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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악인을 보고 분노하지 말라

– 이국진

또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 13:24-30, 36-43)

3.2.1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악인을 제거하지 않으시는 이유

무신론자들이 항상 던지는 질문이 있다. 하나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인이 활개를 치고 다니도록 방치하고 계신가라는 질문이다.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이 계시다면 악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놔둘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무신론자들의 질문만이 아니라 성도들의 고민이고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시편 73편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항의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 73:1-9)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보통 다음과 같은 대답들이 제시된 바 있다. 우선 무신론자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이 세상에 악이 판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엉망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악이 판치도록 그냥 방치해둘 리 만무하다. 그런데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무신론자들의 대답이다.

두 번째 대답은 하나님은 선하시기는 하지만 전능하지 않거나, 전능하기는 하지만 선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면서 동시에 전능하시다면 이 세상을 바르게 만드실 것인데,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신론(理神論, Deism)의 대답도 있다. 이신론에 의하면 신이 이 세상을 만들기는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관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시계공이 시계를 만든 후에는 시계가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 세상이 신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지금은 신과 상관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엉망진창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대답을 내어놓는다. 하나님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선하시고 동시에 전능하시며, 지금도 이 세상을 다스리고 운행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여전히 악이 존재하는 것이며 악이 판치는 것일까?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비록 이 문제에 대한 모든 대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농부가 씨를 뿌린 후에 밭에서 가라지가 자라는 것을 보았다. 밭에 가라지를 뿌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가라지가 생겨날 수 있을까? 원수가 와서 가라지 씨앗을 뿌려놓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이 세상에 어떻게 죄악이 들어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그 악인들을 제거하고 이 세상에서 죄악을 제거하면 되지 않을까? 이에 대하여 농부는 지금 당장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종에게 대답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알곡마저 다치게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빈대를 잡다가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말처럼, 그리고 쇠뿔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는 뜻의 사자성어 교각살우(矯角殺牛)라는 말처럼, 괜스레 가라지를 건들었다가 알곡마저 다치게 될까봐 가라지를 그냥 내버려둔다는 것이 농부의 대답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만사가 다 때가 있는 것이다(전 3:1). 지금은 가라지를 뽑을 때가 아니다. 하지만 추수 때가 올 텐데, 그 때가 되면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일 것이고 가라지는 모아서 불에 태울 것이다.

이 비유에서의 유사점(tertium comparationis)은 농부가 지금 당장 가라지를 뽑지 않고 추수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악인들을 지금 당장 심판하지 않고 지금은 그냥 방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밭의 주인을 닮았다. 밭의 주인이 밭에 대한 모든 처분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밭의 주인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과 밭의 주인 사이에는 차이점 즉 대조점(tertium contrarietatis)이 존재한다. 우선 농부는 알곡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가라지를 제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당장 가라지를 제거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누구신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전혀 알곡 성도들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가라지같은 사람들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공의롭게 심판하실 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악인을 지금 당장 제거하지 않는 이유는 성도들을 다치지 않게 할 방법이 하나님에게 없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농부와는 다르다. 농부의 한계가 하나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비유에서의 유사점은 농부에게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 지금 당장 가라지를 제거하지 않고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지금 당장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농부의 이유와는 다른 이유인데, 이 비유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이 비유는 단순히 지금은 악인들을 당장 심판하지는 않으시지만 마지막 심판의 날이 있고 그 날이 되면 선인과 악인들을 구분하여 심판하실 것임을 말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악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찾으려면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찾아보아야 한다. 성경은 악인이 지금 당장 심판을 받지 않고 활개를 치는데도 그냥 내버려두시는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훈련하고 연단하고 시험하기 위하여 남겨두신다. 사사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민족들을 다 축출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남겨두신 영적인 이유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지 보시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악을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치셨다. 가나안 민족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압제하고 고통을 줄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돌아왔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라는 이방민족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치셨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기도 하셨다(렘 25:9). 그러니까 악인이 존재하는 이유를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우리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복지를 위해서 악인들을 그냥 남겨두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악인들의 존재를 볼 때에,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해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악인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내가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죄가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하고 철저하게 회개하며 돌이켜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3:8-9는 이렇게 기록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식물로서의 알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곡이고, 가라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라지이다. 이것은 변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식물과 사람의 차이점 즉 대조점이다. 한번 밭에 뿌려진 씨는 무슨 수를 써도 가라지가 알곡이 되는 법이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알곡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중에 가라지로 판명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정 반대로 처음에는 가라지처럼 보이던 사람인데 나중에 변화되어 알곡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변화되어 구원받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악한 것처럼 보이고 가망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당장 심판해버리면 손해일 수 있다. 아주 생생한 예가 바울 사도이다. 사도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는 아주 사악한 사람이었다. 사울이라 이름하는 그 청년은 교회를 핍박하던 교회의 원수 중의 원수였다. 만일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울이란 청년을 당장 심판하셔서 제거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교회는 더 이상 핍박이 없을 것이라 해서 기뻐했을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안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 청년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를 변화시켜서 세계 선교의 선봉장으로 활용하셨다.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멸망하는 것을 간절히 고대하였다. 그들은 아주 사악한 백성이었으니까 그러한 바람은 당연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도 사랑하셨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에스겔서에 기록되어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농부가 가라지를 지금 당장 뽑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알곡을 다치지 않고 가라지를 뽑아낼 능력이 그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인을 지금 당장 제거하지 않는 이유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멸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렇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고 계시기 때문에 악인인 우리가 지금 당장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가라지와 같은 사람들을 제거하시기로 하셨다면,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우리는 위선적인 모습을 하고 거룩한 척 하기 때문에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의 죄악이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망하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가 있다면 오로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심판의 날이 올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강하게 경고하고 계신 것처럼, 추수의 때가 되면 알곡은 모아서 곳간 안에 들일 것이지만 가라지는 한 데 모아 불사를 것이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즉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회개하는 것이 당연하다. 마치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는 사이에 도둑이 드는 것처럼 그 날은 우리가 예기치 못한 시간에 다가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나의 죄악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하셨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우리가 아직 심판을 당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있으면 안 된다. 내가 지금 알곡들 사이에 있다고 하는 사실로 안심해서도 안 된다. 심판의 날이 곧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회개하며 나아가는 자마다 용서해주실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두 번째로 기억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하여 진노의 심판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하신 일이 있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노의 잔을 부으셨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심판을 당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며,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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