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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 26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신다(5:10-18)1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2: 제4계명은 안식일(오늘날의 금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의 기간)에 일을 하는 것을 금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일에 해당하는 지는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랍비들은 무엇이 일이고 무엇이 일이 아닌지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통해 답을 제시해놓았다. 이러한 규정은 미쉬나 안식일 편에 기록되어 있다. 일로 규정된 것들은 파종, 쟁기질, 수확, 단 묶음, 탈곡, 키질, 작물 세척, 체질, 반죽, 제빵, 양털깎기, 양털두들기기, 양털 염색, 실뽑는 것, 밧줄만들기, 새끼 꼬기, 두 실 짜기, 두 실 풀기, 두 바늘 코 꿰매기, 천 찢기, 사슴 사냥, 사슴 죽이기, 사슴 껍질벗기기, 사슴 소금에 절이기, 사슴 가죽 만들기, 사슴털 문질러 뽑기, 사슴 자르기, 두 통의 편지 쓰기, 두통 편지 쓰기 위해 글씨 지우기, 건축, 철거, 소화, 착화, 망치질, 물건 운반 등 39가지이다. 예레미야 17:21-223에는 안식일에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에 의하면, 자신이 누웠던 것(매트)을 들고 걸어가는 것은 일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율법을 어긴 사람을 향하여 옆에서 비난이 나왔다.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율법주의는 율법은 자신에게 적용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한 멸시와 비난으로 연결되고, 자신이 율법을 잘 자키는 것에 대한 교만한 마음으로 귀결되는 데, 이러한 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4: 38년 된 병자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예수님에게로 돌렸다.

5: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5: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을 어기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질문하였는데, 이는 안식일법을 어긴 사람이나 어기게 만든 사람이나 모두 다 안식일 법을 어긴 셈이기 때문이었다.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6: 하지만 그 사람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저 자신에게 다가와서 자비를 베푼 어떤 유대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예수님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예수님에 대해 알 기회가 없었다. 예수님이 피하신 것은 거기에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도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하였는데(6:22-26), 이는 사람들이 표적을 보지 못하고 그저 기적 자체(빵)에만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로부터의 적대적인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아직까지는 유대인들로부터 적대적인 반응이 없었다), 적극적인 환호를 피하기 위하여 자리를 옮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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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7: 나중에 예수님은 그 병자를 만났다. 예수님은 그에게 더 심한(나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단순히 병에서 해결되어 건강한 몸을 되찾는 것에 있지 않았다. 건강한 몸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다시 이 사람에게 오실 필요도 말씀하실 필요도 없었다. 그가 얻어야 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영적인 건강에 있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이야기하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쳐주는,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서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육신의 필요를 위해서만 찾을 때에는 피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죄와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곳(9:1-38)에서는 이러한 인과관계를 부인하신 바 있다. 성경에는 이 두가지 관점이 동시에 존재한다. 욥의 경우에는 죄와 관련이 없이 고통이 왔고 질병을 얻은 바 있다. 그러나 성찬을 함부로 하는 죄를 지은 자들 가운데에는 병든 자가 있었고 심지어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고전 11:29-30).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사람이 38년간 병으로 고통을 받은 것이 반드시 죄의 결과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죄를 짓은 것은 그 동안 겪었던 질병의 고통보다 더 심하고 나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땅의 이야기를 매개로 하늘의 이야기를 하시는 어법인 셈이다.

