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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함께하는 생각

[스크랩] 여성안수문제, 고신교회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 정주채

얼마 전에 화란개혁교회(해방파, 일명 31조파) 총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의 여성안수 안이 가결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총회에 참석한 유해무 교수는 자매교회와의 단절을 가져올 수 있는 이런 결의안을 부결시켜 줄 것은 간곡하게 호소했으나 결국 다수의 찬성으로 이 안이 결의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고신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이번 67회기 총회에서 31조파와의 자매결연을 해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결의가 이단적인 내용도 아닌데 서둘러 관계단절을 하기보다 진지한 연구부터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세계교회들에서 근본주의라고 비판을 받는 몇몇 교파들 외에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여성안수를 지지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믿지 않아서일까? 성경이 금한 일을 세상풍조를 따라 행하는 범죄일까? 왜 우리와 신학이 가장 가까운 31조파까지도 이를 허용하는 결의를 했을까?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근거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성경은 고전 14:34,35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과연 이 성경 말씀은 여성은 교회에서 직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는 말씀일까? 그런데 이 말씀을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일단 많은 신학자들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에게 보편적인 규칙으로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이 –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에는 여성들이 많았다 –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오용하고 공예배에서 질서 없이 행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이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냐 또한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36절)라고 책망하며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만 –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 성령을 받은 것처럼 은사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데 이런 혼란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니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명하신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바울 사도는 같은 서신에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면 기도나 예언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을 함의하는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고전 11:4-5) 이 말씀은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이미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와 예언을 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소개하면서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롬 16:3)고 하였고, 사도행전에서는 자신이 그들과 어떻게 만났으며 무슨 일을 동역했는가를 말씀하고 있다(행 2,18,26). 또 바울 사도는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5-28)고 선언했다. “하나”라고 해서 모두가 머리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가정공동체에서 남편을 머리로 세우셨다. 이는 어떤 공동체든지 질서가 있어야 함으로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이런 질서를 정해주셨다. 그리고 질서는 결코 인격적인 차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녀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동등하다. 다만 인류의 조상들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하와에게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저주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필자가 짧은 지식으로나마 여성안수 문제를 개략적으로 짚어보았다. 좀 더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혹시 여성안수 문제를 긍정적으로 거론하다가 징계를 당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염려할 교수나 목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리가 체계화되고 신학이 정립되기까지는 많은 연구가 있었고 피 흘림이 있었다. 지금은 이런 희생은 강요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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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성 안수 확실한 성경적 근거 확보하지 못했다 – 송영목

