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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회개(삼상 24:16-22)

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22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사울은 다윗의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자신을 향해서 전혀 해를 가하지 않은 다윗의 모습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사울은 울면서 다윗을 불렀습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이 장면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향해서 속삭입니다, ”네 힘을 보여줘“ ”네 본때를 보여줘“ ”네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너는 무시를 당하게 될 거야. 너를 깔보게 될 거야.“ 이러한 세상의 속삭임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소리부터 치기 시작합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속설이 우리를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얕잡아 보였다간 죽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잔뜩 허세를 부리면서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칼을 빼 듭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 칼을 빼 들었던 베드로처럼, 위협이 있을 때마다 무력으로 대응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무기를 빼 들고 공격 자세를 취합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싸움을 해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상대방이 제압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차 멸망하기만 할 뿐입니다. 내가 칼을 빼 들면, 상대방이 순순히 항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칼을 빼 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저항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8-39). 다윗이 행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효과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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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칼이 강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칼보다 강한 것은 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펜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을 손양원 목사님은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악했던 사람이 사랑의 원자탄 앞에서 굴복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항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또 한 손에 칼을 들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해서가 아닙니다. 종종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결혼을 허락하지 못한다고 위협하고, 취직을 할 수 없다고 위협하고(오직 신자만이 취업 가능한 방식을 통해서), 거래를 끊겠다고 위협하고, 진급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곤 합니다. 이러한 방법이 최고의 전도 방법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칼이나 무력으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굴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력을 사용하고 완력을 사용해서 우리를 굴복시키려면 굴복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우리들의 마음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사랑을 간청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악을 범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당장 심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옷깃조차 자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사울은 충격 가운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7절)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20-21절). 아주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모든 게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사울의 충격과 회개는 아주 극적인 것이었지만, 이것이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면,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나섭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다윗 앞에서 참회했던 것은 순 거짓말이었던 것일까요? 전혀 진정성이 없이 거짓으로 뉘우치는 척 연기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만으로는 지금 이때 했던 회개와 참회, 그리고 약속이 진정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진정성이 없었던 쇼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이 순간만큼은 진정으로 회개했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행동에 크게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크게 뉘우치면서 울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한번 회개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포로로 잡고 있던 사울을 그냥 순순히 놓아주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사울의 마음을 충동질해서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습니다. 이러한 예가 참 많습니다.

애굽 왕 바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릴 때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번복해버립니다. 그때 애굽 왕이 거짓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한 것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정성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마음이 바뀌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이런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부흥회를 통해서 또는 수양회를 통해서 큰 은혜를 체험합니다.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각오를 다짐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닌 겁니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성령 충만의 체험을 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단번에 끝내는 경기가 아니라 기나긴 마라톤과 같습니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대소변도 가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성장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의 경우 다윗을 통해 충격을 받고 회개했다면,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성결한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이 생략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버립니다. 마치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떠나갔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눅 11:24-26). 그러면 처음 형편보다 나중이 더 심하게 됩니다.

전과자들이 어느 날 은혜를 체험했다고 해서 함부로 성직자로 세워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때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유명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코미디언, 살인자, 도둑이 변화되어 목사가 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복음을 우습게 만들고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교훈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감독의 자격을 언급하면서 새로 입교한 자를 세우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딤후 3:6). 신앙은 한 방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은 오랫동안 성숙해져야 하는 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선 줄로 생각하면 망합니다. 한번 은혜받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은혜를 기억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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