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스크랩] 개혁주의 신앙과 여성 안수 – 이광우

최근 <뉴스앤조이>에 ‘여성 목사 안수는 비성경적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여성 안수 문제가 단지 여성 사역자들의 ‘안수’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지금까지도 안타깝게 지속되는 ‘여성 차별’로 인한 ‘여성 인권유린’ 문제와 깊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문제 제기가 너무 늦은 것에 대해 우리 주님의 귀한 ‘여종들’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과 하나님 아버지께 회개하는 마음을 담아 쓴 글이었다. 아울러 차세대 교회의 기둥이 돼야 할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쇠퇴하는 주요 요인이, 교회가 ‘여성에 대한 인식’ 측면에서 ‘아주 낙후된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가슴 아픈 판단도 있어서였다. 많은 반대를 예상했지만, 글을 발표한 뒤로 뜻밖에 찬성하는 의견이 아주 많다는 것을 다양한 경로로 확인하게 되어 하나님께 무척 감사하고 있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원고를 기꺼이 받아 준 <뉴스앤조이>(강도현 대표)는 물론, 깊은 관심을 갖고 보도해 준 CBS TV(최경배 기자), <국민일보>(강주화 기자), <기독교종합신문>(박기성 대표), GOOD TV(권현석 기자) 등 기독교계 여러 언론사와 강력한 지지 성명을 내준 총신여동문회(김희정 회장)에도 고마운 뜻을 전한다.

뒤로멈춤앞으로
얼마 전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에서 유명 복음주의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베스 무어가 “남성 우위론이 성경의 진리”라고 가르쳐 온 것에 대해 사과하자, 미국 보수 신학계가 순식간에 ‘불난 호떡집’이 됐다. 반면에 무어의 주장을 뜨겁게 반기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박영호, 2021:151) 여성 문제에 대해 미국 교회가 깊이 ‘생각’할 기회를 줬다는 점에서 무어의 정직한 고백은 큰 의미가 있다. 무슨 일이든 ‘생각’이 바뀌어야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어야 ‘법’과 ‘제도’를 바꿀 수 있는 것인데,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사울(바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 특히 신앙인들이 수십 년간 ‘전통적으로’ 지녀 온 ‘생각(교리)’을 바꾸는 일은,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어설프기 그지없었던 내 글을 읽고 그토록 오랜 세월 갖고 있던 ‘생각과 교리’를 단번에 바꾼 교계 지도자들이 뜻밖에 무척 많다는 사실을 곳곳에서 확인하면서,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지닌 하나님의 종이요, 주 안에 있는 소중한 ‘동역자’라는 것을 새삼 느낌과 동시에,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친히 이끌고 계심을 더더욱 확신하게 됐다. 주 예수님을 거침없이 배신했던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사례에서 보듯이, 잘못된 ‘생각’을 바꾸고 ‘방향’을 신속하게 되돌리는 것도 우리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에 뿌리를 둔 탄탄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글에서는 최대한 ‘신학적 논쟁’을 비껴가며 글을 썼으나,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으로서 많은 이가 여전히 궁금해하고 어려워하는 몇 가지 쟁점을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를 느껴 부득이 바쁜 시간을 쪼개 글 한 꼭지를 더 쓴다. 하나님나라의 본질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담긴 생명·구원·사랑·정의·평화를 땅끝까지 전파하는 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여종’과 ‘남종’이 함께 손을 맞잡고 힘차게 전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 글이, 늦게나마 예수님의 거룩한 몸인 교회 내 ‘여성 안수’ 문제를 포함하여 ‘여성 차별’로 인한 ‘여성 인권유린’ 문제 해결의 신선하고 정직한 출발점이 된다면 참 좋겠다.

이번 글에서는 ‘여성 안수’가 ‘개혁주의 신앙’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물론 학술 논문이 아닌 이상(그래도 독자들을 위해 중간중간 꼭 필요한 ‘내주’와 맨 끝에 참고 문헌 목록은 붙여 뒀다) 세밀한 논증보다는 쟁점이 되는 몇몇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학적 ‘결론’을 주로 간략하게 소개할 생각이지만, 성경 본문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아서 치밀한 논증이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좀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이 글이 오랫동안 차별당해 온 교회 내 여성 교인들과 여성 사역자들께 하나님께서 친히 내미시는 따뜻한 위로의 손길이 되고, 골치 아픈(?) 여성 안수 문제로 아직도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유익하고 의미 있는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아무튼, 18세기 케케묵은 봉건시대도 아닌데, 전 세계적으로 각 전문 분야에서 탁월한 여성들의 활약이 눈부신 이 광명한 시대에,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을 선도해야 할 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인 교회 안에서 시대의 흐름에 한참 뒤처지는 이런 글이나 쓰고 앉아 있는 내 처지도 참 한심하고 딱하기 그지없다.

1. 창세기 1장 26~28절: 인간(남자와 여자) 창조
① 하나님의 형상: 남녀 한 몸

지면 사정상 핵심만 요약하자면, 위 본문 가운데 창세기 1장 27절은 히브리어의 3단 평행법으로 기록돼 있다. 이 본문에는 ‘창조하다’라는 말이 세 번 쓰였는데, 우리말 번역 성경에서는 그중 하나가 생략됐다. 하지만 NIV 영역본은 히브리어 원문을 잘 살려 ‘created’라는 말을 명확하게 세 번 쓰고 있다.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아래 배열해 놓은 우리말 성경 27절의 구문 구조를 보라.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히, 바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 사람 –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동안 ‘하나님의 형상'(이광우, 1993:21-23 참조)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논문과 책이 많이 나왔지만(참고 문헌 목록 참조) 우선 이 히브리어 평행법을 바탕으로 본문의 구문 구조를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형상 = 사람 = 남자와 여자(한 몸: 공동체성)”

이것을 보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공동체(한 몸)’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나용화, 33-39) 여성 안수 문제와 관련된 성경 본문을 살피는 사람들은, 이 기본 틀이 가지고 있는 대전제를 절대 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곧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셨다(창 1:31). 일곱째 날에 안식(창 2:1-3)하시기 전, 남자와 여자가 창조된 이 여섯째 날(히, 욤)에 하나님은 이 남자와 여자를 보시며 ‘심히’ 흡족해하셨다. 한마디로 남자와 여자의 ‘한 몸’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 하나님의 형상이 곧 ‘남자와 여자’이기에, 자신의 ‘형상’인 그들을 보며 삼위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셨다는 뜻이다.

② 남자와 여자: 생일이 같다

한 가지 더, 신약 바울서신에서 전통적인 여성 안수 반대론자들이 특히 즐겨 인용하는 본문에 남자·여자의 창조 순서를 언급하는 대목이 더러 있어 미리 짚어 두는데, 남자와 여자는 여섯째 날에 창조됐다는 사실, 곧 ‘생일이 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쉽게 말해서 남자·여자의 창조 순서라는 것이 그냥 ‘이란성쌍둥이’의 출생과 엇비슷하다는 이야기다. 창세기 2장 18절 이하의 여자 창조 기록은, 이 쌍둥이 창조와 관련하여 ‘반쪽'(다음 항목의 ‘돕는 배필’에 대한 설명 참조)인 남자의 또 다른 ‘반쪽’으로 창조된 여자의 ‘본질’을 설명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쌍둥이의 출생 순서가 두 사람을 ‘차별’하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정말 없으리라 생각한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들이 누가 먼저고 누가 나중인지를 오늘의 개신교 보수 교단 신학자들처럼 교회 안에서 평생 치열하게 다투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우스운 짓인지 한번 생각해 보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심히 좋아하셨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반쪽’인 남자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다(창 2:18)고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한다. 그래서 그를 돕는 또 다른 ‘반쪽’인 여자를 창조하여 그들을 한 몸으로 만들기로 삼위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

2. 창세기 2장 18절: “돕는 배필”
① 돕는 배필 = 반쪽

창세기 2장 18절의 “돕는 배필”로 번역된 히브리어(에제르 + 네게드)를 직역하면 ‘마주 보는 짝’이고 약간 의역하면 ‘가장 잘 어울리는 짝’이다. NIV영역성경에서는 우리말 성경보다 약간 세밀하게 “helper suitable for(어울리는) him”으로 번역했고, KJV와 ASV 영역본에서는 “an/a help meet for(마주 보는) him”으로 번역했다. 따라서 요즘 부부 사이에 자주 사용되는 ‘반쪽’이라는 말이 사실상 이 히브리어의 본뜻에 가장 가깝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이들이 히브리어 원문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한글 번역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여자를 단순히 ‘남자를 돕는 이’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른다”는 창피한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돕는 배필’을 ‘반쪽’으로 이해하고 18절을 다시 읽어 보면 이런 뜻이 된다.

“아담이 ‘반쪽’으로 사는 것이 ‘좋지 않다’.”

여기서 “좋지 않다”는 말은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의 평가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섯째 날, 즉 같은 날 반쪽인 아담의 또 다른 반쪽을 지으셨고, 그 둘을 일컬어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씀하셨던 것(창 1:26-28)이다. ‘반쪽’과 ‘반쪽’이 만나 한 몸 되게(창 2:24)하셨고, 한 몸 된 그들을 보며 ‘심히’ 기뻐하셨다(창 1:31). 그러기에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오는 창조주이신 삼위 하나님의 ‘우리’라는 호칭처럼, 아담과 하와의 ‘서열’이나 ‘계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성’과 ‘동등성’ 그리고 ‘상호 의존성’을 가리키는 것이다(삼위일체론 관련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다시 말하지만 동등한 남녀 반쪽들이 만나 ‘한 몸’을 이루고 서로 동등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 바로 이런 남녀의 하나 됨을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셨던 것이다.(강호숙, 2016:104-108)

② 하나님: 우리를 ‘돕는 분’

여자가 남자를 ‘돕는'(히, 에제르) 배필(짝)이기 때문에 남자가 ‘우선’이라는 허튼 생각을 하는 이들은, 구약성경이 여러 곳(출 18:4, 신 33:7, 시 20:1-2)에서 이스라엘을 ‘돕는'(히, 에제르) 분으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창 2장 18절에 기대어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를 돕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만 못한 분’이라는 결론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들 말대로 만약 그것이 ‘질서’라고 한다면 그런 ‘질서’를 도대체 무슨 질서라 할 수 있을 것인지 솔직히 무척 궁금하다. 남녀 둘이 ‘한 몸’이 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삶(이것을 예술 이론에서는 ‘형상화’라고 하지만, ‘형상화’라는 개념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기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런 삶을 살아 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셨다. ‘진흥왕순수비’나 ‘광개토왕릉비’ 혹은 우리나라 관공서에 예전에 걸려 있던 몇몇 ‘대통령의 사진’에서 보듯이, 이 ‘형상’은 누군가의 ‘통치권’, ‘통치 범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충만하라·정복하라·다스리라”(창 1:28)라는 삼위 하나님의 명령이 바로 이 ‘형상’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한 몸 된 사람의 ‘소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 몸인 여자와 남자가 이 기능을 잘 감당할 것을 기대하셨기에, 남녀 한 몸이자 자신의 형상인 아담 부부를 보시며 삼위 하나님께서 심히 좋아하셨던 것이다.