여성 목사 안수에 관하여 한글 요약 2003년경부터 여자 집사를 허용하는 남아공 개혁교회(GKSA)는 2016년 1월 12일부터 열린 특별 총회에서 여성 목사 안수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올 해 6월 중순에는 화란개혁교회(해방파)가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했다.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진영에서도 여전히 논란 중인 여성 안수에 대한 올바른 결정은 교단의 전통이나 상황적 필요가 아니라, 무엇보다 성경 주석적 연구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관련 신약 본문에 대한 주석적 연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서로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자부한다. 이 글은 여성 안수에 관한 역사적 고찰, 구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를 차례로 다룬다. 이 글에서 “여성 안수는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함”을 논증할 것이다. 들어가면서 앞으로 교회 사역은 목회자(klerikos)와 일반 성도(anthropos laikos) 간의 이분법적 구도가 아닌 열린 유기적 협업, 기계적 조직화보다는 건덕과 인격적 관계의 강화, 그리고 주종관계가 아닌 종의 리더십을 통한 역동적 제자화를 요청한다.1) 이를 위해 무엇보다 여성도의 재능과 역할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2003년경부터 여자 집사를 허용하는 남아공 개혁교회(GKSA)는 2016년 1월 12일부터 열린 특별 총회에서 여성 목사 안수건(이하 ‘여성 안수’)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2)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진영에서도 여전히 논란 중인3) 여성 안수에 대한 올바른 결정은 교단의 전통이나 상황적 필요가 아니라, 무엇보다 성경 주석적 연구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4) 특히 관련 신약 본문에 대한 주석적 연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서로 자신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자부한다. 이 글은 여성 안수에 관한 역사적 고찰, 구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를 차례로 다룬다. 이 글에서 “여성 안수는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함”을 논증할 것이다. 1. 여성 안수에 관한 역사적 고찰 유니테리언파(Unitarian)는 물론, 중앙집권화된 교회정치 체제 대신 개교회의 결정을 중요시하는 회중교회에서 여성 안수가 일찍 시행되었다.5) 20세기에 들어와서 스위스 개혁교회(1918), 프랑스 개혁교회(1949), 미국 장로교회(PCUSA, 1956), 화란 개혁교회(NHK[국가개혁교회], 1966; GKN[개혁교회], 1969; 해방파, 2017), 남아공 화란개혁교회(NHKA, 1976; NGK, 1990), 미국 기독개혁교회(CRC, 1995)6) 등 개혁파와 장로파에서도 여성 안수가 허용됐다.7) 한국의 경우 1907년 장로교 독노회가 조직될 당시 목사와 장로는 남성으로 제한됐다. 장로교 22회 총회(1933)에서 성진중앙교회 김춘배목사가 여성 안수를 청원했다가 철회한 사건이 있었다. 장로교 24회 총회에서 박형룡박사는 김춘배목사가 남성 안수를 2천 년 전의 특정 풍습으로 본 것은 잘못이며, 남성 안수는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했다.8) 1930년에 감리교회가 여성 안수를 허용한 이래, 재건교회가 최덕지 여전도사를 (명예) 목사로 인정했다(1951).9) 감리교(1930), 기장(1974), 예장 통합(1994), 예수교성결교(2003), 침례교(2013), 성공회, 루터교, 예장 대신(백석, 2009),10) 기하성(교단 설립 때부터), 하나님의 성회(순복음; 교단 설립 때부터), 구세군, 브니엘교회, 독립교회 등이 여성 안수를 시행 중이다.11) 이들 교회는 여목사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여성 총대의 비율을 높이려고 노력 중이다. 기독교연합신문의 여론조사(2016년 7월)에 의하면, 전국 신대원생 85%가 여성 안수를 지지하며, 여성 안수를 시행하지 않는 교회의 신대원생들의 찬성 비율도 과반이었다(참고. 고신대 신대원생 100%, 총신대 신대원생 52.5%, 합동신대원생 56.3%).12) 따라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교회에서 허용하는 것은 시간상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특별히 여성 안수를 불허하는 교회의 신학생들이 관련 본문에 대한 심도 깊은 주석적 연구를 접해봤는지 의문이다.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유교문화의 양존음비(陽尊陰卑)에 근거하여 가부장적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성향이 근본주의 교회에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13) 그리고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요인으로 ‘NCC여성위원회’와 같은 여권(女權)신장 단체의 활동과 더불어 WCC의 결정을 드는 경우도 있다.14) 여권신장과 상관없이, 미국의 경우 신식민지 지역에 여성의 선교 목회활동을 허락하게 된 것을 여성 안수의 계기라는 주장도 있다.15) 신앙과 세속 문화를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에 선 이들이 방어적인 전통적 신앙고백주의와 카이퍼의 반명제적(antithetical) 사상에 근거한 반(反)문화적 입장을 견지했다는 분석도 있다.16) 최근에는 여성 안수를 넘어,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LGBT)에게도 목사직을 허용한 장로교회도 있다.17) 종합하면, 여성 안수를 찬성 혹은 반대한 배경에는 유교사상, 여권신장 운동, 성경해석방법의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18) 2. 