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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삼상 16:2-13)

2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4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5 이르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렸지만, 다윗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는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이끌던 유명한 목회자들의 타락 소식들을 종종 듣습니다. 정말 모든 교회의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모범적인 교회들이 하나씩 둘씩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오늘날의 현상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쓰러져가고 목회자들이 넘어져 갈 때, 우리는 종종 충격에 빠지고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완전히 쓰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성도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들을 통해서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한 번도 문을 닫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초대에 생생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던 예루살렘 교회는 사라졌습니다. 선교의 전초기지였던 안디옥교회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도 사라졌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들을 보냈던 교회들을 이제는 거의 다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유럽의 교회가 아주 부흥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술집으로 팔려나가고 불신앙의 사조가 유럽을 덮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교회가 부흥했었지만 사그라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서도 엄청난 부흥이 있었지만, 한때 찬란했던 교회가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망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곳에서 또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단 한 번도 멈추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루터기를 남겨놓으시고 계속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나가시기 때문입니다(사 6:11-13).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새로운 왕을 선발하여 기름을 부어야 했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큰아들인 엘리압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를 보자 사무엘의 마음이 흡족하였습니다. 엘리압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그 용모와 키가 준수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겉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지만, 내면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성격이 얼굴의 표정에 나타나기도 하고, 자신감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그의 태도에 반영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엘리압의 용모와 키를 보았을 때, 사무엘은 듬직했을 것이고 흡족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셨습니다(7절). 그리고 엘리압의 중심이 하나님의 저울에 합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밖으로 보이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철저하게 보아야 합니다. 아쉽게도 우리는 내면보다 밖으로 보이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쏟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모양새가 좋은가? 그런 것들이 기준이 되고 모양새만 좋다면 다 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100% 완벽한 형식을 갖추고 외모를 꾸며도 내면이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바리새인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것 같았습니다. 율법의 조문을 하나하나 따져서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바리새인의 현상은 예수님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외모만 볼 수 있는 우리는 어떻게 진실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외모만 볼 수 있는 우리는 어떻게 엘리압에 속지 않고 다윗과 같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사무엘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여 주셔서 엘리압도 아니고 아비나답도 아니고 삼마도 아니고 나머지 다른 형제들도 아니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늘 아쉬움이 많은 선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다가 떠오른 생각이라고 해서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좋은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우선 겉모습의 화려함에 속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소위 스펙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스펙에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스펙에 눈길이 가는 순간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일부러 스펙이 나쁜 사람을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좋은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이 잘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 선택해주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다윗을 그렇게 선택해주신 것은 구원과 관련이 있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특별한 선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택은 바른 선택과 잘못된 선택의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잘 맞추어 나가는 노력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입니다. 불신자들은 바른 선택과 잘못된 선택이 있고, 바른 선택을 하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지만 잘못된 선택을 하면 모든 일이 꼬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주도 보고 궁합도 보면서 바른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책임을 상대방에게만 돌려버리려는 잘못된 삶의 태도입니다. 오히려 어떤 선택을 하든지 잘 맞추어 나간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7명의 아들 중에서는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건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후보에도 끼지 못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초대한 제사에 참여할만한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새는 다른 형제들은 사무엘에게 소개해줄 만했다고 생각했지만, 다윗은 그럴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하는데(12절), 그것은 좋은 평가라기보다는 아직 애송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엘리압이 지도자감이라면 다윗은 유약한 자처럼 보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얼마나 뛰어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이 연약한 자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고전 1:27-29). 그리고 이게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세상의 법칙은 우리가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습니다. 적자생존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계도 똑같습니다. 착하게 살고 완벽하게 살고 마음을 완벽하게 비워야 해탈한다고 불교에서 가르칩니다. 최고의 정성을 다해야 신이 응답한다고 미신에서는 가르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다릅니다.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세리와 같고 창기와 같고 고멜과 같은 우리에게 사랑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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