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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찾기(삼상 14:38-42)

38 사울이 이르되 너희 군대의 지휘관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 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40 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쪽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쪽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41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42 사울이 이르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제사장의 권면에 따라 사울 왕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해야 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했는지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어떤 방법으로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답답한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블레셋을 쫓아가서 박멸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누구에게 있는지 발견하고 싶어했습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종종 발견되는 사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후 아이성 전투를 하러 갔지만, 크게 패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전리품을 숨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글에도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 1:15) 시편 66:18에도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울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그 책임을 져야 할 희생양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울의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이성에서 패했을 때, 여호수아는 그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책임을 질 자를 찾아 나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지적해주셨습니다. 사울의 경우는 여호수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응답이 필요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그 책임을 돌릴 희생양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는 정말 큰 사건인데, 그 사건 앞에서 애통해 하면서 자신을 돌아본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빨리 죄인 색출해서 문제를 해결해버리고 그 하나님을 이용하여 전쟁에 승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한국 사회가, 그리고 한국교회가 희생양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신자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교회에서조차 희생양을 찾으려고 하는 사실이 아쉽습니다. 왜 우리 교회는 은혜가 없는가? 왜 이루 교회는 침체하는가? 왜 우리 교횐는 부흥하지 않는가? 이런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쉽게 희생양을 지목합니다. 그리고 그 희생양만 잡아버리고 다른 것으로 대치해버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만일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사울처럼 희생양을 찾을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사울 왕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저 수단에 불과합니다. 사무엘이 오지 않자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이유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필요했던 것뿐이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금식을 선포한 것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언약궤를 가지고 갔던 것과 비슷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면, 조급하게 누구에게 죄가 있는지 따질 것이 아니라, 조용히 기다려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어야 합니다. 응답이 없다면 전쟁을 하러 가는 길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희생양을 찾은 것은 전쟁이라는 목표는 일단 결정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제비를 뽑았더니 요나단이 뽑혔습니다. 정말 요나단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금식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금식의 맹세를 하게 할 때, 요나단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나단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단은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하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가 있었다면, 사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망령되이 여긴 죄가 큽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그저 전쟁을 이기게 하는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결국 백성들이 피째 고기를 먹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잘못 세워진 왕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을 힘들게 만들었고, 자신의 잘못인데 남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우는 한심한 왕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다 잘못 세워진 왕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나 권력이나 자식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것이 못됩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들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참된 왕으로 오셨습니다. 사울은 굶겼지만, 예수님은 먹이셨습니다. 사울은 죽일 희생양을 찾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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