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11. 거짓말 (출 20:16)
복음의 눈으로 보는 십계명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몇 주간에 걸쳐서 강의를 해오는 가운데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10번째 계명, “탐내지 말라”라고 하는, 탐욕에 관한 명령을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십계명을 공부하면서 맨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천주교에서는 십계명을 구분할 때, 우리 개신교 대부분의 교파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 십계명과는 좀 다른 구분법을 사용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네 천주교에서는 제1계명과 2 계명을 하나로 묶어서 1 계명으로 보고 있고, 그래서 하나씩 당겨져서 우리가 생각하는 3 계명을 2 계명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4 계명을 3 계명으로 이렇게 하나씩 당기다 보니까, 9개의 계명밖에 남지 않게 되잖아요? 그래서 마지막 이 십계명을 10번 마지막 계명을 둘로 나누어서, 천주교 쪽에서는 9 계명과 10 계명으로 나누어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천주교 쪽에서는 제 9계명을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 제10 계명을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라고 하는 걸로 탐심에 관한 계명을 9 계명과 십계명으로 나뉘어서 나누어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류법은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이렇게 분류하든, 저렇게 분류하든, 십계명에 들어갈 내용들만 다 들어가 있으면 크게 중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천주교에서 쓰는 이 십계명의 구분법은 천주교에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개신교파 중에서도 루터교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개신교파 일부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분류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분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순종하느냐가 실질적인 내용을 우리가 그대로 따르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걸 어떻게 분류하는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종종 우리 개신교 우리에서 천주교의 십계명 분류를 비판하면서 제2계명을 없애버렸다고 그렇게 비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사실은 그렇게 없애버린 것은 아니라, 1계명 안에 포함시켜 놓았기 때문에, 물론 그들이 십계명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축약된 형태로 쓰기 때문에 우상숭배에 대한 구절이 좀 약화된 면이 있어서, 아주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그렇게 천주교에 대해서 구분법에 대해서 그렇게 비난할 것까지는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천주교 쪽에서 루터교 쪽에서 사용하는 구분법보다는 우리 개신교가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구분법이 훨씬 더 더 논리적이고 더 맞다고 생각이 되는데, 우리가 쓰는 방식이 더 옳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출애굽기 20장 17절의 말씀 가운데서 내 남의 집을 탐내지 말라, 아내를 탐내지 말라, 남종 여종 소 나귀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쭉 기록되어 있는데, 그 탐내지 말라고 한 여러 목록 가운데서 두 번째 나오는 아내를 꺼내서, 제9계명을 만들고 그리고 나머지 것들을 묶어서 제10 계명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좀 억지스럽기 때문에, 천주교나 루터교에서 사용하는 그런 분류법보다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분류법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가 제 십계명을 살펴 보게 되겠는데 이것은 탐심 탐욕에 관한 규정입니다. 제8 계명에서 도둑질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도둑질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남의 소유를 내가 부당한 방법으로 취득하는 것을 가리켜서 그게 도둑질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면 제 십계명은 실제적으로 그러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다른 사람들의 것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고 탐욕이 생겨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오늘 제10 계명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 탐욕을 부리는 것, 탐심을 부리는 것 그것은 어떠한 형태의 탐심이라고 할지라도 잘못된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콜로세서 3장 5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성경에서 우상을 아주 큰 죄로 보고 있는데, 이 탐욕이라고 하는 죄가 어떤 죄이냐? 그건 우상숭배의 죄와 똑같다고 아주 중요한 악한 죄라고 규정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탐욕을 부리며 살 것이 아니라,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욕심 없이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고, 탐욕을 부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욕심을 부리는 것이 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은 괜찮은 것이 될 수 있을까요? 과도한 욕심은 무엇이고 괜찮은 욕심은 어느 것일까요? 그 경계선을 우리가 정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살펴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어 욕구가 생기는 것, 무엇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것, 그런 욕심 자체 욕구 자체가, 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좀 다르겠지만, 욕망, 욕구가 생기는 것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특별히 불교를 비롯한 그런 마음의 중요성을 다루는 종교에서는 욕구 자체를 악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그런 수행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욕구를 억제하고 욕구를 그렇게 가능한 줄여서, 거룩에 다가가는 것, 종교적인 목적을 이루는 건, 내 욕구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진짜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죠. 