누군가 잘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가서 영적으로 권면을 해 줘야 되는 것인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가서, “너, 이런 잘못했지?” 하면서 그렇게 얘기하라는 게 아니고, 죄를 지적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복음의 원리를 가지고 접근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죄는 당신만 짓는 것이 아니라, 나도 똑같은 상황에 있다고 한다면 똑같은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그 복음의 원리를 가지고, 우리의 그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우리의 그 완고함이 예수님을 그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함께 바라보면서, 그래서 서로가 함께 회개의 길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처럼 지적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을 해야 되는가? 빌립보서 2장 1절에서부터 8절 말씀은 이렇게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무슨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바리새인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은 크게 보면서, 마치 나는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인 양,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면서 비난하고 정죄함으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회개의 기회를 갖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반발하고 그리고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일에 우리들이 얼마나 자꾸 바리새인처럼 행동하는지 몰라요.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도 바리새인처럼 접근을 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어요. “이 나쁜 놈들. 회개하라. 그런 사악한 나쁜 놈들.” 교회가 바리새인처럼 세상을 향해서 정죄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교회의 말에 귀를 닫아버리고, “너나 잘하시오”라고 하는 반응만 일으키게 만들어, 이 세상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일들을 지금 하고 있어요.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있는데, 잠언서의 말씀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바리새인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우리의 이웃을 망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가가야 하는 것이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나도 똑같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러기에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똑같이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죄악 가운데 있는 자들이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들에게 접근해 나갈 때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며 연약한 자들은 그들을 회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교만한 마음 가운데서 그들을 정죄하고 멸시하고 비난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깨달은 자로서,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으니, 주님 앞에 함께 나아간다고 한다면, 우리가 모두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 사랑을 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멸시와 비난의 길로 나갈 게 아니라, 사랑으로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며 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허물들과 실수들과 잘못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일매일을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의 실수들과 허물들과 잘못들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때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하고, 사랑으로 다가가야 하고 사랑으로 회복시켜주는 주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놀라운 은혜가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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