구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 창 1:26-28은 남녀의 평등성을 강조하기에 여성 안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19) 하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남녀평등이 여성 안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남녀는 동등하지만 상이한게 사실이며, 이것은 성 차별(sexism)이 아니라 성 구별이다.20) 그런데 여자가 남자의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으므로(창 2:18), 여자는 남자의 보조자 차원으로 열등하다고 볼 수 있는가? ‘돕는 자’(히. 에제르; 헬. 보에쏘스)는 이스라엘을 돕는 분이신 하나님에게도 적용되므로(참고. 출 18:4; 히 13:6), 여자의 열등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21) 여사사 드보라(삿 4-5), 여선지자 훌다(왕하 22:14), 여선지자 노아댜(느 6:14),22) 지혜로운 여인들(삼하 14:2; 20:16-22)을 통해서 볼 때, 비록 여성은 공직을 가지지 못했더라도 신적 권위와 지혜로 의미 있는 지도적 역할을 감당했다.23) 그리고 구약에서 여자는 회막에서 섬길 수 있었기에 제사장을 보조하는 역할도 감당했다(출 38:8; 삼상 2:22; 참고. 대상 25:5-6). 구약에서 여자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허용되지 않은 세 가지 이유는 짐승을 죽이고 제사를 드리는 고된 노동, 부정한 월경 기간, 그리고 이방 신전의 창기를 닮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24) 여성 안수 지지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용납하셨고(막 5:25-34), 많은 정통 유대인들은 요람에서부터 월경하는 여인처럼 부정하다고 사마리아 여인을 간주했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고(요 4:1-42), 현대 목사의 직무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수행하는 힘든 노동과 다르며, 신약에는 신전 창기(娼妓)의 문제가 사라졌기에 신약의 변화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 가운데 일부 특별한 경우에 여성이 활동한 것을 보편화시킬 수 없으며,25) 여성은 왕과 제사장같은 공적 사역에 종사할 수 없었다.26) 제사장은 선지자가 될 수 있었지만, 선지자는 (레위지파의)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제사장이 되려면 여성이 아니라 완전한 남성이어야 했다(레 21:17-21). 이 원칙에 근거하여 신약의 목사도 남성 가운데 선발되어야 한다고 적용하는 이가 있다.27) 이렇게 구약의 여성의 역할을 살펴본 것으로는 여성 안수의 성경적 의미를 결정하는데 여전히 역부족이다. 3. 신약성경에서 본 여성 안수 교회의 필요에 따라 여성 안수를 허용하거나 불허할 수 없다. 더구나 여성 안수는 페미니즘 운동에 좌우될 것이 아니라, 성경 해석에 근거한 결정이어야 한다. 복음서의 1차 삶의 정황인 AD 30년대에는 여성 안수에 관한 논쟁이 없었지만, 신약의 지역 교회가 설립된 이후 상활을 염두에 둔 바울 서신에는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교훈이 몇 번 나타난다. 신약 서신서에 의하면, 여성 안수는 구원론과 직결되지 않는 교회의 직제문제로 보인다.28) 그럼에도 여성 안수가 가볍게 취급될 주제가 아님은 이 주제는 성경관 및 성경해석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3.1. 누가복음 8:1-3 눅 8장의 여성들(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은 소위 ‘정착 제자’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다닌 제자들이었는가?29) 과연 이 여성들이 여러 지역을 다니신 주님과 동행했는가는 분명치 않다. 『개역개정』의 번역처럼, 1절의 12제자는 주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로, 2-3절의 여인들은 정착 제자들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1세기에 여성이 남성 스승을 장기적으로 따라다니면서 숙박을 같이했다며 큰 스캔들이기 때문이다.30) 누가는 남녀의 동등한 지위와 사역을 매우 강조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을 펼치시는 동안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무렵 한시적으로 동행했던 것 같다(눅 23:49).31) 그 당시 유대 랍비들은 여자를 제자로 삼지 않았지만(참고. 요 4:27) 여성의 후원을 받기는 했지만(참고. 유대고대사 17:33-45),32) 랍비와 달리 예수님은 측근의 여성을 훈련시키셨다. 그렇다고 하여 이 사실이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근거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12제자들은 모두 남성인데, 구약의 남성 제사장의 역할과 유사하다(참고. 롬 15:16).33) 주님이 남자 제자들만 선택하신 것을 1세기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양보’ 곧 여자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다니면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아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한 일시적인 현상인가?34) 물론 주님이 제자 선택 시에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신 것은 옳지만, 이런 특수 상황에 사도의 남성성이라는 규범성이 있지 않는가? 주님의 승천 이후, 복음을 공적으로 증거하고 초대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담당한 것은 남성에게만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구약의 선지자직은 일시적이었지만 남성이 담당한 제사장직은 종신직이었듯이, 남성 목사직도 종신직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가? 하지만 구약 제사장직이 아니라 선지자직이 신약의 목사직에 더 직결된다. 3.2. 