3. 창세기 3장 16절의 재해석
① 창세기 3장 16절의 전통적인 성경 해석

한 가지 더, 창세기 3장 16절과 관련해 확인해야 할 성경 해석학적 문제가 있다.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기독교가 여권신장에 가장 큰 공헌을 했음에도(박영호, 2021:152) 여전히 여성 안수를 반대하며 여성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이들은 이 본문의 우리말 번역을 문자적으로 무척 좋아하여, “여자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여자를 다스려야 한다”고 꿀떡같이 믿고 있다. 그래서 여자(아내)는 평생 ‘남편 바라기’로 살고 남자(남편)는 아내를 다스리며 사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함부로 주장한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오기 전 18세기 조선 시대라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들한테는 이름도 지어 주지 않고 공부도 안 시키며 삼종지도三從之道, 칠거지악七去之惡, 열녀烈女, 수절守節 같은 비인간적인 족쇄를 채워 집안에 가둬 놓고 조신하게 십자수十字繡나 놓게 하면서도, 양반 한량들은 축첩畜妾에 수시로 기방妓房을 출입하는 것이 마치 사내대장부의 미덕인 듯 여겼던, 도덕적으로 푹 썩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아무튼지 성경 해석 능력이 부족하면 흔히 이런 식의 엉뚱한 오해를 하게 되고, 그 오해를 바탕으로 줄기차게 비인간적이고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게 돼 있다.

② 올바른 히브리어 구분 분석

내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나를 가르쳤던 저명한 구약학 스승 교수님께서는 “이 본문은 히브리어 평행법과 관계있다”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어 평행법에서 앞뒤 구절이 같은 내용일 때는 두 구절에 있는 낱말을 하나씩 교차해서 생략할 때가 있다” 하셨는데, 나는 은사님의 그 탁월한 관점과 해석이 성경 66권의 ‘통전적 경륜’, ‘하나님나라’의 궁극적 지향점(새 하늘 새 땅)에 비추어 훨씬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아래 괄호 속에 있는 낱말이 히브리어 평행법에서 ‘교차 생략’된 것으로 추정되는 낱말들이다.

“너는 남편을 (다스리기를)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리기를 (원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창세기 3장 16절 본문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등 관계’에서 ‘힘겨루기'(창 3:5, “하나님과 같이 되어”, 가장 원초적인 죄: 하나님 노릇하기, 갑질)를 하게 된 것이 범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라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타락으로 인한 죽음을 걷어 내기 위해 피조물인 사람의 몸을 입고 참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사역, 그로 인한 구원 이후의 남녀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 타락한 상태 그대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이들이 입맛대로 본문을 해석하는 방식대로 한다면, 18세기 때처럼 여자는 마냥 한평생 ‘남편 바라기’로, 남자는 여자를 계속 마구 ‘다스리고 차별하며’ 독재자처럼 사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인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남녀 인간, 하나님의 자녀, 천국 백성에게 정말 합당한 삶,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천국 시민의 삶인지 정직하게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③ 대속 사역의 효력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우리 곁에 오심(임마누엘)’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사탄이 하늘에서 쫓겨났고, 세상의 썩은 질서가 회복됐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새 창조’ 질서가 세워졌다. 모든 장벽이 무너졌다. 심지어 성전의 휘장도 위에서 아래로 갈라져 남녀 구분 없이 모든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마 27:51, 히 4:16).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여성을 존중하시고 여성들의 굴레를 벗겨 주신 것이다(요 4:1-42 참조). 예수님의 대속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십자가와 부활인데, 비겁한 남자 제자들은 십자가 처형의 참혹한 현장에서 다 도망쳐 버렸어도 여성 제자들은 십자가 아래 남아 흐느끼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사흘 뒤 감격스럽게 부활의 첫 소식을 전파하는 기독교 역사상 중차대한 일을 하나님이 여성들에게 허락하셨던 이 엄청난 사건의 의미(박영호, 2021:162-163)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못난(?) 여성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그 잘난(?) 남자 사도들은 또 어떻게 그토록 쉽게 믿을 수 있었을까? 사도 바울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 목사는 또 어떻게 여성인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통해 신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까? 여성을 사람 취급하지 않던 시절에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이혼을 단호히 반대하셨던, 당시로서는 아주 혁명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예수님의 대속 사역으로 모든 ‘막힌 담’이 허물어졌는데(엡 2:14, 히 4:16), ‘여성 차별’, ‘여성 인권유린’이라는 장벽만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인가? 만약 그 장벽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아주 ‘불완전한’ 것이 될 텐데, 예수님의 ‘완전한’ 대속 사역을 그렇게 신성모독적인 자세로 평가절하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4. 여성 사역자 드보라는 ‘이류 사사’인가?
① 갑자기 드보라는 왜?

뜬금없이 여성 사사 드보라(삿 4) 이야기(박유미, 121-124)를 꺼내는 것이 좀 의아할 것이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에서도 여성의 지도력을 큰 폭으로 인정하고 있어서(박영호, 2021:153) ‘여성 지도자’ 문제를 다룰 때 우리가 반드시 참고해야 할 중요한 인물이 구약의 여성 사사 드보라이기 때문이다. ‘드보라를 누가 세웠는가’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께서 여성 지도자를 세워 쓰실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아주 중요한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J. J. Davis, 17-18) 언약 공동체에서 여성 지도자의 역할, 그리고 바울이 창조 본문을 사용한 것과 관련하여 드보라라는 여성 사사 사례는 특히 이 여성 안수라는 주제와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

② 여성 사사 드보라는 지도자가 아닌가?

성경은 그 당시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일하고 있었다고 말한다(삿 4:4). 그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드보라의 종려나무”로 이름 붙여진 나무 아래서(B. Lindars, 183) “사사로 사역”했고,(R. Boling, 95)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았다”(삿 4:5). 성경 저자는 그가 사법적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드보라의 활동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솨파트(심판하다)는 모세(출 18:13)와 사무엘(삼상 17:6)의 재판 활동을 설명하는 분문에도 똑같이 쓰였다.(박유미, 85-125 참조) 모세 율법(신 16:18-20)에 따라 각 지파와 성읍에 임명된 사사들은 공의를 공평하게 집행하고 “하나님 여호와”(신 17:12)와 그분의 ​​권위를 대표했다.

③ 드보라는 사사 시대의 ‘두 번째 모세’

로빈 데이비스가 최근 논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모세와 드보라 사이의 유사점은 아주 많고도 놀라울 정도다.(R. E. Davis: J. J. Davis 18-20에서 재인용) 두 사람 다 재판을 하기 위해 앉았고, 백성이 그들에게 나아왔다(출 18:13, 삿 4:5). 둘 다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다(출 7:16, 삿 4:6). 둘 다 선지자였다(신 18:15, 삿 4:4). 둘 다 축복을 선포했다(출 39:43, 삿 5:24). 둘 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도 선언했다(신 27:15, 삿 5:23). 둘 다 남성 군인 장군(여호수아, 바락)을 이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여호와께서 원수를 어떻게 물리칠 것인지 백성에게 지시했다(출 14:14, 삿 4:6). 두 경우 모두, 주님은 병거를 탄 원수를 공포에 떨면서 달아나게 하셨다(출 14:24, 삿 4:15). 모세와 여성 사사 드보라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가, 먼저는 산문散文으로(출 14, 삿 4), 그다음으로는 시詩로(출 15, 삿 5) 성경에 아름답게 기록돼 있다. 모세(그리고 미리암, 출 15:1)와 드보라(그리고 바락, 삿 5:1)는 백성들이 큰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이스라엘을 인도했다. 사사기에서 드보라는 시내산의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얻은 “두 번째 모세”로 어엿하게 등장한다.(R. E. Davis, 2006)

④ 여성 사사 드보라는 누가 세웠는가?

드보라라는 여성은 디모데전서 2장 12절 말씀을 근거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전통적인” 해석에 특별한 난제를 제기한다. 전통적인 여성 안수 반대론자들의 주장처럼, 바울이 창조 기사를 인용한 것이 모든 여성이 언약 공동체에서 남성 위에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하나님께서 여성 지도자를 세워 쓰신 일)을 분명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이것은 정경 자체 내에서 아주 심각한 모순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회피해 보려는 시도들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드보라가 권위를 정당하게 행사하지 않고 제멋대로 나서서 그것을 ‘찬탈’했는가?(딤전 2:12에 사용된 낱말 ‘아우뗀테인’에 대한 설명 참조) 여성인 드보라는 이스라엘에서 ‘이류 사사’였는가?(B. Lindars, 134) 사사기나 구약 전체나 신약에 하나님께서 드보라의 활동을 승인하지 않으셨다는 표시는 전혀 없다. 반대로 여성 사사 드보라가 세워진 일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그들을 구원하는 사사들을 일으키셨다”는 사사기 2장 1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방침에 관한 진술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그의 지도력은 정확히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하게 권능을 받은 활동의 아주 주목할 만한 사례다. 여성인 드보라의 지도력은 분명히 다른 남성 사사들과 마찬가지로 지파의 경계를 초월하여 이스라엘 전체에서 널리 인정받았다.(박유미, 85-125) 드보라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고 여성 사사 드보라를 따랐던 이스라엘의 남성 지도자들은 책망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을 받았다.

⑤ 드보라는 긍정적인 여성 지도자 모델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의 의미는 드보라가 언약 공동체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여성의 부정적인 본보기가 아니라(W. Grudem, 133) 매우 긍정적인 본보기라는 것이다.(강호숙, 2020:274-278) 드보라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주도적이던 구약성경 역사의 시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소 이례적이고 예외적인 사례로 보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성 사역자의 아주 긍정적인 본보기다. 하나님께서 친히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셨고, 아울러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므로, 교회사적 맥락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행사하는 것 역시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결코 아니다. 긍정적인 예로 보이는 드보라의 경우로 볼 때 나중에 확인하겠지만 디모데전서 2장 12절 말씀처럼 모든 여성이 교회에서 항상 남성 위에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은 아니다. 여기 제시된 이런 성경 독법은 ‘성경 내 모순’의 껍질을 벗겨 내고, 때때로 그 백성을 인도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또 다른 ‘드보라들’, 또 다른 여성 지도자들을 기대할 수 있는 해석학적 공간을 아주 넓게 제공한다. 아래 인용하는 민수기 11장 29절, 사도행전 2장 17~18절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민 11:29b, 모세의 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행 2:17~18)