물론 이 세상에 고통과 질병이 온 것은 죄의 결과였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다. 하지만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하였고, 고통스러운 곳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죄의 문제의 해결은 결국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아픔도 없는 세상의 회복을 위한 것이다. 그 날이 다가올 것이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보여주신다. 그런 점에서 질병은 죄와 연관이 있다. 하지만 모든 질병과 고통을 어떤 죄의 결과로만 연결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죄와의 연관성이 부인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서는 우리가 죄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는 것이지만, 구체적인 케이스에서는 각각 다른 설명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9: 나음을 받은 그 사람은 유대인들을 만나서 자신을 고쳐준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그가 직접 찾아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은 사람이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고발하려는 의도가 있어서 찾아간 것인지 여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상식적으로 고발의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려는 것이었을 것이고,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호의적으로 볼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을 수도 있다.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도 짐을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자신을 고쳐준 이라고 하였다. 아무튼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 물론 이 사람의 반응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시각 장애인(9장)의 태도와는 결이 다르다.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10: 그 나음을 받은 사람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식일을 의도적으로 범하는 자로 낙인을 찍고 박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지만(3:2), 이들은 그점은 주목하지 않았다. 율법주의는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11: 그러한 박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안식하고 이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으신다. 이러한 선언은 창 2:212의 선언과는 정반대되는 선언이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신다는 것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유지하시는 것에서 드러나며, 안식일에도 아기가 태어나는 것에서도 들어난다. 그래서 유대교 랍비들은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일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집 안에서 집 밖으로 물건을 옮기시지는 않으셨다는 논리를 대면서.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든(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해주는) 일을 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유대교 랍비들도 인정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치유 사역을 정당화하셨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셔야 하는 것은 온 세상이 망겨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태초에 창조를 마치신 후에는 완성되어서 쉬셨지만, 죄로 인하여 세상이 망가져버렸다.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회복시켜야 할 일을 하셔야 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5: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3: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대답에 외려 더 반발하였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표현이 신성모독적 발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도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다. 결국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똑같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렇게 부를 때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의미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하셔도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 아닌 것처럼, 자신도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에서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수준에 올려놓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성모독의 죄이며,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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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2. ἔλεγον οὖν οἱ Ἰουδαῖοι τῷ τεθεραπευμένῳ Σάββατόν ἐστιν καὶ οὐκ ἔξεστίν σοι ἆραι τὸν κράβαττον[]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4. ὃς δὲ ἀπεκρίθη αὐτοῖς Ὁ ποιήσας με ὑγιῆ ἐκεῖνός μοι εἶπεν Ἆρον τὸν κράβαττόν σου καὶ περιπάτει[]
  5. ἠρώτησαν οὖν αὐτόν Τίς ἐστιν ὁ ἄνθρωπος ὁ εἰπών σοι Ἆρον καὶ περιπάτει[]
  6. ὁ δὲ ἰαθεὶς οὐκ ᾔδει τίς ἐστιν ὁ γὰρ Ἰησοῦς ἐξένευσεν ὄχλου ὄντος ἐν τῷ τόπῳ[]
  7. μετὰ ταῦτα εὑρίσκει αὐτὸν ὁ Ἰησοῦς ἐν τῷ ἱερῷ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Ἴδε ὑγιὴς γέγονας μηκέτι ἁμάρτανε ἵνα μὴ χεῖρόν σοί τι γένηται[]
  8.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9. ἀπῆλθεν ὁ ἄνθρωπος καὶ ἀνήγγειλεν τοῖς Ἰουδαίοις ὅτι Ἰησοῦς ἐστιν ὁ ποιήσας αὐτὸν ὑγιῆ[]
  10. καὶ διὰ τοῦτο ἐδίωκον οἱ Ἰουδαῖοι τὸν Ἰησοῦν ὅτι ταῦτα ἐποίει ἐν σαββάτῳ[]
  11. ὁ δὲ ἀπεκρίνατο αὐτοῖς Ὁ πατήρ μου ἕως ἄρτι ἐργάζεται κἀγὼ ἐργάζομαι[]
  1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13. διὰ τοῦτο οὖν μᾶλλον ἐζήτουν αὐτὸν οἱ Ἰουδαῖοι ἀποκτεῖναι ὅτι οὐ μόνον ἔλυε τὸ σάββατον ἀλλὰ καὶ πατέρα ἴδιον ἔλεγε τὸν θεόν ἴσον ἑαυτὸν ποιῶν τῷ θε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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