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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영적인 각성과 변화

김남준 목사님은 자신의 저서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의 변화라고 역설한다. 설교자들마다 설교를 좀 더 잘 전하기 위한 열망이 있지만, 정작 설교자 자기 자신이 변하려고 하는 열망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그의 메시지는 모든 설교자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그에 의하면 “설교자의 진정한 영적 변화 없이 설교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꿈”이다. 1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설교자와 훈련으로 만들어진 설교자”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2 그리고 설교를 잘 전하기 위하여 훈련을 하고 교육을 받는 것만 가지고는 제대로 된 설교자의 소명과는 거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3 물론 모든 설교자가 어떤 획일화된 영적인 체험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교자의 사역으로 부르셨다는 그런 영적인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김남준 목사님의 주장이다. 4 김남준 목사는 이 점을 자신의 책에서 계속에서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언급하는데,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설교자는 단지 강의실에서 공부하고 설교의 이론들을 습득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광야에서, 빈들에서, 외로운 섬에서 하나님과 대면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준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부르신 소명을 영적 체험 속에서 경험함으로써 설교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5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한편으로는 당연하고 마땅한 주장이면서도 설교자들의 영적인 체험을 부당하게 강조하는 잘못으로 흐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로 부르시는 것은 선지자들이나 사도를 부르시는 것과 같은 신비하고 특별한 영적인 체험을 반드시 수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말은 그냥 설교의 기술을 배워서 단순히 영혼이 없는 설교를 하는 것이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설교를 하면서도 그 마음에 그 설교를 반드시 전해야만 한다는 열정이 설교자들에게 없는 것이 오늘날의 문제이다. 설교자는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을 부르셨다고 하는 영적인 소명의식이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청중들을 보면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에서 멀리 떠나 있다는 사실을 애통해하는 마음이 있어야하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돌이킬 것인지 마치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이나 바울 사도가 다메섹으로 가는 갈에서 주님을 만난 것과 같은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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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는 청중들에게 하나님께서 전하실 메시지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하고 그 연구를 바탕으로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데, 그러한 과정을 통해 진지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를 그냥 제도로 만들어진 설교자라고 폄하할 것은 아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또한 청중들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진단을 통해서 무엇이 그들에게 영적으로 필요한지를 진단하는 것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설교자가 그냥 아무런 영혼이 없이 할 수도 있고 하나님 앞에서 진지한 영적인 관계 속에서 할 수도 있다. 김남준 목사님을 비롯하여 수많은 설교학자들이 지적하고 경계하는 것은 영혼이 빠진 채 기술로만 전하려는 위험한 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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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김남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생명의말씀사, 2009), 24.[]
  2. 김남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생명의말씀사, 2009), 29.[]
  3. 김남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생명의말씀사, 2009), 44.[]
  4. 김남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생명의말씀사, 2009), 52.[]
  5. 김남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생명의말씀사, 2009),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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