하나님께서 여성 지도자 드보라를 이렇게 분명히 불러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셨다. 이렇듯 그분의 여종·남종을 때에 맞게 적재적소에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이 원칙이 ‘신약 시대’라 해서 달라지거나 변했다고, 아니 구약 시대보다 오히려 후퇴했다고 혹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5. 삼위일체론: 삼위 하나님의 ‘질서’?
더 가관인 것은 “삼위 하나님 사이에도 ‘질서’가 있지 않으냐? 성자께서 성부에게 복종(?)하지 않으셨냐?”고 강변하는 한심한 자들도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을 “나무(신 21:23)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마 27:22)고 선동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왜곡된 신학 전통과 그릇된 확신, 그리고 ‘기득권’을 사수하려는 ‘권력욕’은 그토록 무섭고 위험한 것이다. 오늘날 여성 차별(인권유린) 문제에 대한 교회 내부의 전통적으로 왜곡된 ‘남성 위주’ 신학적 관점도 마찬가지다. 신성神性을 지니신 하나님과 죄로 부패한 본성을 지닌 피조물을 일대일로 나란히 놓고 보는 ‘신성모독적 관점’의 한심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성人性을 입으시고 우리 곁에 오셔서(성육신) ‘온전한 참인간’으로서 공생애 기간에 지상地上에서 ‘하늘’ 아버지와 긴밀히 소통하셨던 사실을 악착같이 남녀 차별의 근거로 삼는 것은 아주 완악하고 한심한 오만과 무지의 결과다.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성부께서 성자를 이 땅에 ‘파송’하셔서 성자가 대속 사역을 완성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한번 물어보자. 그렇다면 성부께서 성자를 파송하셨듯이, 피조물인 남자가 역시 피조물인 여자를 언제 어디로 파송한 적이 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 있는 남자들(목사·장로)이 여자 교인들을 언제 어디로 파송했는가? 백 걸음을 양보해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어디론가 파송했다 치고, 그렇게 해서 교회에서 도대체 무슨 거룩한(?) ‘질서’가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인가. 설마, 많은 교회에서 대체로 그렇듯이, 공예배 순서를 맡겨 놓고도 여성 교인들은 상上 강단에 올라가지도 못하게 하고, 교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여성 성도들을 한복 곱게 입혀서 교회 현관에 일렬로 세워 놓고 손님들께 90도로 인사하며 생강차나 나르도록 하는 것, 여성 교인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강대상 청소와 주방 설거지나 실컷 시키는 것이 소위 ‘개혁신학과 보수 신학’이 내세우는 교회 안 남녀 ‘질서’의 본질이라 끝끝내 생각하는 것인가. 한마디로, 메시아(성자 하나님)께서 ‘남자’가 아닌 ‘여자'(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오셨던 명백한 사실을 남자 목사·남자 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을 무슨 논리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몹시 궁금하다.

6. 열두 사도 중에 여자는 없었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열두 사도 중에 여자가 없었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하는데, 그것은 과거 조선 시대 봉건사회처럼 여성을 사람 취급하지도 아니하여 ‘법정 증인’ 자격도 주지 않던(박영호, 151-165) 참혹한 시대에, 생명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이나 다름없는 예수님의 ‘임시 선교 전략’의 결과였음을 정말 헤아리지 못하는 것인가. 어느 유대교 랍비는 유대인 남자들에게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것,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 세 가지를 감사하라고 가르쳤다 한다. 여성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그런 사회적 배경 때문에 ‘오병이어의 이적’ 현장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가 여자와 아이들은 뺀 오직 유대인 성인 남자만 헤아린 것이라는 것을 신학교에서 귀에 못 박힐 정도로 배우지 않았던가?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이 얼마나 천대받고 있었는지 신학을 공부하면서 똑똑히 배우지 않았던가? 만약 예수님이 ‘문화 충격’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당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해 사회에서 ‘법정 증인’의 자격도 받지 못했던 여성들을 사도로 세웠다면, 오늘과 같은 기독교 복음의 세계화가 그토록 발 빠르고 눈부시게 이루어졌을 것 같은가. 이런 사정(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부득이한 임시 조치)은 신약 서신서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헬라 문화권에서 아내가 남편을 ‘퀴리오스'(주)라 부르는 관행이 있었는데 베드로 역시 이 관행을 용납했다(박영호, 2021:160)는 점(벧전 3:6)이나, 분명히 악하고 비인간적인 제도임에도 ‘귀족 – 평민 – 해방 노예(리버디노) – 노예’라는 계층 구조가 아주 자연스러웠던 1세기 사회문화(박영호, 2021: 171) 속에서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이 모든 계층이 섞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박영호, 2021:180) ‘노예제도’에 대해 사도들이 명확한 지침을 주지 않고 있는 점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열두 사도 중에 여자가 없었다”는 말을 하는 이들 중에 혹시 ‘남자 목사’를 ‘사도’급으로 여기고 싶은 교만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 헌법 4장 1조 ‘목사의 의의’에도 그런 표현은 아예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열두 사도직은, 구약의 열두지파에 상응하는 새 언약의 기초로서, 반역의 땅에 교회의 터를 세우기 위해 예수님의 속도 조절용 임시 선교 전략에 따라 ‘오직 유대인 남자에게만 주어졌던 한시적인 직분’이었는데, 그 사도직을 근거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철저하게 이방인인 자신(한국인)을 유대인으로 혹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솔직히 오늘 우리나라 남성 목사들 중에 사도 자격을 갖춘 유대인은 단 한 명도 없지 않은가.

7. 상충하는 말씀: 고린도전서 11장 4~5절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① 여자도 예언(설교)하라(고전 11:4-5): 바울의 ‘남성 머리론’ 중도 포기

1세기 헬라 문화권의 신전 제사와 기독교회 예배의 중요한 차이는 ‘평등’, ‘하나 됨’을 강조하는 것이었다.(박영호, 2021:210-212) 아무튼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받든 사도 바울이 말하는 여성상, 그 핵심에도 예수님이 설파하신 ‘새 창조 질서’의 원칙이 녹아 있고, ‘남녀 동등성’, ‘상호 의존성’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성경을 정말 정직한 눈으로 깊이 들여다본 이들이라면 함부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울의 가정생활 지침에서도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복종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오히려 남편에게 더 큰 의무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박영호, 2121:153) 아울러 고린도전서 11장 2~12절에서, 원래 골수 율법주의자(바리새파)였던 사도 바울(빌 3:5)이 과거 조선 시대의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처럼 식사도 따로 할 정도로(박영호, 2021:156) 남녀가 한자리에 있는 것은 정말 꿈도 꿀 수 없었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섞여 앉지는 않았겠지만) 남녀가 한 공간에서 예배하도록 하고, 여성들도 ‘토라'(성경)를 자유롭게 읽도록 허락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지 않은가.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인도를 받아 “여자들도 단정한 복장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예언(설교)하라”고 지시했다(고전 11:4-5). 헬라 사회의 공적인 자리에서는 여성들이 머리를 가리는 것이 관행이었고, 복음의 표현은 늘 문화의 변동과 함께 그 위치를 설정해 왔기에(박영호, 2021:152-158) 교회 안에서 덕스러운 복장을 갖추도록 여자들에게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권면하는 과정에서 잠시 ‘남성 머리론’를 꺼냈다가,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는 점(고전 11:12)을 깨닫고는 ‘남성 머리론'(고전 11:7-9)을 그만 중단하면서 결국 남녀를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전 11:12b)는 것을 결론적으로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 단락에서 바울이 내린 이 결론(고전 11:12)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과도 그 뜻이 정확히 일치한다(김세윤, 83-86).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신학자 김세윤 박사께서 정확히 지적(김세윤, 76-89)하셨듯이, 바울이 문화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속도 조절’을 주문하려고 한 말, 오히려 당시 교회에서 여성들이 활발하게 지도력을 행사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말씀(박영호, 2021:164)인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35)는 한 구절만을 똑 따와서 남성만의 목사 안수가 ‘성경적’이므로 여성 안수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바울이 ‘은사론’을 펼치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의 앞부분인 고린도전서 11장 4~5절에서 조금 전 인용한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을 기반으로 교회 밖 사람들에게 욕먹지 않도록 “여자들도 교회에서 단정한 복장으로 예언(설교)하라”고 지시했던 분명한 사실은 또 어떻게 설명할지 정말 궁금하다.

② 상충하는 구절: ‘저작 목적’과 ‘큰 문맥’ 살펴야

고린도전서 11장 4~5절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처럼 서로 상충되는 구절이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그 책의 ‘저작 목적’을 이해하고 좀 더 큰 문맥에서 하나님나라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살피는 것이다. 요즘 웬만한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가 고린도교회 내부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 쓴 편지라는 것을 다 안다. 따라서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은사론’을 다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말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어떤 상황을 문제 삼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았을 것이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잘 알아들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바울도 편지에서 더는 구체적인 진술을 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있는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고린도전서 11장 4~5절에서 “여자들도 단정한 복장으로 예언(설교)하라”고 했던 말(원칙)을 뒤집는 ‘모순된’ 진술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이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

③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성 안수 반대 근거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34~45절 말씀은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근거 구절이 될 수 없다. 구약의 요엘서 2장 28~29절 말씀에서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중략)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라는 약속이 오순절에 성취(행 2)돼, 남녀 구분 없이 성령 세례를 받은 이들이 목숨 걸고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달려 나가 헌신함으로써, 극동 아시아 한반도 남쪽에 사는 이방인인 오늘 우리한테까지 이 소중한 구원과 생명의 복음이 전해졌다. 이런 속담이 있다.

“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잠든 척하는 사람은 절대 깨울 수 없다.”

앞서 지적했듯이 요즘 웬만한 교인들도 고린도전서가 고린도교회라는 특정 지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교정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쓴 편지라는 것은 다 안다. 그런 편지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딱 한 구절(고린도교회 내부에서 골칫거리가 된 특정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사도의 부득이한 임시 조치, 그것도 고린도전서 11장 4~5절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을 본문의 전후 문맥과 전혀 상관없이 문자적으로 읽고, 그것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받들며 ‘여성 목사 안수 불가’를 외치면서, 정말 소중한 동역자인 여자 성도들을 차별하며 여종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발휘하지 못하도록 사역을 한사코 방해하는 이들은 고린도전서의 그처럼 뻔한 저작 목적을 정녕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마냥 잠든 척하는 사람처럼 알면서도 그냥 끝끝내 그것을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8.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핵심 낱말의 번역 오류
아주 뜨거운 쟁점의 원인이 되는 까다로운(사실은 그다지 까다롭지도 않지만) 본문인 만큼 우선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본문을 한번 천천히 읽고 시작하자.