사도행전 18장과 로마서 16:1 롬 16:3에 의하면 브리스길라는 바울의 ‘동역자’(쉬네르고스)인데, 이 명사는 목사였던 디모데(롬 16:21)와 디도(고후 8:23)에게도 적용되었다(참고. 빌 4:3의 유오디아와 순두게). 더욱이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가르쳤기에(행 18:26) 여성이 공적 직분을 맡아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가?35)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 차원이지 공적 설교가 아니다.36) 여성신학자들 가운데 겐그레아교회의 뵈뵈(롬 16:1-2)를 ‘사도’ 혹은 ‘교회의 대표자’(프로스타티스)로 보는 이가 많다.37) 그녀가 여자 감독이나 여집사(RSV, AEB, NEB)라는 주장도 있지만,38) 여집사인지 확실치 않으며 여사도로 보기는 더 어렵다. 그런데 슈라이너(T.S. Schreiner)에 의하면, 뵈뵈를 여집사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딤전 3:11의 여집사 제도와 일치하고, 롬 16:1은 디아코노스가 하나의 특정 교회와 연결된 유일한 경우이며, 그리고 여성이 아니라 남성 명사(디아코노스)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39) 하지만 딤전 3:11이 여집사를 지지하는 구절인지 여전히 논란 중이며, 뵈뵈는 겐그레아교회에서 비공식적인 다양한 봉사 활동을 펼쳤다고 볼 수 있으며, 헬라어 어법상 남성 명사가 여성을 대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다면 뵈뵈를 베드로의 장모처럼 사도를 ‘섬기는 자/일꾼’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참고. 마 8:15). 덧붙여 바울과 아볼로가 ‘일꾼’(디아코노스, 고전 3:5)으로 불리기에, 디아코노스라 불린 뵈뵈도 사도들과 동급의 사역자로 보아야 한다고 확대해석하지 말아야 한다.40) 왜냐하면 헬라어의 단어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독자적 문맥 속에서 적절한 한 가지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3.3. 고린도전서 11:2-16 고전 11장에서 여성이 예언과 기도하는 시간을 공예배 때로 볼 수 있지만(참고. 뒤따르는 11:17-34의 애찬/성찬),41)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기에 바울이 공적 모임을 염두에 둔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여자가 머리에 숄을 쓰는 것은(11:5) 바울 당시 (기혼 여성임을 표시하는) 로마 사회와 고린도에 국한되는 특수한 실재이지만, 여자(아내)가 자신의 머리(케팔레)인 권위와 지도력을 부여받은 남자(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영원한 원칙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11;3; 참고. 엡 5:23).42)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머리’를 ‘근원’(source)으로 본다면, 남자가 여자 존재의 근원이다(창 2:18-23). 하지만 성부께서 성자 존재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43) 성부와 성자는 동등하시지만, 성부가 성자에 대해서 권위와 리더십을 가지시므로 역할의 차이가 있다. 머리를 ‘권위’로 보면, 그 권위는 상대편의 필요를 섬기고 돌보는 것을 의미하지, 자기중심적인 권력의 남용은 아니다. 따라서 아내의 머리인 남편은 아내의 영적, 육적, 정서적 필요를 발견하고 돌보는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다.44) 참고로 로마의 남성들은 종종 토가(toga)의 느슨한 주름 잡힌 부분을 당겨 머리를 감쌈으로써 신들에게 경건한 제의적 예를 갖추었기에, 바울은 고린도의 남자 성도가 이런 이방 제의적 관습을 따르지 못하도록 머리 덮개를 사용하지 말라고 권면한다(고전 11:4).45) 물론 이 권면도 바울 당시에 국한 된 현상이다. 고린도의 미혼 여성의 표지로서 혹은 특별히 창녀들이 머리를 풀고 다닌 바울 당시의 특수한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그런 문화적 상황 속에/위에 영구한 규범과 원칙이 있을 것이다.46) 마치 삼위 하나님은 동등하시지만 성부가 성자의 머리이신 것처럼(11:3), 존재적으로 남여는 동등하지만, 역할에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다. 바울이 고전 11:9에서 타락 이전의 창조 질서를 언급한 것은 문화에 제약되지 않는 어떤 규범을 제시하기 원했기 때문이다.47) 그리고 신약에서 여성이 예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언자직과 목사/교사의 직분은 구분된다(엡 4:11).48) 즉 예언하는 이들 모두가 목사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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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울과 여성 – 최갑종

바울과 여성 -여성 안수문제를 중심으로- 최갑종(백석대학교 총장, 바울신학전공) 1. 서론 기독교가 태동된 주후 1세기 헬라-로마-유대사회는 남존여비사상(男尊女卑思想)이 팽배한 가부장적(家父長的) 사회였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예술, 종교, 사회의 모든 영역들을 남성이 주도하였으며, 여성들은 이들 영역들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다. 여성들은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남성들보다 하위급에 속한 자로 간주되어 성차별이 당연시되었으며, 남성이 있는 대중 앞에 나설 수도, 말할 수도 없었고, 거리를 나설 때는 얼굴조차 함부로 노출하지 않아야만 했다. 하지만 기독교운동이 시작되면서 남성위주의 헬라-로마-유대사회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는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여성들을 찾아갔고, 여성들을 만났으며, 여성들에게 이적을 베풀었고, 여성의 질병을 고쳐주셨으며, 그들을 자신의 하나님의 나라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시켰으며, 그들을 부활의 첫 증인들로 삼았다. 