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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케룩스

설교자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하기를 원하는 메시지를 선포한다는 점에서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신하와 비슷하다. 왕의 명령을 받은 신하는 왕의 권위를 가지고 가서 어명을 선포한다. 비록 신하의 입이 그 말을 전달하지만, 그 신하가 전하는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왕의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설교(케뤼그마)는 설교자의 입으로 전달하는 것이지만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기를 원하신다. 1 이렇게 하나님의 메시지(케뤼그마)를 선포하는 자를 가리켜 케룩스(κῆρυξ), 즉 선포자라고 한다. 케룩스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두 번 사용되었는데, 한글 성경에서는 각각 “전파하는 자”(딤전 2:7)와 “선포자”(딤후 1:11)로 번역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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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룩스(선포자)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의 말을 대신하여 전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서 어명을 전달하는 자도 케룩스였고, 장군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도 케룩스였고, 주인의 명령을 하달하는 자도 케룩스로 불렸다. 특히 고대 전쟁에서 케룩스의 역할은 지대했다. 고대 전쟁에서는 전면전을 하기 전에 사자(使者, 케룩스)를 보냈다. 케룩스의 임무는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었다.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될 터인데 항복하라고 종용하는 것이 케룩스의 임무였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항복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우할 것이지만, 항복을 하지 않으면 모두 섬멸할 것이라는 경고를 포함하였고 항복을 위한 조건들도 포함하였다. 만일 항복조건을 받아들이게 되면, 두 나라 사이에 주종관계의 조약을 맺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항복조건을 거부하면 전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2 “네가 어떤 성읍을 공격하기 위하여 나아갈 때에는, 먼저 평화의 조건들을 제시하라”(신 20:10)의 규정은 이러한 케룩스의 역할을 보여준다.

구약에서는 요나가 케룩스의 역할을 담당했었다. 또한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케룩스의 역할을 담당했었다.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을 찾아가서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셨던 케뤼그마를 전하였다. 즉 40일 만에 니느웨 성이 멸망당할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이것은 전쟁을 앞두고 항복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성격이었는데, 니느웨 백성들은 그러한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완전히 백기를 들었다. 왕으로부터 짐승 미물에 이르기까지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항복했고 그 결과 하나님은 니느웨에게 샬롬(평화)을 제시하셨다.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요나는 케룩스의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 케룩스는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낸 자의 말을 하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이 케룩스의 역할을 담당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사자(使者, 케룩스)로서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탄의 백성들에게 와서 곧 다가올 영적인 전쟁을 경고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케룩스였던 세례 요한은 다가올 전쟁에 대해서 경고하고 항복을 제시하였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이것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였는데,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그냥 단순히 천국이 다가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격해오고 있다는 의미이고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회개하라는 항복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강력한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였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 세례 요한이라는 케룩스가 전한 케뤼그마를 들은 유대인들은 항복하였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근처의 모든 지역에서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회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항복조건을 받아들였다(마 3:5-6). 결국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평탄하게 함으로써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평탄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길을 닦는다는 이미지 3라기보다는 적군들을 제압하고 정복하는 이미지로 이해해야 한다. 이사야 43:2에서 “평탄하게 한다”는 표현은 적군을 정복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항복의 조건들을 제시하는 케룩스의 역할이나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신하의 이미지는 설교자에게 적합하다. 설교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대신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고, 그 메시지는 듣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반응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케룩스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를 능력 있게 전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4

하나님의 케뤼그마가 사람들에게 전달될 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은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다(마 3:6; 막 1:5).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를 듣고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 3:10)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들려진 것이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전하기 원하는 메시지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서 메시지를 전했을 때, 사람들이 물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그리고 사도들 앞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 그 메시지는 그냥 허공을 때리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령을 때리게 되어 있고 결국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게 되어 있다. 물론 항상 좋은 반응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케뤼그마를 전하는 것을 싫어하고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어두었다(행 4:1-3). 어떤 사람에게는 그 케뤼그마가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케뤼그마가 거리끼는 것이나 미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다(고전 1:23).

그런데 설교가 전해졌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보이지 않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설교자가 제대로 된 케뤼그마를 선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 더 나아가 모두가 좋아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 역시 제대로 된 케뤼그마를 전하지 않고 사람들의 귀에 즐거운 타협된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옛날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이 아합 왕에게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듣기 좋은 메시지를 전했던 것과 같다(대하 18:5). 사람들은 자신들을 축복해줄 제사장을 찾는다. 마치 미가라는 제사장을 들여놓고 축복을 구했던 단 자손들처럼 말이다(삿 17-18). 하지만 설교자는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설교자는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함부로 설교자가 되려고 할 것은 아니다(cf. 약 3:1). 전해야 할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 책임을 케룩스에게서 찾을 것이다(겔 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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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김남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생명의말씀사, 2009), 67.[][]
  2. G. Hugenberger, “Preach,”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vol. 3 (Grand Rapids: Eerdmans, 1986), 942.[]
  3. John Nolland, The Gospel of Matthew: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NT. (Grand Rapids: Eerdmans), 143.[]
  4. 김남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생명의말씀사, 2009),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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