“11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쟁점이 되는 부분 강조 – 필자)” (딤전 2:11~15)

① 여성 안수 반대론자들에게 듬뿍 사랑받는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말씀

전통적인 여성 차별론자들은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말씀을 근거로 여성 안수를 ‘당당하게’ 반대한다. 특히 12절의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라는 말씀이 여성 안수 반대론자들의 마음에 쏙 드는 아주 사랑스런(?) 말씀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J. L Duncan & Susan Hunt, 69-82) 이어지는 13~14절에서 바울이 인용하는 창세기 기록을 읽으면서 그들의 그런 확신(?)을 더더욱 확고하게 굳히는 것처럼 느껴진다.(J. J. Davis, 15-17 참조)

② “주관하다(권위를 행사하다)”(딤전 2:12): 어휘 의미 변천사적 ‘번역 오류’

12절의 ‘주관한다(권위를 행사한다, have authority over)’라는 중립적인 의미로(G Knight III, 145) 잘못 번역된 헬라어 ‘아우뗀테인(아우뗀테오)’은 신약성경과 70인역 구약에서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아주 독특한 용어다.(J. J. Davis, 15) 따라서 이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낱말의 ‘의미 변천사’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성경에는 이 낱말의 다른 용례가 전혀 없기 때문에,(L. Belleville, 214-217) 를랜드 윌셔는 1988년에 이 낱말과 어원이 같은 아우뗀테스(authentes)의 ‘329개 사례’를 일일이 찾아 세밀히 검토한 결과, 1세기 이전부터 아우뗀테인이 “지배자(독재자)”, 심지어는 “살인” 혹은 “범죄를 저지르다”와 같은 매우 부정적인 어감을 지니고 있었던 점을 밝혀냈다.(L. Wilshire, 120-134) 이것은 어떤 점에서 난해 구절인 디모데전서 2장 11~15절(특히 12절) 본문을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하는 정말 눈부신 학술적 성과다. 이어지는 바울 시대, 아니 심지어는 16~17세기까지의 대다수 성경 번역[주후 2~4세기의 ‘구-라틴어판성경’, 주후 4~5세기의 ‘벌게이트역본성경’, 1560년 판 ‘제네바성경’, 1589년 판 ‘비숍스성경’, 1611년 판 ‘킹제임스성경'(KJV)]에서도 이 낱말을, “권위를 행사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가 아닌, 아주 부정적인 의미의 “(독재자처럼) 지배하다·찬탈하다”라는 뜻으로 거의 일관되게 번역해 왔다는 사실도 이미 확인됐다.(L. Belleville, 209-210)

③ “아우뗀테인”: 17세기 이후 갑자기 ‘권위를 행사하다’라는 중립적 의미로 변화

아울러 “권위를 행사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에로의 변화(영문판 NIV·NASB에서도 이 말을 중립적인 의미의 have/exercise authority over로 번역. ASV에서는 have dominion over로 NIV나 NASB보다 조금 더 부정적인 느낌으로 번역)는 바울 시대 훨씬 뒤인 후기 교부 시대에 기독교가 공인되면서부터 그런 번역의 조짐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가부장적인 조선 시대에 여성들이 외출할 때 쓰던 ‘쓰개치마’처럼, 비잔틴 시대에 여성들이 외출할 때, ‘베일’로 얼굴을 가리거나 남녀가 따로 나뉘어 생활했던 당시 사회문화적 남녀 차별의 관행이 짙게 반영된 탓으로 보인다.

언어(어휘)는 생명을 지닌 유기체와 비슷하다. 언어(낱말)는 마치 사람처럼 생겨나기도 하고 어느 순간 사라지기도 하며, 혹은 의미가 계속 추가되고 변화하면서 꽤 오래 살아남기도 한다. 우리말에서 예를 들어 보자. ‘적당히’라는 말은 원래 ‘정도에 딱 맞다’라는 아주 긍정적이고 좋은 뜻이었으나, 요즘 어떤 경우에는 ‘눈치껏 대충대충’이라는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도 많다. 가령 오늘 누군가가 글을 쓰면서 ‘대충 해 둬라’ 혹은 ‘제발 그만 좀 하라’는 뜻으로 “적당히 하라”는 말을 했다면, 몇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 말을 작가의 본뜻과 다르게 ‘정도에 딱 맞게 하라’는 ‘적당히’의 본래 의미로 해석해 버리는 이가 틀림없이 나올 것이다. 물론 이 예는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경우다.

현대 히브리어·헬라어와 전혀 다르게, 고어古語 수준을 넘어서서 이미 사어死語가 됐다고 여겨지는 성경 원어 속 어휘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성경에 있는 낱말의 이런 의미 변화가 성경 해석에서 치명적으로 중요할 때가 있는데, 디모데전서 2장 12절의 ‘아우뗀테인’이라는 낱말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왜냐햐면 이 낱말을 바울 당시와는 전혀 다른 뜻을 지닌 18세기 이후 형성된 ‘권위를 행사하다: 주관하다’라는 중립적인 개념으로 “여자들이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하면, 반대로 “남자들이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허락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아주 넓게 열려 버리기 때문이다.

④ “아우뗀테인”: 번역어 원래대로 되돌리기

반면에, 적어도 바울이 이 낱말을 썼을 당시(무려 17세기까지의 각종 성경 번역)의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번역에 반영하게 되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져 버린다. 당시의 부정적인 의미를 살려 좀 과격하게 본문을 번역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여자들이 독재자처럼 지배하는(찬탈하는) 자세로 남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까처럼 이 부정적인 의미가 포함된 문장을 남자 입장에서 뒤집어 해석하면 “남자들은 독재자처럼 지배하는(찬탈하는) 자세로 가르쳐도 된다”는 매우 고약한 뜻이 되어버린다. 오늘날 이렇게 독단적이고 옹색한 주장을 속 편하게 받아들일 신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바로 이런 이유로 17세기 이후 “독재자처럼 지배하다(찬탈하다)”라는 이 낱말의 부정적인 뜻을 희석해서 ‘권위를 행사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로 슬그머니 바꿔치기해 버린 것이다. 누가 그처럼 못된 짓을 감쪽같이 시작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그렇게 하면 “남자들이 권위를 행사해야 한다”는 해석을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고, 그 해석을 바탕으로 ‘남성만의 목사 안수론’을 부담 없이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대의 영어 번역 성경이나 우리말 번역 성경이나 한결같이 이런 식으로 이 낱말의 잘못된 번역을 반영한 탓에 본문 해석 과정에서 요즘처럼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결론적으로, 디모데전서 2장 12절의 “권위를 행사하다”라는 말은 어휘의미 변천사 관점에서 볼 때 번역이 아주 잘못됐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이 말은 아주 부정적인 의미 “독재자의 지배·찬탈” 심지어 “살인” 혹은 “범죄”라는 뜻까지 지닌 아주 부정적인 의미의 낱말이었음을 분명히 확인했다면, 디모데전서 2장12절의 번역을 바울 당시의 부정적인 의미로 되돌려서 전반적인 번역을 다음과 같이 다시 해야(L. Belleville, 219)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여자가 남자를 지배·찬탈할 목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여자가 지배적인 방식으로 남자를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번역은 앞서 다루었던 창세기 3장 16절 하반절(“너는 남편을 [다스리기를]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리기를 [원하리라]” – 필자 수정 번역)의 진술과도 그 맥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에베소교회 여성들의 잘못된 사역 태도(자세)를 꾸짖는 것이지, 바울이 여성들의 사역(안수) 자체를 ‘규범적’으로 부정하는 본문이 아니라는 것은 아주 분명해진다.

⑤ 교회 지도력(leadership)을 나타낼 때 바울이 즐겨 쓴 낱말: “프로이스테미”

덧붙여서, 바울이 교인들을 가르치는 교회 지도자들의 사역을 나타낼 때는 ‘프로이스테미'(proistemi, 다스리다)라는 낱말을 주로 사용했음을 알아야 한다. 교회 리더십과 관련해 바울은 신약에서 이 낱말을 6회 사용했다(딤전 3:4, 5, 12; 5:17; 살전 5:12).(J. J. Davis, 15) 그런데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서 ‘아우뗀테인’이라는 아주 애매모호한 말을, 딱 한 번만 쓴 것은 바울이 창세기 창조 기사를 인용하고 적용하는 방식이 지역 교회의 문제에 따라 조금씩(때로는 정반대로) 달랐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현재 시제’를 썼다는 것은 지금 이 지시가 에베소교회의 내부 상황에 따른 임시 조치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사도의 의도가 짙게 깔려 있음을 시사한다.

9. 1세기 사회의 여성과 원시 영지주의
① 1세기 여성들의 낮은 교육 수준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주변에 한글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통계에 따르면 해방 당시 한국의 문맹률은 77.8%였다.(박영호, 2021:187) 특히 여성들의 문맹률이 높았는데, 이는 여자를 하대하던 조선 시대 가부장제의 폐해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문해율이 10% 이내였던 1세기 헬라 사회에서 여자들은 우리나라 조선 시대처럼 아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당연히 남자들에 비해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디모데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1장에서 ‘거짓 교사’ 문제를 언급했고, 4장은 거의 통째로 ‘거짓 교사’ 문제를 전제로 디모데 목사에게 목회 지침을 주는 데 할애했다. 디모데전서 곳곳에서 교육 수준이 낮았던 에베소교회 여성들이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에 쉽게 넘어가 버린 상황이 언급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일부 여신도들이 그 낮은 교육 수준 때문에 팔랑귀가 되어 에베소교회에 은밀히 침투한 거짓 교사들에게 쉽게 속아 주제넘게 나대는 상황이 심각한 교회 내부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일부 신약학자들(Kroeger나 Jagt)은 그 ‘거짓 가르침’의 핵심을 1세기 원시 영지주의로 보고 있다.

② 에베소교회를 흔든 거짓 가르침: 원시 영지주의

논쟁이 아주 심한 본문인 만큼 영지주의에 대해 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것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었다(딤전 1:3).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해 이러한 거짓 교사를 포함한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디모데가 어떻게 자기의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다.(이은순, 58-62) 교회를 위협하는 거짓 선생들은 ‘신화’와 ‘족보’를 강조하며(딤전 1:4), 율법을 전하며(딤전 1:7),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전하고(딤전 4:1),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하며(딤전 4:3),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고(딤전 6:4), 자기들이 지식(그노시스)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딤전 6:20).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교육 수준이 낮았던 에베소교회의 어떤 여자들은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전할 뿐만 아니라(딤전 5:13) 영지주의의 그릇된 가르침에 따라 결혼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딤전 5:14).

여기서 거짓 교사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이들이 ‘원시 영지주의'(proto-gnostic) 이단이라고 주장한다.(이은순, 58-62) 그들은 족보와 허튼 이야기를 좋아하며, 특히 그 가운데서도 그들이 즐기는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의 족보’ 이야기로, 그들은 창조 순서를 뒤바꿔 아담이 아닌 이브가 먼저 창조됐는데, 구약의 하나님이 아담을 속여 아담이 먼저 태어났고 구약의 하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믿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바울은 여기서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영구히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여자들이 남자의 근원이라고 가르치며 전하는 것들을 “내가 지금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원시 영지주의를 믿는 이교도들은 일반적으로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단들은 하와가 먼저 태어나 아담에게 생명과 지식을 주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이은순, 58-62) 원시 영지주의도 그랬다.

③ 바울의 반박

따라서 바울은 “하와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아담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디모데전서 2장 13~14절에서 창세기 말씀을 인용해, 하와가 먼저 태어나지도, 우월한 지식을 소유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자신이 먼저 꾐을 받아 죄에 빠졌다고 설명하고 있다.(이은순, 58-62) 다시 말하면, 바울은 지금 창세기 타락 기사에서 하와가 먼저 뱀에게 속은 것과 에베소교회 여자들이 거짓 교사들에게 속는 것의 ‘유사성’에 주목하면서, 그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창조의 순서와 타락에 대해 디모데전서 2장 13절~14절에서 창세기 말씀으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여자가 두 번째로 지어졌고, 여자가 먼저 죄에 빠졌다”고 말한 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창조의 영구적(규범적)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또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함을 말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단지 거짓 교사들이 가르친 내용이 잘못됐다는 것을 에베소교회 여성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창세기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단순 인용해 진술한 것뿐이다.