예수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운동을 헬라-로마사회에까지 확장시킨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적, 신분적, 성적 차별이 있을 수 없다”(갈 5:17),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는 혁명적인 선언을 하면서, 당시 사회와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을 초기 기독교운동에 적극적으로 불러들였으며, 여성들을 교회의 지도자나 자신의 동역자로 삼았다. 여성에 대한 예수와 바울의 자세와 가르침을 그 당대사회구조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놀랍고 혁명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기독교는 초기 시절부터 당대의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를 뛰어 넘어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인격으로 간주하였으며, 여성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구원의 은총과 은사와 교회의 제반사역에 있어서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다.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남성들과 함께 성령의 은사들을 받았으며, 함께 예배를 드렸으며,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고, 함께 말씀을 읽고, 듣고, 그리고 말씀을 가르쳤다. 하지만, 남존여비사상과 가부장적구조가 여전히 지배적인 사회구조 안에서, 어떤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성차별의 자유를 지나치게 확대시킴으로 인해 가정과 교회에 무질서를 초래하였고, 그로 인해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와 선교의 장애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을 경우에는 그들의 자유가 일시 제재를 받기도 하였다(고전 14:34-35; 딤전 2:11-15). 그렇지만 남녀의 동등한 인격과 역할을 지향하고 있는 기독교복음자체가 축소되거나 바꾸어진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복음은 가는 곳마다 여성들에게 새로운 자기인식과 자유와 도전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평등과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오늘의 평등과 민주사회가 형성되기까지 기독교의 지대한 역할과 공헌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사회만 하더라도 일백여년 전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근세기 한국 기독교지도자들은, 당시 유교의 남존여비사상과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도, 선교사들과 함께 여성을 교회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여성을 교육시키고 개화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이화학당, 호수돈 여고, 정신여고, 배재학당 등은 여성 교육과 여성 지도자 배출의 산실이 되었다. 따라서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남녀평등과 여성들의 인권이 법으로 보장되기까지 한국 기독교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정치, 경제, 과학, 문화, 교육, 예술 등 사회전반에 걸쳐 여성들의 진출과 활동은 과히 놀랄만하다. 여성과학자, 교수, 정치인, 기업인, 기술자, 교사, 군인, 의사, 법조인 등 남성이 관여하는 모든 영역에 여성들이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여성 장관, 여성 국회의원은 물론, 여성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초기의 한국교회가, 주후 1세기의 기독교가 헬라-로마-유대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성들의 인권과 자유와 역할을 확장시키는데 있어서 사회보다 항상 앞장을 섰었던 것에 반해,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여성의 문제에 있어서 한국사회를 선도해가고 있기보다도, 오히려 사회보다 뒤떨어져 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여성의 성직 안수(예를 들면, 여성목사와 장로직분)를 비롯한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는 문제이다. 여성의 성직 안수문제는 이미 지난 반세기 이후부터 한국 기독교 안에서 가장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오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어떤 교단 교회들은 이 기간 동안 교단의 금기사항으로 간주되어 왔던 여성안수문제를 허용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을 적극적으로 확대한 반면에, 어떤 교단 교회들은 여성안수문제를 교단의 신학 및 정체성과 결부시켜 계속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왜 한국 개신교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 문제를 두고 이와 같은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더 심각한 문제는, 여성안수문제를 포함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더욱 확대하려는 교회나 신학교 교수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여성의 안수 문제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단코 용납될 수 없다고 하는 교회나 신학교 교수들까지도, 똑같이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초대 기독교 공동체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단이든, 찬성하는 교단이든,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단의 소속교수이든, 여성안수를 지지하는 교단의 소속교수이든, 다 같이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자신들의 주장의 신학적 근거를 주로 바울서신에서 찾고 있다. 