그래서 불교 쪽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물질에 대한 소유 의욕을 없애야 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물질을 자꾸만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을 다 억제해서,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 그것이 중요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성적인 욕구도 억제해서, 독신으로 살아가야 하고, 식욕도 억제해서 소식만 한다든지, 아주 금식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아주 바람직한 것이라고 수많은 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제가 볼 때 좀 아쉬운 것은 무엇이냐면, 그런 종교에서 쉬고 싶은 욕구는 그렇게 정죄하지 않아요? 쉼,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쉬고 싶은 욕구만큼은 아주 강조하고, 괜찮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는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되게 되어 있는데, 어떤 욕구들에 대해서는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반면 또 다른 욕구에 대해서는 내가 안정을 꾀하고자 하는 욕구, 쉼을 취하고자 하는 그런 욕구들에 대해서는 괜찮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다른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어떠한 것을 갖고 싶은 욕구라든가 누리고 싶어 하는 욕구, 이런 욕구들이 생기는 것들은 사실 그렇게 악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3대 욕구가 뭐죠? 3대 욕구,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고 그래요. 누가 무엇이 중요한가는 사람들마다 다 다르겠지만 욕구가 그런 욕구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욕구가 있습니다. 생리적인 욕구가 있는 것이죠. 식욕도 있고 체온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그런 욕구도 있고, 성욕도 있고 숨을 쉬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고, 생리적인 현상 오줌이 말이 오면 비우고자 하는 그런 욕구도 생기는 겁니다. 생리적인 욕구들이 우리들에게 있는데 뿐만 아니라 안전에 대한 욕구도 있는 것이죠. 안정 취업 건강 내가 보호받고 안전하게 누리고자 하는 그런 욕구, 안전의 욕구들이 있는가 하면 소속의 욕구도 있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되고 나 혼자 외롭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단체에 들어가고 어떤 그룹 안으로 들어가고 또 애정의 욕구가 있어서 어딘가 사랑을 주고받는 그런 욕구가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내가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어요.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 사람들로부터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평가를 받고 싶은 욕구도 있고요. 더 나아가서 자아실현을 하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는 겁니다.
심리학자였던 매슬로우라고 하는 사람은 인간의 욕구들을 분석하면서 인간의 욕구가 가장 기초적인 저급하고 기초적인 욕구가 충족이 되면 좀 더 높은 단계의 욕구, 좀 더 높은 단계의 욕구로 더 발전해 나간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가장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거라고 한다면 생리적인 욕구가 충족이 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안전해지고자 하는 그 안전의 욕구가 더 생기게 되고, 안전의 욕구가 충족이 되면 소속되고 애정의 욕구가 생기고 그런 것들이 충족이 되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기게 되고 더 나아가서 그것마저 성취가 된다면 자아 실현의 욕구까지 그렇게 단계별로 사람들의 욕구가 발전해 나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과연 그런 욕구들 자체가 죄악 된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는 사실 그러한 것 자체가 악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금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욕구 자체가 아니라 남의 것을 욕심내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이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 욕구가 죄가 되는 죄가 되고 악한 것이 되는 것은 남의 것을 부정한 방법으로 탈취하고자 하는 그런 욕구 내게 속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소유하고 싶어 하는 부당한 욕구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보면 갖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걸 겁니다. 우리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갖고 싶은 것들이 자꾸 텔레비전에 선전을 하잖아요? 신기한 그 상품들이 다 나와가지고 이렇게 싼 것인데 하나만 사면은 얼마지만 두 개를 붙여줘도 얼마 안 하고 3개를 붙이고 보너스까지 해가지고 막 판다고 하면 그것을 갖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 어쩌면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 내게 있어서는 안 되는 것, 부당한 것들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욕구고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 않았더라도 우상숭배의 죄와 같은 것이라고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 내가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부당한 방법으로 가지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탐심의 죄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다윗은 남의 아내를 취하려고 하는 욕망이 생겼고, 아이라고 하는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려고 하는 그런 잘못된 욕구가 생겼고, 그리고 광야 이스라엘 민족들은 광야 생활하면서 만나를 얻으라고 했을 때 하루치만 거두라고 했을 때 하루치만이 아니라 며칠씩 거두어 두는 부당한 욕심들이 다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은 “왜 우리는 욕심을 부리게 되는 걸까요?” 하는 것입니다. 왜 탐심이 생기는 것이죠? 왜 욕심이 생기는 걸까요? 