영지주의 문헌인 <Gospel of Mary>에 의하면(이규호, 741-746) 여자들이 영지주의 집단 안에서 지도적 역할을 감당했지만, 그 대신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는데, 그것은 ‘여성성'(feminity, womanhood)을 포기하고, 영적 성장과 지식(그노시스)를 증가시키기 위해 ‘성생활’과 ‘출산’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즉 여자들이 ‘지식’을 통해 구원받으려면 아이 낳는 행위를 포기해야 했다. 결국 거짓 교사들의 이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인 에베소교회의 여자들은 혼인을 하지 않으려 했고, 바울은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교정하기 위해 여자들이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아이를 낳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고 말한 것이다.(이은순, 58-62) 여성 안수 반대론자들은 디모데전서 2장 12절의 “권위를 행사하다”라는 왜곡된 번역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근거로 여성 안수 반대론을 펼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같은 문자주의 해석 원리로 디모데전서 2장 15절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을 그들은 또 어떻게 해석할지 몹시 궁금하다. 그렇게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미혼 여성’이나, 기혼자라도 ‘불임인 여성들’은 구원의 길이 영영 막혀 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식으로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이 정말 개혁주의신학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여자들이 쉽게 속기 때문에 여자들을 신뢰할 수 없으므로 여자들이 가르치지 않아야 한다면, 단지 남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디모데후서 1장 5절(디모데 목사의 외할머니와 어머니)과 3장 14절, 디도서 2장 3절에 따르면, 여자가 어린아이들과 다른 여인들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또 사도행전 18장에 의하면 디모데 자신도 브리스길라가 남자(아볼로)를 가르쳤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바울서신 가운데에서도 신자들이 서로 가르치거나 또는 가르치도록 권면하는 것을 묘사하는 구절도 많이 있다(골 1:28, 3:16, 롬 15:14, 고전 1:5, 14:26, 엡 5:19, 딤후 2:2 등).(이은순, 58-62) 성경을 절대 가치가 있는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하고 날마다 묵상하며 연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면, 더더군다나 개혁주의 보수 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이런 구절들을 근거로 “여자는 교회에서 가르쳐서는 안 된다”, “여자는 목사가 되면 안 된다”는 등, 조선 시대 유교적 가부장제에 찌들고 도덕적으로 썩어 빠져 기방妓房이나 드나들던 양반 한량들처럼 허튼 이야기들을 더는 하지 말아야 한다.

④ 바울의 현실적인 지시와 본문의 결론

이 구절과 관련된 1세기 당시의 배경이 본문 해석에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요약하면, 영지주의자들은 남자보다 여자가 먼저 창조됐다(딤전 2:13과 반대)는 것을 믿었으며, 그래서 여성들이 영지주의 집단 안에서 지도자 행세(딤전 2:12와 반대)를 했다. 또한 여성들이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지식(그노시스)을 잃지 않으려면 여성성을 포기하고 출산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딤전 2:15와 반대) 가르쳤다.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던 당시 에베소교회 여성 교인들은 낮은 교육 수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를 오해한 나머지, 그리고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쉽게 속아 교회 공동체를 어지럽히면서 방자하고 시끄럽게(딤전 2:11-12와 반대. 바울은 여기서 “조용히”라는 말을 두 번이나 쓰고 있다) 날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도는 부득이 거짓 교사들의 영지주의 교리를 뒤엎기 위해 창세기 말씀을 들어 “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았다”,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로 타이르면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지도자 훈련도 전혀 돼 있지 않던 여인들이 에베소교회에서 지도력을 가지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못을 박은 것이다. 동시에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서 ‘해산解産’을 말한 것은, 출산을 거부하는 영지주의 가르침을 뒤엎음과 동시에 창세기 3장 15절의 ‘메시아 언약'(여자의 후손[해산]과 뱀의 전투)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은근히 언급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2장 15절 말씀을, 여자인 마리아의 ‘해산’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남자나 여자나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바울이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언약사적인 관점에서도 올바르고 바람직한 해석이 될 것이다.

따라서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교회 안에서 아무런 교육도 훈련도 받지 못했으면서 거짓 가르침에 속아 주제넘게 남자들을 지배하려는 일부 여성들의 못된 행위를 그치라는 것, 그리고 준비 안 된 사람은 (남자 여자를 불문하고) 교회 지도자로 세우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교회나 에베소교회에서 불행히도 여자들이 문제였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만약 남자들이 문제였다면 사도는 “남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혹은 “남자가 가르치는 것과 여자를 지배하려는 자세로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로 아주 준엄하게 꾸짖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본문은 에베소교회 안에서 준비 안 된 여성들이 설치는 ‘방식’을 책망한 것이지, 여성의 지도력 자체를 사도가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여성 안수 반대론자들의 말처럼 이 구절이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말씀이라고 할 경우, 바울 사도는 구약에서 “사사 시대의 모세”로 드보라 같은 걸출한 여성을 세워 쓰셨던 하나님, 남자든 여자든 필요에 따라 당신의 ‘남녀 종들을 불러 쓰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셈이 되는 것이다. 명색이 ‘개혁신학’을 추구한다는 사람들이 성경 자체를 이렇게 모순되게 제멋대로 해석해서야 되겠는가? 결론적으로,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말씀은 앞서 다뤘던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말씀과 마찬가지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근거 구절이 결코 될 수 없다.

10. 바울의 창조 기사 인용과 적용, 그 다양성
이렇게 설명했음에도 ‘여성 안수 불가론’을 끝내 유지하고 싶은 이들이 아직 있을 것 같아서 바울의 창조 기사 인용 방식, 그 다양성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J. J. Davis, 15-17)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및 다른 구절에서 사도가 지역 교회 상황과 함께 ‘특정 교회’의 문제들을 고려하면서 창세기 본문을 언급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창세기 창조 이야기에 기대는 바울의 호소, 그 다양성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 구절을 근거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전통적인 여성 안수 반대론자들이, 바울이 창세기 본문을 적용한 ‘문맥을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전통적인 입장: “아무튼 여성 안수는 ‘절대’ 안 된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전통적인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은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쓸 때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NIV) 권위를 가질 수 없다(‘아우뗀테인’이라는 낱말의 이 현대적인 번역이 아주 왜곡됐다는 것을 이미 밝혔다)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다음이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요 여자가 속아 범법자가 되었느니라”(딤전 2:13-14). 여기서 바울은 타락 이전과 타락 직후의 인간 상황을 설명하면서 창세기 이야기에 호소하고 있다(창 2:18-25, 3:1-7). 디모데전서 2장 13절 이후, 창조에서 하와보다 아담의 연대기적 우선순위(앞에서 아담과 하와의 생일이 같다는 말을 분명히 밝혔다)를 언급하는 것은 ‘창조’ 이야기이므로, ·’타락 이전 창세기 본문에서’ 사도가 끌어낸 결론은 단순히 ‘문화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거나 ‘인간의 죄 된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와 장소에 대한 규범적인 지침이며 결과적으로 모든 상황에서 특정 직위에 여성의 안수를 금지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의 추론이 단지 제한된 문화적 맥락이나 특정 교회의 상황이 아니라 기본적인 창조질서에 호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경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아담과 하와를 역사적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해석은, 여성을 목사나 장로로 안수하는 것에 대해 중대하고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는 ‘여성 안수 반대론’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비록 아담과 하와를 역사적 개인이 아니라 최초 인간의 원형적 대표자로 간주하더라도, 바울이 이러한 설명에서 이끌어 낸 함의는 그 본문이 ‘타락 이전’의 창세기 본문에서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초문화적(영속적) 타당성’이 있다고 우길 수도 있고, 그에 따라 오늘날도 여성 안수는 절대 안 된다고 여전히 몰상식하게 주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② 개혁주의적 입장: “여성 안수 반대론자들은 바울의 창세기 인용 방식을 오해했다”

그러나 이런 논증은 사도 바울이 특정한 교회와 회중을 위한 그의 목회적·신학적 관심과 특별히 관련된 방식으로 ‘창조 본문’에서 ‘다양하게’ 의미를 이끌어 내는 바울 특유의 적용 방식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로 인해 ‘여성 안수 반대’ 같은 엉뚱한 교리가 추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기 다른 교회 상황에서, 바울 사도가 이 동일한 창조 본문에서 각기 다른 적용을 어떻게 이끌어 내는지를 좀 자세하게 예증하겠다.(J. J. Davis, 15-17)

② – 1: 적용 사례 1

예를 들어 보자. 로마서에서는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 전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온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된다(롬 5:12-21). 하와는 그리 자주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오실 분”(롬 5:14) 곧 두 번째 아담으로 제시된 것처럼, 아담은 타락한 인류의 우두머리로 제시된다. 아담에 대한 초점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위한 복음으로서 바울의 목적과 일치한다. 그가 이전에 로마서 3장 9절에서 말했듯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 율법의 의로운 표준은 “온 세상이 하나님께 책임을 지게”(롬 3:19)한다. 그러므로 온 인류가 보편적으로 복음을 필요로 한다. 나중에 로마서에서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의 회중이 ‘께름칙한 고기’를 먹고 ‘특별한 날’을 지키는 것과 같은 교회 내부적인 문제를 다루지만(롬 14:5-23), 로마서 서두에서(1~3장), 그는 특히 복음의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타당성에 관심이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을 정죄에 이르게 한 아담의 불순종이라는 관점에서 창세기 3장을 읽어 낸다(롬 5:18에 하와 이야기는 아예 없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특히 이 지역 교회 집회의 문제와 관련된 창조 이야기를 다르게 적용했다. 공적 예배에서 여성의 합당한 행동에 대한 지시를 내릴 때(고전 11:2-16), 바울은 창조적인 근거를 지적했지만(고전 11:8,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창 2:21–23 참조), 이것을 남자와 여자의 상호 의존이라는 방향으로 규정한다(고전 11:11-12). 그러면서 사도는 고린도의 여성들이 회중 앞에서 계속 기도하고 예언(설교)할 것을 기대하고 분명히 그것을 허락했다(고전 11:5).

