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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 한 사울(삼상 19:8-10)

8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죽이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9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의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10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사울은 요나단의 말을 듣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심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 앞에서 악기를 연주할 때, 다시 사울은 악령에 사로잡혀 창을 던졌습니다. 과연 요나단에게 했던 사울의 약속은 전혀 진정성이 없었던 것일까요? 결과적으로는 진정성이 없는 헛된 서약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요나단 앞에서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던 바로 그 순간에, 속으로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 요나단에게 거짓으로만 말했던 것일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 당시 사울의 마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그 당시 사울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있습니다. 속으로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 요나단에게 거짓으로 맹세했을 가능성도 있고, 정반대로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다윗을 죽이려는 생각을 접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연약합니다. 한번 결심하면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한번 맹세하면 그 맹세를 그대로 신실하게 지켜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한번 은혜받으면, 그다음부터 모든 것이 바뀌고 새로운 사람으로 완전히 변화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수련회나 부흥회에 한 번 참석해서 은혜를 받으면, 단기 선교에 참여해서 충격적인 경험을 한 번 하면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란 너무나도 연약해서 정말 철저하게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단하고서도, 돌아서자마자 다시 옛날 죄악의 습성이 그대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고 해서, 급조로 목사를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새로 믿은 자를 함부로 직분자로 세우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딤전 3:6). 믿음은 드라마틱한 단 한순간의 변화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 동안 성숙의 과정을 밟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큰 낭패를 당할 뻔한 사건이 있었는데, 두 번 나옵니다. 한번은 애굽에서 그랬습니다(창 12장). 그래서 아주 큰 낭패를 당했다면, 교훈을 얻고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예전에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한 번 더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속였습니다(창 20장). 이게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 기록은 같은 이야기를 중복으로 기록한 문서를 편집한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이게 인생입니다. 또다시 반복하고 또다시 반복해서 죄를 짓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인생이 바뀔까요? 그 대답은 yes and no입니다. 한편으로는 완전히 거듭난 인생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었던 자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법적으로는(de jure) 말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실제적으로는(de facto) 여전히 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목사가 되거나 중직자가 되면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성의 모습이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한 방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을 갈망합니다. 어디 한 방에 살을 뺄 수 없을까? 어디 한 방에 우리 아이가 변화되어 정말 제대로 된 아이가 되는 방법이 없을까?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교회가 어디 없을까? 우리 교회를 살릴 어디 좋은 목사 없을까? 우리 아이의 학업 문제를 해결해줄 좋은 학교가 어디 없을까? 그런데 그렇게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 아무리 믿음으로 결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매일 죽어야 합니다(고전 15:31). 죽는다는 말은 내 의지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훈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진 것이 악령에 의해 사울이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기록하면서, 그 악령을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종종 수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만일 그 악령을 하나님께서 부리신다면 결국 죄에 대한 궁극적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며, 결코 사람들을 미혹하여 죄를 짓게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그런데 이런 위험한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아무리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한다 해도 그 시도가 성공할 수 없으며 여전히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있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뿐만 아니라 악인들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사용하시는데(잠 16:4), 그러한 악한 사람의 사악한 행동이 아무런 제약이 없이 맹위를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신 통제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악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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