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요한복음 강좌 18

독생자를 주심(3:16-21)1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15절로 끝나고, 16절부터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덧붙인 설명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 여기서 세상이란 전 인류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세상은 죄로 인하여 더럽혀졌고 구제불능의 세상이다. 정상적으로 하면 완전히 심판하여 버려야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하시지 않고 도리어 사랑하셨다. “이처럼”(οὕτως)으로 번역된 단어는 “이렇게”라는 뜻이다. 얼마나 많이를 뜻하는 양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어떻게를 뜻하는 방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처럼”(οὕτως)이란 앞에 언급한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3:16보다 앞에 있는 내용 중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방식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보이는 게 없는 것 같다. 따라서 21:1처럼 뒤에 나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3.

“독생자”를 주셨다고 번역한 헬라어 원어는 “톤 휘온 톤 모노게네”(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인데, “모노게네스”를 “독생”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마치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었던 적이 있었는데, 탄생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된 것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태어날 “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노게네스”라는 단어가 “모노”(유일하게)와 “게네스”(태어난)의 조합으로 이루러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여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단어 “모노게네스”는 “유일하게 탄생한”이라기보다는 “하나밖에 없는”의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아들을 주신 이유는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영생이란 멸망하지 않는 것이다. 믿는 것(πιστεύω)은 단순히 인정한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전적으로 신뢰하고 나 자신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마음의 왕좌에 모시고 그분의 뜻대로 따르는 것까지 포함한다.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4: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보내어진 목적은 구원이지 심판이 아니다. 하지만 구원에는 전제가 있다. 3:16에서 표현한 것처럼, 예수님을 믿어야(즉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만일 받아들이지(믿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심판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3:18b에서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아들을 보내신 목적에 심판을 포함하지 않는다. 어둠이란 빛의 결여인것과 마찬가지로, 심판은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의 결여이다. 예수님께서 심판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는 구절이 있다(5:225, 30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근본적인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병든 자를 살리기 위해서 약을 개발하였다면, 그 약의 목적은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약을 거부함으로 죽게 되었다면 그 약이 죽인 게 아니라 먹지 않았다는 것이 죽음의 책임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살리기 위한 것이다. 비록 믿지 않고 결과적으로 죽음을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 목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

+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7: 예수님을 믿는 사람, 즉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심판은 결국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처하는 것인데,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과 같다. 영생이 이미 주어져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니다-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 즉 영원한 벌에 해당하는 선고를 받은 것이다.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8: 심판을 받게 된 사람들의 죄는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그 빛을 거부하고, 그 빛으로 나아오지 않은 것이다. 빛과 어둠은 여기서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물리적인 빛과 어둠은 가치중립적이다. 하지만 그 빛과 어둠은 선과 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악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로 오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렇게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를 그들이 악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9: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빛을 싫어한다. 빛이 자신들의 악을 드러내면 고스란히 다 들어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자신의 죄가 다 드러나는 것 같은 경험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십시오”라고 말해야 했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어전회의를 보는 그 순간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우리들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어렵다. 죄악된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으로 나아갈 때, 치료함이 있고 회복이 있다.

3: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10: 악을 행하는 자와는 반대로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나아온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선한 사람도 있다는 뜻일까? 자신이 선한 일을 했고 그래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빛 가운데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는 아닐 것이다. 빛되신 예수님이 오실 때 거부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전혀 소망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주님께로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다. 즉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나온다. 그들은 의로운 자라고 칭함을 얻게 될 것이다.

+

목차로 돌아가기

이전 강좌 읽기 – 요한복음 강좌 17 (니고데모, 3:1-15)

다음 강좌 읽기 – 요한복음 강좌 19 (세례요한의 고백, 3:22-30)

+

Loading

--[註]---------------------------
  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2. Οὕτως γὰρ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ὥστε 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ἔδωκεν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μὴ ἀπόληται ἀλλὰ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
  3. 콜린 G. 크루즈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란 장대 위에 들려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Colin G. Kruse, John. 배용덕 역, 『요한복음』(서울: CLC, 2013), 168.[]
  4. οὐ γὰρ ἀπέστειλεν ὁ θεὸς τὸν ⸀υἱὸν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ἵνα κρίνῃ τὸν κόσμον ἀλλ’ ἵνα σωθῇ ὁ κόσμος δι’ αὐτοῦ[]
  5.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6.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7.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οὐ κρίνεται ὁ δὲ μὴ πιστεύων ἤδη κέκριται ὅτι μὴ πεπίστευκεν εἰς τὸ ὄνομα τοῦ μονογενοῦς υἱοῦ τοῦ θεοῦ[]
  8. αὕτη δέ ἐστιν ἡ κρίσις ὅτι τὸ φῶς ἐλήλυθεν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καὶ ἠγάπησαν οἱ ἄνθρωποι μᾶλλον τὸ σκότος ἢ τὸ φῶς, ἦν γὰρ αὐτῶν πονηρὰ τὰ ἔργα[]
  9. πᾶς γὰρ ὁ φαῦλα πράσσων μισεῖ τὸ φῶς καὶ οὐκ ἔρχεται πρὸς τὸ φῶς ἵνα μὴ ἐλεγχθῇ τὰ ἔργα αὐτοῦ[]
  10. ὁ δὲ ποιῶν τὴν ἀλήθειαν ἔρχεται πρὸς τὸ φῶς ἵνα φανερωθῇ αὐτοῦ τὰ ἔργα ὅτι ἐν θεῷ ἐστιν εἰργασμένα[]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