② – 2: 적용 사례 2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는 거짓 교사들에게 속는 위험에 대해 언급한다.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서 그는 “하와가 뱀의 간계에 미혹된 것같이”(창 3:1-6) “다른 예수”(고후 11:4-5)를 전파하는 “수퍼(잘난 척하는 가짜) 사도들”로 인해 그리스도를 향한 성도들의 마음이 미혹되어 진실하고 순수한 신앙이 흔들릴까 걱정했다. 주목해야 할 요점은 여기서 바울이 하와가 속은 것과 고린도 회중 전체(또는 그 [남성] 지도자들)가 거짓 교사들에게 속는 위험 사이에 등호等號를 그었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하와의 비유는 여성만이 아닌 고린도 교회 ‘회중 전체’에 적용되는 것으로 명확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어서, 마치 그들이 단지 성별 차이 때문에 그러한 속임수에 취약한 것처럼 여긴 나머지 특히 그 안의 여자들에게만 이 창세기 본문을 적용시키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서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을 때 바울은, 젊은 과부들 중 일부가 이미 “사단을 따르기 위하여 돌아섰다”(딤전 5:15)는 점을 염려했다. 에베소에 있는 “허약한 여인들”이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진리를 배우지 못하며 (요즘의 신천지 이단 같은) “거짓 교사들”에게 속아 그들의 가정이 무너진 것도 알고 있었다(딤후 3:6-7).

고린도후서 11장 3절과 디모데전서 2장 12절의 이 비교는 창세기의 창조와 타락 기사를 읽고 적용할 때 바울이 ‘일률적인’ 해석(원칙)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려 준다. 따라서 바울이 인용하는 창세기 본문 속 ‘하와’는 성경 해석상 결국 여성의 ‘성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밖에 없다. 거짓 가르침이 두 상황 모두에서 위험할지라도 각 지역 교회의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적용점은 지역 교회의 특정 상황에 따라 문맥상 감각적인 방식으로 바울이 창세기 이야기를 가져와 각기 다르게 적용한 결과다.

② – 3: 적용 사례 3

바울이 창조 본문을 상황에 따라 감각적으로 적용한 또 다른 예는, 에베소와 로마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음식에 관한 논쟁’을 다루는 다양한(각기 다른) 방법에서도 볼 수 있다. 디모데전서 4장 1~5절에서 에베소에 쓴,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금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였다. 인용된 원리의 바탕은 창세기 1장 31절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다. 그 결혼 제도와 모든 종류의 음식(이교도 우상에게 바쳐졌든 아니든, 모든 고기나 채소)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로 “깨끗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자체의 선함, 바울은 이 원칙으로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과 맞서 싸워 이겨 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허용되는 ‘음식’과 ‘특별한 날'(절기) 준수와 유사한 문제(롬 14)에 대해서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소 다른 목회적 접근 자세를 취한다. 에베소 회중과 마찬가지로 사도는 모든 음식의 선함’이라는 창조 원리를 암시하지만(롬 14:14,”그 자체로 더러운[속된] 것이 없느니라”, 창 1:31 참조), 로마교회에는 고려해야 할 또다른 역학관계가 있었다. 교회 내 유대인과 이방인의 서로 다른 종교적·문화적 배경 탓에 유대인 출신 신자들의 음식에 대한 양심의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로마교회의 일치를 방해하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 사이의 관습과 양심이라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원칙적으로 로마에 있는 이방인 출신 신자들은 “창조 원리에 기반하여” 아무 음식이나 고기를 먹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만, 바울은 유대인 출신 형제들의 양심을 고려하여 기독교적 사랑으로 그 권리를 스스로 자제해 줄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교회 일치’라는 중심적이고 구속사적인 관심과 ‘부차적인 문제’ 사이에서 기독교 양심에 대한 존중이, 음식과 고기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모든 개인의 “창조 원리에 기반한 권리”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이 ‘음식’과 ‘고기’가 지닌 창조적 선함의 타당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롬 14:1-4에서 그는 “음식이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다”는 전제에서 말했다) 이 원칙은 로마교회 교인들의 삶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에베소에서는 문제의 회중이 처한 특정한 상황 때문에 바울은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창조 원리에 기반한 권리”를 더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자유롭게 음식 먹을 권리를 거부하는 것은 곧 미혹하는 영을 따라 믿음을 버릴 위험한 길로 이끄는 거짓 교사들로부터 오는 거짓 가르침이기 때문이다(딤전 4:1). 에베소에서 음식 먹는 문제는 신앙 자체의 보존과 관련이 있다. 반면에 로마에서는 로마서 14장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느 쪽이든 믿음을 버리고 마귀에게 속거나 이단 교리의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에 처해 있다는 표시가 전혀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바울은, 똑같은 창조 원리(음식을 포함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를 근거로, 에베소교회에서는 이단과 싸우기 위해 “거리낌 없이 음식을 먹으라”고 하고, 로마교회에서는 교회의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 먹는 것을 자발적으로 삼가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더 나아가, 바울이 말한 두 교회의 음식 논쟁에 대한 앞에서의 논의는 한 상황에서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창조 원리적인 권리(딤전 4)가 다른 경우(롬 14)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무조건적인 허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바울이 창세기 본문을 각 지역 교회의 상황에 맞춰 다양하게(서로 다르게) 적용하는 이런 방식은, 또한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권위 행사를 제한하기 위해 창조기사를 써넣은 것(딤전 2:12-13)이, 또 다른 상황에서도 똑같은 금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시사한다. 여기에서, 두 경우 모두에서 바울은, 문맥상 매우 감각적인 방식으로 사도의 핵심 가치이자 사도적 유산인 건전한 교리와 믿음의 보존, 교회의 일치 그리고 그리스도인 가정의 조화와 질서를 각 지역교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 창조 기사 본문을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바울이 인용한 ‘창조 원리'(딤전 2:13-14)를 근거로 함부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논리를 세우면 안 되는 것이다.

② – 4: 적용 사례 4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말씀에서, 바울은 실제로 당시 에베소의 여성들이 교회에서 지도자 노릇하는 것을 명확하게 금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이 거짓 교사들이 에베소에서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고 훈련되지 않은 여성들이 거짓 교사들과 사탄을 따라 거짓 가르침에 속아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창세기 3장의 하와가 속은 것과 에베소교회 여자들이 속은 것 사이에 명백한 ‘유사점’을 보았고, 또한 창세기의 하와가 속은 것과 남녀 구분 없이 고린도교회 모든 회중이 속은 것 사이의 ‘유사점’을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당시의 에베소교회나 고린도교회와 달리, 신앙과 생활이 건전하면서도 교회 일치, 가정의 조화와 질서라는 사도적 핵심 가치와 일치하는 건강한 교회의 다양한 상황에서는 여성이 교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활짝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디모데전서 2장과 고린도후서 11장의 문맥상 차별화된 용법에 비추어 창세기 본문에서 이끌어내야 하는 일반적이고 “초문화적인” 교훈은, ‘규범적인 여성 안수 금지’가 아니라, ① 언제 어디서나 여성이나 남성 모두 거짓 교리나 거짓 가르침에 속아 종종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는 것, ② 남녀를 불문하고 준비되지 않은 이는 교회 지도자로 세워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거짓 교사들이나 거짓 가르침에 쉽게 속는 자들이 교회 지도자로 안수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에서 바울이 주장하는 핵심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신천지 같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교회 지도자로 세우지 말라”는 말이나 똑같다. 믿음의 건전함은 주님의 거룩한 몸인 교회에서 장로나 목사나 집사로서 봉사하는 데 꼭 필요한(그러나 충분하지는 않은) 조건이기 때문이다(딤전 3:1-13).

11. 보수 신학자들의 기우杞憂: “동성애까지 허용할까 무섭네”
① 보수 신학자들의 기우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이 에베소교회의 ‘상황’과 관련된 것일 뿐 ‘초역사적이고 항구적인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성경을 그런 식으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기 시작한다면,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나중에는 ‘동성애’도 성경적이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 아닌가”라는 보수 신학적인 우려가 틀림없이 생길 수 있다. 이쯤에서, 앞에서 말한 내용을 근거로 요즘 교회 안팎에서 아주 뜨거운 화두인 ‘동성애’에 대한 우려에 대해 예상할 수 있는 반론을 미리 정리해 두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말씀을 근거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전통적인” 견해를 기어코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여성에 대한 창조적 근거가 있는 금지 사항들이 모든 상황에 반드시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말하자면 지교회의 특수한 ‘상황적인’ 이유로 여성 안수를 찬성해야 한다는 논리가, 창조론에 근거한 동성애 행위 또한 모든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반드시 금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식의 주장을 함으로써, 마침내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용납하는 방향으로 성경 해석의 흐름이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할 수 있다.(J. J. Davis, 17) 한마디로, 여성 안수 찬성이 필연적으로 동성애 정당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신자에게 그런 우려는 매우 진지한 것이며 그러기에 신중하게 답변할 가치가 있다. 일부 현대 미국 주류 교회의 경향을 보면 그러한 우려가 전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② 그러나 전혀 염려할 필요 없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아래와 같이 대답하는 것이 좋겠다.

“구속 역사의 모든 과정과 성경 정경의 범위에서 ‘동성애’ 관행에 대한 성경적 거부에는 획일성(일관성)이 있지만, 구약과 신약 공동체의 여성들에 의해 수행된 공적 지도자 역할의 유형에는 다양성이 있음을 이해한다면 동성애 문제는 사실 그다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동성애 행위의 경우, 신약과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매우 일관된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W. J. Webb, 135-184)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평가, 그것을 ‘죄’로 보는 견해는 일관되게 부정적이다.(R. A. J. Gagnon, 2001) 동성애 관련 성경에는 역사적 또는 문화적 맥락이 언급돼 있지 않다. 동성애 금지의 기초가 되는 남성과 여성의 창조적인 구분(창 1:27)은 모든 문화적 맥락에서 ‘동일한’ 의미, 곧 초문화적 적용성, 영원한 적용력이 있다. 따라서 여성 안수 허용과 동성애 용인을 성경 해석상 같은 맥락에서 보는 것은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거나 기껏해야 이를 핑계로 여성 안수를 반대하려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 지도자의 역할에는 정경(성경) 안에 상당한 다양성이 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는데, 이는 여성이 거짓 교사들에 의해 그릇 인도되는 에베소교회의 지역적 문제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진리 안의 자유를 여성 교인들이 오해하여 그럴싸하게 남성에게 독재자처럼 횡포하게 구는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창조 순서가 우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앞에서 아담과 하와의 생일이 같다고 말했다)은 로마서 3장 1~2절과 9장 4~5절, 11장 18절(접붙임 교리)에서, 구속사의 흐름에서 하나님께서 장자長子인 이스라엘보다 이방인을 앞세우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로마서 3장 28~30절,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남녀 불문하고 다 영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분명히 논증하고 있다.(J. J. Davis, 17) 그러므로 “아담이 먼저”라는 디모데전서 2장 13절 말씀은 어쩌면 에베소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자들이 남성을 존중하지 않고 행동한 탓에 그들의 행동이 비난을 받았던 지교회의 특수 상황에서 주어진 ‘임시 지침’이었음이 분명하다,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하는, 여성 사사 드보라(삿 4), 여성 선지자 훌다(왕하 22), 모세의 누이 미리암(출 15:20~21), 여성인 브리스길라(행 18:26), 예언자였던 빌립의 네 딸(행 21:9)과 여성도인 뵈뵈(롬 16:1)는 성경 역사의 여러 시기에 하나님께서 여성 사역자들을 불러 쓰신 방법을 명확하게 일깨워 준다. 성경 66권에는 이 여성들의 활동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는 아무런 암시(단서)가 없다. 여성의 권위 있는 리더십이 때로는 금지되고(딤전 2), 때로는 허용된다는 사실(드보라, 사사기 4)의 이러한 다양성은, 여성 안수 반대 원리가 지역적 문제들과 관계없이 적용돼야 한다고 여성 안수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그 원리가 “초문화적·창조적 규범”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상황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라는 것을 여태껏 분명히 확인했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건대, 여성 안수를 허용하는 것이 자칫 동성애를 용납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신학적인 우려는 그저 부질없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12. 성경 이야기의 궁극적인 지향점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에 따라 남성, 여성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차별, 무엇보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종교적·문화적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앞서 말했듯이 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여성들이 선택됐고 ② 여성들도 남성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이 회복된 존재로 참여하게 됐고 ③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도 무너졌으며 ④ 자유인과 종의 장벽도 예수님이 종으로 섬기러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박영호, 2021:162-164)