예를 들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교수들은 고린도전서 11:3의 남자는 여자의 머리임을 가리키는 본문, 고린도전서 14:34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는 가르침, 디모데전서 2:12의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가르침 등에 근거하여, 바울은 여성의 안수를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여성의 안수를 지지하는 교수들은, 갈라디아서 3:28의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하나이라는 가르침, 고린도전서 11:1-12의 주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다는 가르침, 바울이 자신의 선교와 목회현장에 브리스길라, 뵈뵈, 순두게 등 여러 여성 사역자들을 참여시킨 점 등에 근거하여, 바울은 여성의 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 동일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나 신약성경을 두고 이처럼 서로 상반된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가? 초대 기독교 공동체나 신약성경 자체가 이중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동일한 공동체나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인가? 만일 이해와 해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주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도 바울의 교회 안에서 여성 위치와 역할에 관한 주요 가르침을 헬라-로마-유대사회의 문맥과 관련하여 살펴봄으로써, 한국 개신교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토론되어 온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 문제, 특별히 여성의 성직안수문제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데 있다. 어떠한 연구도 전제와 방법론 없이 시작할 수는 없다. 여성의 안수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접근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해석학적 전제를 가지고 접근하고자 한다. 첫째, 바울의 서신들은 모두 영감(靈感)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시대와 문화와 환경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둘째, 바울의 서신들은, 영감(靈感)된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시대와 문화와 환경에 살았던 저자가, 그 시대와 문화와 환경에 살던 사람들에게 직접 주는 독특하고 개별적인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여 성도들을 향해 예배 때에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한 교훈이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한 교훈이나,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아의 집에 둔 겉옷과 가죽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는 부탁이나, 빌레몬에게 “나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라”는 부탁 등은,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살던 사람들이나 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이들 본문들은 “서로 사랑하라”, “성령의 인도를 따르라”는 본문처럼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직접 적용되어야 하는 규범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셋째, 바울 서신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해석자가 자신의 어떤 주장을 전제한 다음, 특정한 본문에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가서 그 본문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본문으로부터 저자가 그 본문을 통하여 자신의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본래 의도나 메시지를 끌어내는 것이다. 특정한 본문에 대한 해석은 그 본문의 상황적 적용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2. 바울의 콘텍스트(Context)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주후 1세기 헬라-로마-유대 사회 안에서 형성되었으며, 신약성경, 특별히 바울의 서신들은 일차적으로 그 시대에 살고 있는 헬라-로마-유대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다. 초대 기독교와 신약성경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예수와 바울도 유대인으로 출생하여 헬라-로마-유대 사회와 문화의 틀 속에서 성장하고 생활하였으며, 동일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예수와 바울 당대 헬라-로마-유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위치를 살펴보는 것이 요구된다. (1) 헬라 사회 고대 헬라 사회에서 남성은 그 신분과 존재에 있어서 원천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남성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여러 영역에 자유롭게 관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반면에, 여성은 이와 같은 남성의 영역에 관여할 수 없었고, 여성의 위치와 역할은 주로 가정에 제한되어 있었다. 