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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정말 중에도(삼상 15:32-16:1)

32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33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은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오라 해서 찍어 쪼개 죽였습니다. 현대인들이 이런 구절을 읽는 것은 아주 불편합니다. 너무나도 끔찍한 장면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말렉 왕을 처형하는 것은 그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어떤 한 민족을 다른 한 민족보다 더 편애하여서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참고 또 참고 인내하다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아각을 끔찍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이 왜 이러시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악이 가져올 비참한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범하는 죄악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 의미 없이 던진 돌에 개구리는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것처럼,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행하는 잘못들이 가져오는 아주 끔찍한 결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달았던 비난의 댓글들이 연예인을 죽음의 나락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학교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왕따를 시킨 것이, 결국 같은 학교의 학생으로 하여금 비참한 선택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죄가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말렉 왕 아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잘못을 한 기억을 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의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사실은 그 아각의 자리에 우리가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셔야 했던 것은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한 채 저지른 죄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무엘이 직접 아각을 처형한 것은 사울 왕의 왕권이 무너졌음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의 사형 집행권이 중지되었고, 그 일을 사무엘이 직접 집행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고 슬픈 일입니다. 사울 왕을 세운 것은 백성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왕이 세워지면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이 있어야 그들을 적군으로부터 구원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는 진보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않았습니다(35절).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떠날 때, 아무렇지도 않으시는 무감정 상태가 아닙니다. 애통해하십니다. 근심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엡 4:30).

슬퍼하는 사무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16:1). 사울에게 모든 기대와 희망을 걸었던 사무엘의 충격은 컸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직접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기름을 부으면서 감격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비참한 결과가 빚어졌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슬픈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머릿속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세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는다니? 이런 생각들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아, 이미 희망이 사라져버린 사울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울의 실패가 정말 괴로운 것이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깊으신 뜻과 계획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기에 사울의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망가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을 왕으로 세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소망이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울을 세우시면서 사울이 답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망은 사람에게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도구나 사람을 과도하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도구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도구들과 사람들을 통하여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도구들과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람만 보거나 도구만 봅니다. 결국, 그런 관점은 실망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실패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한때 사용했던 사람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들어 쓰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길르앗 야베스를 암몬 사람 나하스의 손에서 건져내기도 하셨습니다. 아말렉을 물리치기도 하셨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후에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강대한 민족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왕을 잘 세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이 구세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나타나는데, 사람이 구세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언제까지 사울 왕을 위하여 슬퍼하겠느냐?” 사무엘이 낙망하고 슬퍼하고 좌절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 사울에게 소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왕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지만, 사무엘은 사람에게 소망을 두었던 것이고, 그것 때문에 낙망하는 것입니다.

사람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수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실패하고 넘어지고 망가져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저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은 다윗이 아닙니다. 다윗도 또 실패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실패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좋은 담임목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좋은 교인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뛰어난 정치 지도자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선동에 흔들리며 그들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정치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해답은 오직 주님에게만 있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소망입니다. 사울을 사용하시기도 하셨고, 사울이 실패했을 때에는 다시 다윗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 소망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이끌고 가시고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실패한 인류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만이 참된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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