① 에덴에서 새 하늘 새 땅까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없었다면 창세기 1~2장은 요한계시록 21~22장으로 곧바로 이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성경 자체’가 아예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때문에 죄로 죽은 우리 인류에게 부득이 성경 66권이 주어졌다. 성경 전체 1189장 가운데 창세기 1~2장과 요한계시록 21~22장, 이 네 개 장을 뺀 나머지 1185장이 타락과 구원 이야기다(이광우, 2021:976-977). 요약하면, 창세기 1~2장(에덴동산)이 출발점이라면 요한계시록 21~22장(새 하늘과 새 땅)은 목적지다. 이 네 개 장 사이에 끼인 나머지 1185장은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 사역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성도들의 ‘그 나라’를 향한 광야(지상)의 고난 가득한 행진의 역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줄기차게 이야기한다.

성경 맨 처음과 끝의 네 개 장을 직접 연결해 놓고 보면,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하나님나라’라는 우주적인 그림, 그리고 ‘그 나라’의 방향이 훨씬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요한계시록의 결말 부분인 21~22장을 볼 때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이광우, 2021:32)임을 알 수 있다. 이 행복한 결말 안에 오늘의 주제인 이른바 ‘여성 차별’, ‘여성 인권유린’이 과연 그 낱말이라도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 ‘여성 차별’은 그만두고 이른바 ‘남녀 구별’이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할까? 마태복음 22장 23~33절에 기록된 사두개인들과의 부활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특히 마 22:29-30,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리라”)을 기반으로, 요한계시록에 ‘남자’·’여자’라는 낱말이 어디에 몇 번이나 나오며, 혹시 나온다면 그 낱말들이 요한계시록 문맥에서 무엇을 의미(상징)하는지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가. 따라서 창세기 1~2장과 요한계시록 21~22장을 나란히 놓고 자세히 읽어 보면, 인간의 타락과 구원을 다루는 1185장 속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만 하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교회 내 여성 차별이 맞는지, 여성 차별이 틀렸는지)를 아주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양심에 화인火印을 맞지 않은 사람이라면 창세기 1~2장 에덴 이야기와 요한계시록 마지막 두 장의 이야기가 그 본질에 있어서 전혀 차이가 없다는 점, 그중에서도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할 흔들릴 수 없는 영원한 신학적 결승점임을 쉽게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② 새 하늘 새 땅의 본질에 역행하지 말자

여성 안수를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이 주제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를 떠나서, 인류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대속을 받은 천국 백성들이 지향해야 할 영원한 목적지, 그것이 육신의 삶을 사는 이 땅에서건, 하나님 앞에서 영생을 누리는 새 하늘 새 땅에서의 삶이건, 그 목적지(본향)가 단 한 곳뿐이고 그 한 곳을 향하여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과거 조선 시대처럼 여성을 차별하는 방향으로 끝끝내 계속 가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 모든 차별을 신속히 극복하고 영원한 나라의 영원한 본질을 향해 즉시 방향을 되돌리는 것이 맞는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공수특전단에서 장교로 근무할 때, 해마다 한두 번씩 ‘천리 행군'(40kg이 넘는 완전군장을 짊어지고 총 400km의 태백산 산길을 야간에만 행군하여 6일 만에 주파해야 하는 혹독한 ‘도피 및 탈출’ 훈련. 하룻밤 평균 60~70km의 눈 쌓인 산길을 완전군장으로 주파해, 목표 지점에 도착하면 날이 새기 전 산에 땅굴[비트]을 파고 들어가 주간에는 숨어 있어야 하는 특전사의 대대 단위 게릴라 훈련. 좀 과장해서 말하면 천리 행군을 한번 하고 나면 그 튼튼한 군화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극한의 고달픈 훈련)을 했다. 지도와 나침반만 가지고 한밤중에 눈이 무릎까지 쌓인 태백 산령을 넘나들어야 했다. 만약에 팀장인 장교가 독도법을 잘못하여 행군 방향을 잘못 잡았다가 뒤늦게 행군 방향을 수정해 ‘역逆행군’을 해야 한다면, 가뜩이나 지친 몸에 밀려오는 그 극한의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은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행군 방향을 잘못 잡았다가 그 한겨울 숨 가쁜 태백산 속 눈길에서 부득이 ‘역행군’을 해야 할 때, 몹시도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뒤따라오는 중사들(부사관들)이 금방이라도 팀을 이끄는 자신(팀장)의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 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고 고백하는 동료 장교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그까짓 천리 행군이야 어쩌다 ‘역행군’ 한번 하고, 부하들에게 걸쭉하게 욕 좀 얻어먹고, 대대장에게 군화발로 정강이 한번 까이면 끝나는 일이지만, 예수님이 거침없이 저주했던 바리새인들처럼, 왜곡된 신학적 확신으로 “천국 문에 걸터앉아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도 거기 못 들어가게 막는 상황”(마 23:13)이 된다면, 양 무리를 섬기는 목사·장로들에게 주님으로부터 어떤 저주(화)가 쏟아질지 더 늦기 전에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장합동 교단의 지도자인 장로·목사들께 간곡히 당부드린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저주를 자초하는 신학적 ‘역행군’은 이제 그만하고,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 신앙의 최종 목적지인 ‘그 나라’를 향해 교단 신학의 방향을 최대한 빨리 바르게 고쳐 잡아 주시라. 개혁신학의 본질에 우리의 발걸음을 맞추는 그것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새 하늘 새 땅’의 영광스런 모습을 아주 맑은 영의 눈으로 바라봤던 선지자 이사야 선배님의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시라.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여성 차별과 인권유린도 없고 – 필자 삽입)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6~9)

만물의 하나 됨, 만물이 한데 어울리는 참된 평화와 안식을 내다봤던 이사야 선지자의 꿈이 완벽하게 영원토록 이루어지는 나라가 ‘새 하늘 새 땅’이고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자 영원한 본향이 바로 그런 나라라면, 영광스럽게도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남자와 여자가 피차 사랑하고 존중하며 서로 돕고 서로 기대며 사는 것은 인간을 넘어 모든 피조 세계가 아름답고 평화롭게 유지되는 개혁주의적 창조질서 보전의 기본 원리가 아니겠는가. 

③ 여성 인권 존중: 하나님이 불러 쓰시는 여성 사역자(여종)들이 헌신할 기회를 뺏지 마라

성경 66권이 압도적인 가부장 사회에서 파격적인 평등과 해방을 지향하는 문서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박영호, 2021:153) 어느 신실한 남종(목사)의 충성스런 고백을 잠시 소개한다.

“여성 안수에 관련된 일부 성경 구절을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문자적으로 가져다 쓰는 바람에 그동안 보수 교단은 수많은 여성의 아름다운 헌신을 가로막고 있었다. 몇몇 성경 구절을 단편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만들어진 ‘전통’을 성경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성경 해석학이 발전됨으로 더 자세한 렌즈로 상황과 본문이 의도하는 바를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의 원리대로 살자는 것이 ‘개혁주의’라면 아무리 오랜 ‘전통’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교리는 신속하게 다시 개혁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소모적인 논란의 종지부를 찍고 예수님과 하나님나라를 생각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우리 주님의 모든 여종 남종들이 귀히 쓰임 받도록 예장합동 교단은 속히 여성 안수의 문을 열어야 한다.”

아래 적힌 ‘주기도문’의 한 대목(마 6:10)을 그저 입술로만 중얼거릴 뿐, 우리들의 어머니·아내·딸을 포함해서,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이자 남자들의 소중한 ‘반쪽’인 여성을 이토록 차별하고 그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으며, 이 급박한 추수 때 일꾼이 한없이 부족한 이 때에(마 9:37-38) 하나님께서 여종들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복음 사역 현장에서 발휘하지 못하게 남자 목사 장로들이 앞장서서 가로막는 것이 명색이 개혁주의신학을 추구하는 신앙인이자 교회 지도자들로서 그 고백과 행위가 정말 앞뒤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사랑하는 예장합동 교단의 목사 장로님들이여, 여러분들이 섬기는 교회에 지금 여성 교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설교하는 여성 전도사님이 한 분이라도 있다면, 여성 집사님들에게 구역 성경 공과를 한 번이라도 맡긴 적이 있다면, 공예배 시간에 여성 교인에게 기도나 성경 봉독을 한 번이라도 맡긴 적이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들의 존경하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게 예쁜 딸이 있다면, 여성 사역자들을 포함해서 이 땅의 여성들을 한없이 차별하고 그 귀한 하나님의 형상들, 반쪽인 남자들의 귀한 반쪽인 여성들의 소중한 인권을 사정없이 짓밟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귀한 은사와 재능을 하나님나라를 위해 쓰지 못하게 악착같이 막는 이 무서운 죄를 더는 지으면 안 된다. 

여성 안수를 끝끝내 반대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직전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생생히 들으셨던 것처럼, 오늘 여성(사역자)들의 눈물 어린 탄식을 귀 기울여 들으시고 그 백성을 압제하는 애굽을 사정없이 치셨듯이 오늘도 우리를 향해 한없이 진노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도끼날 같은 심판의 손길이 정녕 두렵지 않은 것인가. 선지자 이사야의 꿈이 곧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꿈이고, 이 땅에서 본향을 향해 광야 길을 행진하는 천국 백성들의 한결같고 영원한 소망임을 부디 잊지 마시라. 남자든 여자든 우리 모두는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날마다 예배 시간마다 우리 하나님께 내내 기도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기도하며 충성스럽게 살아가겠노라 주님 앞에 다짐 또 다짐하는 천국 백성이 아닌가. 아울러 주후 100년경 문서인 ‘디다케’에서도 예배 때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것을 명하고 있다는 점(박영호, 2021:214)을 분명히 밝혀 둔다.

