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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은 범인이 아니다(삼상 14:43-46)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누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가를 알기 위한 제비뽑기에서 요나단이 뽑혔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비뽑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제비뽑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적이 있지만, 제비뽑기를 하기만 하면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 자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따지기 전에 자신의 죄악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희생양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요나단이 뽑히게 되었을 때, 사울은 적지 않게 놀랐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 요나단이 제비뽑기에서 뽑혔고,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죽여야 할 위기에 몰린 것입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잠 16:33)은 제비뽑기가 천편일률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아주 신비한 방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비뽑기라는 방식에 매여있는 분이 아닙니다. 제비뽑기만 하면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이 제비뽑기에 종속된 분처럼 생각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제비뽑기를 사용하는 것은 미신적인 행위입니다. 물론 요나단이 제비뽑기에 뽑힌 것은 크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이 범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비뽑기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한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게 된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은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해낸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제비뽑기는 영웅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렸고, 진짜 죄인은 그 잘못 속에 숨어버리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울은 요나단에게 추궁했습니다. “도대체 네가 무슨 잘못을 하였느냐?” 그러자 요나단이 대답했습니다.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입니다”(삼상 14:43). 형식적으로 보면 요나단에게는 사울의 맹세를 어긴 죄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금식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했는데, 꿀을 먹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사울이 백성들에게 맹세하라고 할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맹세를 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죄가 성립되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함께하셔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백성들이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삼상 14:45). 요나단에게 죄가 있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나단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울은 자신의 맹세와는 정반대로 요나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책임을 져야 할 범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울 왕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금식의 서원을 했지만, 그것은 신앙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잘못된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전쟁을 앞두고 군사들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허겁지겁 제사를 드렸던 것과 같은 행위였습니다. 또한, 문제는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배고픈 나머지 고기를 피째 먹었습니다(삼상 14:32-34). 그런데 엉뚱하게도 요나단을 범인으로 몰고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희생양을 찾는 것은 우리들의 고질적인 질병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잘못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우자 탓을 합니다. 교회 내에서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찾으며 서로를 비난하려고 합니다. 모든 잘못은 나를 제외한 그 어느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잘못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백성들은 요나단을 살리기 위해서 요나단을 변호했습니다. 사울은 정말 자기 자식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설마 정말로 자기 자식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그런데 사사기에서 입다가 자신이 했던 서원 때문에 딸을 죽였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사울도 옆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요나단을 죽였을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사울의 칼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백성들이 나서서 요나단을 구해냈습니다.

입다의 경우에는 말리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입다의 서원은 섣부르고 잘못된 서원이었고, 신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서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던 영적인 암흑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때에도 요나단을 위해 백성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입다의 딸을 위해 일어났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호해주셨습니다(요일 2:1-2). 요나단은 백성들이 일어나서 변호할 만했습니다. 요나단은 영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장점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마땅히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내어놓을 것이 없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변호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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