왜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파스칼이라고 하는 철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는 커다란 빈 공간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빈 공간에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다고 하면 다른 것을 자꾸만 채우려고 하는데 그것으로 만족스럽지 않고 그래서 결국 그 다른 것들을 자꾸 채우려고 하는데 그것이 탐심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성경에서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만족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물질, 이 세상의 것들을 만족하려고 하는 이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처럼 내가 갈망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그것이 우상숭배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어야 될 그 자리를 이 세상의 것들로 채우고자 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 대신에 잘못된 것을 선택하는 그런 죄의 반복이 될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권면합니까? 성경은 자족하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자족하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자족할 필요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6절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할 줄로 알 것이니라.”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주 부자였어요.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동방의 엄청난 부자였는데 그가 탐심은 탐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없애버렸을 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 자신의 소망이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고, 자신에게 하나님만 있으면 아무것도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탐심의 죄에서부터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탐심으로 가득 찬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거나 또 명예나 권력이나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더 갈망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탐심의 죄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해결책이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해결책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것 또한, 어폐가 있는 표현이죠. 하나님으로 가득 채운다고 하는 것 자체는 좀 어폐가 있는 말인데, 물질로 채우지 말고 우리들의 빈 가슴에 물질로 채우지 말고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옛날 영화가 나온 것 중에 하나가 “달마야 놀자”라고 하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이 절간에 들어가 피신해 있는 동안에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놓은 그런 영화인데요. 아주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그때 그 주지 스님이 밑 빠진 독을 가져다 놓고 스님들과 그리고 조폭들에게 문제를 냅니다. 이 밑빠진밑 빠진 독에다가 물을 가득 채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양쪽에서 지금 그 독을 밑 빠진 독에다가 물을 가득 채워 넣기 위해서 얼마나 방법을 이 방법을 쓰고 저 방법을 쓰는지 몰라요. 밑 빠진 독에다가 물을 집어넣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물이 빠져나가기 전에 물을 막 집어넣으면 되겠죠. 처음에 막 그렇게 해요. 물을 막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많이 집어넣으면 언젠가는 차겠지 하고 막 물을 집어넣는데 채워지나요? 안 채워지나요? 밑 빠진 독에는 물 부어봤자 채워지지 않죠. 그런데 그 순간에 조폭 가운데 한 명이 그 깨진 항아리를 들고서 호수 속으로 팍 들어가는 거예요. 그 호수 속에 들어가니까 그 독의 물이 가득 차서 결국 조직 폭력배들이 승리를 하고 저래서 안 나가게 되는 그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불교를 해서 만든 영화이긴 하지만 그 이야기가 어쩌면 우리들에게 아주 유용한 그런 비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탐욕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이 허전한 이유, 자꾸만 비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 빈 마음에 자꾸만 다른 것들로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탐심이 자꾸 생기는데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겨 들어가게 되면 이 문제가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최고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릴 수가 있었다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의 것들을 욕심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서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탐심을 부리는 것에 대해서 죄라고 말씀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마음의 문제까지 이렇게 지적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탐심을 부리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를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탐심을 부리다가 결국 파멸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탐심을 부리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같아요. 이 세상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망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탐심을 누리고 탐심을 가지고 살게 되면 우리가 결국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히 피폐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탐심을 부리지 말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살라고 권면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늘 넘어져요. 그런 면에서 저도 넘어지고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도 늘 넘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죠. 예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또 주님의 보혈의 피로 저희들의 마음을 씻겨 달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힘주셔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