“나라(요한계시록 4장, 21~22장)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새 하늘 새 땅)에서 이룬 것같이 
땅(교회와 세상)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자꾸만 쇠퇴해 가는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진정 원한다면, 교회 지도자들의 ‘꼰대적 생각’에 질려 교회에 등을 돌린 청년들이 되돌아오게 하려면, 더는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인 여자와 남자가 자신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사회로 가는 길을 교회가 앞장서서 제시할 수 있어야(박영호, 2021:164) 한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빛’으로서 하나님께서 오늘의 교회에게 맡기신 역할을 올바로 감당하는 길이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3)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렘애 3:22)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세가지 일은 육체적인 업적이나 지적 성취가 아니라 도덕적 행위다. ① ‘증오’에 대해 ‘사랑’으로 돌려주고, ② 소외된 사람들을 품어 주고, ③ “내가 잘못 생각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S. J. Harris, Journist)

13. 여성 인권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성경 구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중략)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2:16~21, 참조: 욜 2:28~32)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설교)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설교)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중략)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전 11:4~12)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아우뗀테인: 독재자처럼 지배·찬탈하다)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이 본문의 핵심 의미에 대해서는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고, 이 본문이 ‘여성 안수 반대론’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증명했다.)” (딤전 2:11~15)

이광우 / 전주열린문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교 법인이사.

참고 문헌

*국내
강호숙, 여성이 만난 하나님, 넥서스, 2016
             성경적 페미니즘과 여성 리더십, 새물결플러스, 2020
구교형, 하나님나라를 응시하다, 대장간, 2019
권지성, 특강 욥기:고통, 정의, 아름다움에 관한 신의 드라마, IVP, 2019
기타모리 가조, 이원재 역,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새물결플러스, 2017
김경열,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성전과 거룩한 백성, 새물결플러스, 2016
             드라마 레위기, 두란노, 2020
             성막의 세계, 두란노, 2022
김근주, 오늘을 위한 레위기, IVP, 2021
김기석, 끙끙 앓는 하나님:예레미야 산책, 꽃자리, 2018
김기현, 욥, 까닭을 묻다, 두란노, 2022
김세윤,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 성경적 남녀관계와 여성리더십, 두란노, 2016
김승환, 헌법의 귀환, Human&Books, 2017
김영민, 인간의 글쓰기, 글항아리, 2020
김영웅, 과학자의 신앙공부, 구리, 2015
김지찬, 엔 살롬 교향곡(상,하), 기독신문사, 1999
나용화, 여자 목사 임직은 성경적이다, 에페코북스, 2022
다우마, 신원하 역, 개혁주의윤리학, CLC, 2003
데이비드 잭맨, 정옥배 역, 티칭 이사야, 성서유니온선교회, 2013
리처드 미들턴, 이용중 역, 새 하늘과 새 땅, 새물결플러스, 2015
마이클 부쉬, 김요한 역,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새물결플러스, 2010
마이클 하이저, 손현선 역, 보이지 않는 세계, 좋은씨앗, 2019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부흥과개혁사, 2001
메리 에반스, 정옥배 역, 성경적 여성관, IVP, 1992
박대영, 묵상의 여정, 성서유니온, 2013
             부흥의 사도행전: 사도행전 1-4장, 선율, 2022
박영돈,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 IVP, 2013
박영호, 다시 만나는 교회, 복있는사람, 2020
             우리가 몰랐던 1세기교회, IVP, 2021
박유미, 내러티브로 읽는 사사기, 새물결플러스, 2018
본 로버츠, 전의우 역, 성경의 큰 그림, 성서유니온, 2019
송필경, 왜 전태일인가, 살림터, 2020
스캇 펙, 윤종석 역, 거짓의 사람들, 비전과리더십, 2018
신원하,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 SFC, 2004
알리스터 맥그라스, 정옥배 역, 십자가로 돌아가라, 생명의말씀사, 2014
오명현, 신천지(이만희)의 요한계시록 허구에 대한 반론:지피지기 요한계시록, 엔크, 2015
우병훈, 기독교 윤리학, 복있는사람, 2019
윤종하, 에베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교회, 성서유니온선교회, 2002
이광우, 요한계시록, 예영커뮤니케이션, 2021
             “바울의 ‘영광’ 말투 연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M Div 학위논문(지도교수 김세윤), 1993
             이와같이 주 안에 서라:빌립보서 강해, 예영커뮤니케이션, 2017
이규호 옮김, 이정순 감수, 나그함마디 문서, 동연, 2022
이만열, 역사의 길, 현실의 길, 푸른역사, 2021
이박행, 암을 이기는 치유캠프 복내마을 이야기, 홍성사, 2013
이승장, 왜 나는 예수를 믿는가, 홍성사, 2013
이은순, “고전 14:33b-36의 주석적 연구”, 총신대학교 대학원 Th. M 논문(지도교수 정훈택), 1995
이응윤, 내 삶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은혜, CLC, 2019
이정일,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 예책, 2020
이진오, 신앙의 기본기, 시_커뮤니케이션, 2018
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선교회, 2000
             에덴 회복의 관점에서 읽는 요한계시록, 1-11장, 에스카톤, 2021
임희모, 서서평 선교사의 통전적 영혼 구원 설교, 동연, 2020
제럴드 L. 싯처, 윤종석 역, 하나님의 뜻, 성서유니온선교회, 2020
제리 길리, 김세민 역, 다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들, 부흥과개혁사, 2011 
조재형, 그리스-로마 종교와 신약성서, 감은사, 2021
차정식, 신약성서와 창의적 설교, 동연, 2019
차준희, 모세오경 바로 읽기, 성서유니온, 2013
             6개의 키워드로 읽는 이사야서, 성서유니온, 2020
최관호, 하나님을 위한 변명, 예영커뮤니케이션, 2022
최성수, 의미는 알고나 사용합시다, 예영커뮤니케이션, 2019
최윤갑, 구속사로 읽는 이사야, 새물결플러스, 2020
크리스토퍼 애쉬, 전의우 역, 욥기, 십자가의 지혜, 성서유니온, 2014
크리스틴 폴, 정옥배 역, 손 대접, 복있는사람, 2002
폴 워셔, 조계광 역, 복음, 생명의말씀사, 2013
프란시스 A. 쉐퍼, 박문재 역, 기독교 교회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5
하워드 마샬 외, 박대영 역, 서신서와 요한계시록, 성서유니온, 2011
한병수, 새롭게 읽는 주기도문, 영음사, 2019
한희철,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꽃자리, 2018
행크 해네그래프, 김태영 역, 창조의 해답, 예영커뮤니케이션, 2012
헤시오도스, 천병희 역, 신들의 계보, 숲, 2020
홍성인, 언약으로의 초대:창세기 1-25장, 예영커뮤니케이션, 2019
             언약 안의 사람들:창세기 25-50장, 예영커뮤니케이션, 2019
홍인규, 로마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생명의말씀사, 2001

*해외
A. D. B. Spencer, ‘Eve at the Ephesus’, JETS, 6, 1955
A. Stott, Christianity According to Saint Paul, CUP, 1932
B. Lindars, Judges 1-5, T&T Clark, 1995
C. F. H. Henry, ‘Reflections on Women’s Lib’ Ch.Tod. 19, 1975
C. R. Smith, The Bible Doctrine of Man, Epworth, 1951
C. Westermann, Creation, SPCK, 1974
D. S. Bailey, The Man-woman Relation in Christian Thought, Longmans’, 1959
D. S. Fraser, ‘Women in the Ancient Israel’, JCMBRGF 26, 1974
E. H. Pagels, ‘Paul and women’, JAAR 42, 1974
E. Schweizer, Church Order in the New Testament, SCM, 1971
G. H. Tavard, Women in the Christian Tradition, University Press Notre Dame, 1973
G. Knight III, ‘authenteo in reference to Women in 1 Timothy 2:12’, NTS 30, 1984
G. L. Dickinson, The Greek View of Life, Methuen, 1957
G. R. Osborne, ‘Hermeneutics and Women in the Church’ JETS 20, 1977
G. Taylor, ‘Woman in Creation and Redemption’, JCBRF, 16, 1974
I. Epstein, Judaism, Epworth press, 1939
J. A. Anderson, Woman’s warfare and Ministry, Christian Herald, London, 1935
J. C. Coyle, ‘The Fathers on Women and Women’s Ordination’, Eg. Ed. Th.9, 1978
J. C. G. Greig, ‘Women’s Hats-1Corinthian 11:1-16’ Exp.T. 69, 1958
J. Danielou, The ministry of Women in the Early Church, Faith Press, 1961
J. de satge, Mary and the Christian Gospel, SPCK, 1976
J. Foster, ‘St Paul and Women’ Exp.T. 62, 1951
J. J. Davis, ‘First Timothy 2:12, the Ordination of Women, and Paul’s Use of Creation Narratives’, Priscilla Papers, Vol.31, No.4, Autumn 2017 
J. M. Miller, ‘In the Image and Likeness of God’, JBL 91, 1972
J. Harper, Women and the Gospel, CBRF, 1974
J. L. Duncan & Susan Hunt, Women’s Ministry in the Local Church, Crossway, 2006
Josephus, Antiquities, 1966
J. P. Sampley, And the Two shall Become One Flesh, SNTS Monograph 12, 1971
K. Stendahl, The Bible and the Role of Woman, Fortress press, 1966
L. Belleville, ‘Teaching and Usurping Authority: 1 Timothy 2:11-15’, Discovering Biblical Equality: Complementary without Hierarchy, IVP, 2005
L. Birney, The Role of Women in the New Testament Church, VBRF, Pinner, 1971
L. Wilshire, ‘The TLG Computer and Further References to Authenteo in 1 Tim. 2:12’ NTS 32, 1988
M. Dibelius & H. Conzelmann, The Pastoral Epistles, Hermaneia Fortress press, 1972
M. Thrall, The Ordination of Women to the Priesthood, SCM, 1958
O. A. Piper, The Christian Interpretation of Sex, Ch.Scribner’s Sons, 1941
P. K. Jewett, Man as Male and Female, Eerdmans, 1975
P. Scroggs, ‘Paul and the Eschatological Woman’, JAAR 40, 1972
R. A. J. Gagnon, The Bible and Homosexual Practice, Abingdon, 2001
R. Boling, Judges: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Commentary, AB 6A, 1975
R. Brown, ‘Roles of Women in the Four Gospel’, Th.St. 36, 1975
R. E. Davis, ‘Historical and Literary Parallels Between Moses and Deborah narratives’, unpublished paper,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Jan. 2006.
S. Aalen, ‘A Rabbinic Fomula in 1 Corinthians 14:34’ St.Ev.II, 1964
S. A. Reynolds, ‘On Head Coverings’, W.Th.J. 36 1973
S. B. Clark, Man and Woman in the Christ, Servant books, 1980
W. Grudem, Evangelical Feminism and Biblical Truth, Colorado Springs, 2004
W. J. Webb, Slaves, Women and Homosexuals, IVP, 2001
W. O. Walker, ‘1 Corinthians 11:2-16 and Paul’s Views Regarding Women’, JBL 94, 1975
W. Thomas, ‘The place of women in the Church at Philippi’, Exp.T. 83, 1972
W. Vogels, ‘It is not good that the “Mensch”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her a helper fit for him/her’ Eg,et.Th. 9, 1978
W. W. Tarn, Hellenistic Civilization, Arnold, 1930

[출처: 뉴스앤조이] 개혁주의 신앙과 여성 안수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