여성들이 공회에 참석하여 투표를 하거나 말을 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주전 4세기의 아덴에서 여자들은 자신의 가까운 친척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얼굴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야만 했다. 심지어 처녀는 결혼하는 신랑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첫 번째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만 했으며, 결혼한 후에 남편이 자기 아내의 얼굴을 대중 앞에 노출시키게 될 경우, 그는 바로 자신의 얼굴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전적인 아덴의 법에 따르면, 아내 된 여자가 가정을 떠나 대중들 앞에 나서게 되는 경우, 그 여자는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부정한 여인으로 간주되어 이혼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대 헬라 세계에서 정숙한 여자들은 결혼 전에는 자기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그리고 결혼 한 후에는 자기 남편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일체 집을 나서지 않았다. 결혼한 정숙한 여자들의 경우 남편이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혹은 개인적인 유흥을 위해서든 집을 나설 때 따라가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부인이 남편이 참석한 파티장소에 동행하여 술을 마시게 될 경우, 그것은 남편과 자신에게 다 같이 수치스러운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창녀들만이 남자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 아래 복종하면서 생활하여야 했고, 결혼한 다음에는 남편에게 복종하면서 가사 일에 매여야 했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여야 했다. 그리고 집안에서도 외부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거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인의 방’으로 불리는 별채에 머물러야만 했다. 주전 4세기 중엽에 살았던 아폴로도루스(Apollodorus)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은 그 당시 사회 구조가 얼마나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는가를 보여 준다: “우리[남성]는 우리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젊은 여인들과, 매일 매일 몸을 돌보아 줄 하녀들과, 그리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가사 일을 맡길 수 있는 아내를 두고 있다.” 일종의 고급 창녀로 불리어질 수 있는 ‘젊은 여인들’은 남자들의 저녁 파티에 참석하여 남자들을 시중들고 성적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이러한 파티에 아내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 하녀들은 집안에서 주인 남자와 주인 여자를 시중들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가사 일을 담당하였으며, 그리고 아내들은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남편의 부재중에도 집안에서 가사 일을 전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자들이 부득이 집을 나서게 될 경우, 남자들에게 일체 말을 하지 않아야만 했다. 유리피데스(Euripides)는 “결혼한 여자[혹은 여성]가 젊은 남자와 함께 서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자, 특별히 결혼한 여자가 거리에서 젊은 남자와 함께 있거나 말을 하고 있을 경우,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여자나 창녀로 취급될 수 있었다. 1세기의 헬라 작가 플루타르크(Plutarch)는 [신부와 신랑에게 주는 충고]라는 책에서 ‘결혼한 여자는 집안에 머물러야 하며, 손과 발과 얼굴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신체도 일반 사람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아야 하며, 밖에서 말을 하지 않아야 하며, 매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여자가 밖에서 묻거나 말을 하고 싶을 경우 자기 남편에게만 하거나 남편을 통하여 말을 하여야 하며, 직접 밖에서 말을 하는 경우 그것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것이나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2세기 초엽에 디오 크리소스톰(Dio Chrysostom)은 거리를 나설 때 얼굴은 물론 몸 전체를 가리고 나서는 여인들을 자기 남편을 욕되게 하지 않는 정숙한 여인으로 칭찬을 하고 있다. 이처럼 고대 헬라 사회에서 여인들의 언행은 자신들은 물론 자기 남편들의 수치/체면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물론 바울 당대에 마게도니야의 여성들은, 우리가 사도행전 16:14-15과 빌립보서 4:2-3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고대 헬라 지역의 여성들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렸으며, 집안일은 물론 장사를 포함하여 시의 관리나 중요한 민중제사와 국가제사의 여사제로 일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여종들이나 여자 노예들은 일반 여자들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규범이나 제약에 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집안에 있는 여주인들을 대신하여 외부세계에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대중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샘에서 물을 길어오거나 기타 다양한 심부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자기 남편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야 하는 가난한 농부들의 아내들에게도 이와 같은 규범들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다수 헬라 여자들은 철저하게 남자들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며, 남자들이 하는 일에 함부로 관여할 수 없었다. 