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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악인에게서 난다(삼상 24:8-15)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사울이 굴에서 나갔을 때, 다윗도 뒤따라 나갔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외쳤습니다. 사울의 양심을 향해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한 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사울 왕의 대적이 아닙니다. 제가 왕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사울 왕 사이를 판단하시고, 공의를 이루어주실 것을 바랄 뿐, 제가 왕을 해하지는 않겠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대적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무찌른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이 아니라, 사울을 도와 이스라엘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변의 사람들 때문이었을 수 있습니다.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라고 다윗은 물었다. 즉 사울 주변의 사람들이 다윗에 대하여 모함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모함하는 자는 사탄입니다. 문제는 사울 왕이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서, 다윗을 조력자로 보지 않고 원수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간질은 사탄의 장기입니다. 사탄은 그 옛날 하와에게 접근하여 이간질한 적이 있습니다. 사탄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신다는 것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숨기고 계시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이간질에 하와가 넘어갔습니다. 그게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살아간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한한 축복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원수처럼 생각하고 마음을 닫게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문을 닫아버리게 한 것입니다.

사울도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습니다. 다윗을 믿고 신뢰하고 다윗과 함께 나라를 세운다면, 사울 왕은 아주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으로 평가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을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을 때, 사울 왕은 나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민족이 그릴라 백성들을 침공했을 때, 사울 왕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왕이 존재하는 이유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인데,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윗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는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동지였다면, 쓰지 않아도 될 헛심을 쓴 것입니다. 실패한 왕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함께 협력해야 할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양보하고, 서로 감싸주고, 함께 가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들은 사탄의 속삭임을 듣게 됩니다. 배우자를 원수로 대하라는 속삭임을 듣습니다. 그런 속삭임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이러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우리의 대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우리의 대적이 되고 맙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가 내게로 와서 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친구로 부르면, 친구가 됩니다. 다윗은 사울의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다윗을 친구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적으로 부르게 되었을 때, 사울은 다윗으로부터 친구의 도움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도우면서 신앙생활을 같이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의 이간질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가 서로 협력하는 동역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원수처럼 생각해서 싸우게 됩니다. 성도와 성도가 함께 돕는 조력자가 되어야 하는데, 원수처럼 대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탄의 이간질이라는 점을 알아채야 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함께 돕고 협력해야 할 운명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고,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원수로 간주하면서 죽일 듯이 덤벼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수들끼리 함께 협력하면서 어시스트를 해야 하는데, 자신의 경쟁자라고 생각하게 다른 선수가 골을 넣는 것을 시기하면서 어시스트를 하지 않으면, 그 팀은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주여, 믿음의 눈을 주옵소서. 사람을 원수로 보지 않고, 동역자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나와 다른 성향을 가졌다고 해서, 나보다 너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원수로 생각하거나 싸우려 든다면 결국 함께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을 원수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죽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갚는 것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고, 결국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해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았지만, 다윗이 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다윗도 사울처럼 사울을 원수로 생각하고 사울을 죽이려 달려들었다면, 함께 망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 승자는 사탄뿐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향해서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A. J. Muste라는 사람이 한 말 중에,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There is no way to peace. Peace is the way)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 전쟁의 방법은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같이 치고받고 싸울 게 아닙니다. 칼을 들이댄 사울이 이긴 것이 아니라, 칼을 들이밀지 않은 다윗이 승리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죽이려 달려드는 사울이 아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그런 사울을 죽여버리라고 충동질하고 미워하라고 충동질하는 사탄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이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바른 싸움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윗은 시편 109편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1-4) 다윗은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원수를 갚지 않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재판관들에게 달려갈 것이 아니고, 권세자들에게 달려갈 것이 아니고, 물질을 의지할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억울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답답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악은 악인에게서 납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악인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해야 선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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