헬라 세계에서 여자들을 남자들에게 종속시키게 된 배경에는, 우리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 여자들은 존재론적으로 남자들에 비해 불완전하고 하급 존재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일반적인 세속적 영역에서 종교적 영역으로 방향을 돌릴 경우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는 점이다. 종교적 영역에서 헬라 여성들의 역할은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이다.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의 성적 불평등이 종교적 영역에서는 거의 사라진다. 여 사제들은 남 사제들과 똑같은 의무와 책임을 가진다. 모든 여성들은, 그들의 사회적인 신분에 관계없이, 성전의 모든 장소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기도와 제사행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여 사제들은 국가적인 제사를 직접 집전하였으며, 신탁의 전달자가 되곤 하였다. 그래서 헬라 사회의 여성들 가운데 종교행위 참여를 자신의 신분 상승의 기회로 삼는 자들도 있었다. (2) 로마 사회 고대 로마 사회에서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은 헬라사회의 여성들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었다.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사는 여성들은 자기 남편들과 함께 극장과 서커스단에 갈 수도 있었고, 남편들과 함께 연회나 파티에 참석하여 남자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도 있었고, 서로 대화도 할 수 있었다. 여자들은 물건을 사기 위해 자유롭게 시장에 갈 수도 있었고, 신전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신전을 찾아가거나 야외공연장을 찾아갈 수도 있었다. 교육받은 상류층의 여인들은 자기 가족들이 아닌 남자들과 지적인 담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그 밖에 부동산을 세를 주거나 사고팔기도 하였고, 시(市)의 여사제나 고급관리인이 될 수도 있었고, 유력한 정치인의 후원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법정에 나가 자신들에 관한 문제를 청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랜 전통과 관습을 따라야만 하는 대다수의 일반 여성들은 헬라 사회의 여성들처럼 남성에게 의존적이었으며, 그들의 활동도 남성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여성들은 합법적인 재산 소유자나 시민권자가 될 수 없었다. 로마 사회에서 여성의 덕목 중의 하나는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에 대한 복종이었고, 결혼한 다음에는 남편에 대한 복종이었다. 따라서 로마 사회의 여성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아버지와 남편이 사망하는 것도 그들에게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상실로 생각하였다. 아버지는 자기 딸의 결혼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고, 남편은 자기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고전적인 헬라사회의 여인들처럼 로마사회에서도 정숙한 여자들은 집안에서 가사 일을 하고, 남편의 재산과 하인들을 관리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헬라의 여성들처럼 집을 나설 때는 자신들의 정숙함을 나타내기 위한 표시로 수건을 써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설사 여인들 중에 사회적인 활동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독자적인 것이라기보다도 주로 남편들의 힘이나 가문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때때로 여자들도 시(市)에서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은 할 수 있었지만, 여자들의 자리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그것도 제일 마지막에 배정되었다. 물론 시골의 여인들이나 여 노예들은 헬라의 경우처럼 남자들과 함께 일하였다. 종교적인 영역에서 로마의 여성들은 헬라의 여성들보다도 훨씬 더 자유롭지 못했다. 사실상 종교의 영역에서 로마의 여성들은, 그들이 시민사회에서의 영역에서 누렸던 자유와 비교해 볼 때, 지나칠 정도로 제한을 받았다. 헬라의 여성들과 달리 로마의 여성들은 종교적 영역에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여인들은, 심지어 여 사제들도, 동물들을 도살하여 드리는 희생제사에의 참여가 배제되었다. 간혹 모든 여성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종교축제들이 열리곤 했지만 여성들의 축제에서는 짐승의 희생제사가 배제되었다. 그러나 헬라종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로마의 종교에서도 헬라종교에서처럼 여 사제들과 여신들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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