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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성 안수 제도, 우리 시대 교회가 반드시 가야 할 길! – 한성국

1. 여성안수금지, 이젠 바뀌어야 한다

2017년 예장 고신교단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교단과 오랫동안 자매 관계를 맺어온 화란개혁파(일명 해방파)가 목사와 장로에 대한 여성안수를 결의했기 때문이다. 그 후 해방파교회는 고신교단을 비롯한 몇몇 세계 보수 교단들의 항의와 수정 요구에도 2020년 총회에서 ‘여성안수제도’를 정식으로 결의한다. 해방파교회와 고신교단은 오랜 시간 교류하면서 신앙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 왔다. 고려신학대학원이 지금의 규모가 되기 전, 화란교회는 재정으로 고신교회를 지원했고 신학사상을 교류하면서 서로의 우의를 다졌다. 한국학생들을 화란으로 불러 장학생으로 공부하게 했으며, 화란에서 한국으로 교수들을 파송하여 강의하게 했다. 이것은 신학의 굳건한 일치를 의미했다. 그런 해방파교회가 여성안수를 결의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은 목사, 장로의 자격을 “남자 세례교인으로 무흠하게 7년을 경과한 자(교회정치 제40조1항 / 65조1항)”로 규정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여성안수에 대한 허용과 반대의 입장 모두 성경을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는다. 앞서 화란 해방파교회 또한 여성안수는 성경의 원리로 봤을 때 정당하며, 수년간의 토론과 논의 끝에 쟁점이 되는 성경본문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는 여성안수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여성안수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글도 성경을 근거로 해당 교회헌법의 의미를 살피려 한다.

이 글은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기억해야 할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밝히고 출발하려 한다. 첫째, 어떤 말씀에는 그와 대립하는 말씀이 있다. 따라서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말씀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 대립하는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기록한 것인지 각각의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신학·사회문화적 배경, 언어의 맥락 등을 잘 살펴서 말씀의 실제 의미에 다가가도록 애써야 한다. 셋째, 성경을 읽는 목적이 하나님 나라 선포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연구는 자기 교리의 정당성이나 완결성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 성취에 얼마나 긍정적으로 이바지하는가에 있다.

2. 성경해석에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사실

2.1. 첫째, 많은 성경(진리)에는 그와 대립하는 말씀이 있다.

“상반되는 두 논리.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것이 이단이 된다. 나아가 각각의 진리가 끝날 때마다 반대되는 진리를 상기해야 한다.”(팡세:460항) 파스칼의 말처럼 쟁점이 되는 어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말씀을 살펴야 한다.

잘 아는 몇 구절을 보자.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롬4:2-3)고 말하지만,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약2:21)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나팔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며 소고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하는”(시150:3-5) 일이라고 말하지만, 정반대로 예언자는 예배하는 자들을 향해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쳐라, 네 비파 소리도 내(하나님)가 듣지 아니하리라”(암5:23)고 외친다.

예수는 구원의 길을 가르치시면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8-30)고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마7:13-14)고 선언하신다.

바울은 다함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에 “이 세상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며 구원을 굳게 확신하지만, 동시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말한다.

시인은 하나님이 언제나 내 곁에 계심을 믿기에 “여호와는 내 편”(시118:6-7)이라고 고백하지만, 예언자는 하나님의 입을 통해 “나는 네(이스라엘) 대적이라”(렘21:13)며 시인의 고백과 정반대되는 말을 한다.

이사야는 토기장이가 진흙을 다루듯 우리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말했다면(사45:9; 롬9:19-23), 예레미야는 같은 토기장이 이야기를 사용하여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인간이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선언한다.(렘18:1-10)

시인은 신앙이란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굳게 믿고 “여호와 앞에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시37:7) 것이라고 말했지만, 다말은 자신에게 부여된 율법의 권리(Levirate)가 외면 받는 현실을 참고 기다리기보다는 분연히 일어나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여 옳음(tsedaqah)을 관철하며,(창38장) 이로 인해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칭송받는다.(룻4:12)

사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예를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같이 대립하는 구절을 살피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이것은 자기 논리란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기 위한 중요한 시작이다. 물론 모순(대립) 그 자체가 진리의 표지란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듯 모순은 진리의 반대 표지가 아닐 뿐더러 이런 모순이야말로 진리를 풍성하게 드러내는 자리임을 기억하자. “내가 신앙을 갖는 일에 가장 멀어지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던 이 모든 상반된 것들이 나를 가장 빨리 참 신앙으로 이끌었다.”(팡세:248항)

2.2. 둘째, 상반된 구절들을 ‘문맥’에서 살펴봐야 한다.

대립하는 성경은 그 자체로 두어서는 안 되며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말들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뜻을 나타내고 뜻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킨다.”(팡세:944항) 언어는 인간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 언어가 등장하는 집단의 생활방식과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의 낱말은 오직 문장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겉으로 비슷하고 어쩌면 동일하기까지 보이는 단어, 문장, 구절들도 상이한 총체에 통합될 때에는 전혀 다른 뜻을 지닐 수 있다.”(비트겐슈타인)

앞에서 본 구절들을 다시 살펴보자.

유대인의 그릇된 율법 행위 사상과 맞서야 했던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해야 했다면, 그 믿음의 원칙이 화석화된 상황을 본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롬4:2-3/약2:21)

시인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밋밋한 강론이 아닌 갖가지 음악이 어우러진 축제임을 강조했다면, 아모스는 의식(儀式)에 집착한 채 정작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한 형식적 예배를 비판한다.(시150:3-5/암5:23)

예수는 하나님나라란 율법이란 무거운 짐을 떠안기는 서기관들의 교훈과 달리 쉽고 가벼운 복음이지만, 동시에 좁은 문으로 들어서 험한 길을 걸으며 외로움을 견디는 삶이라고 말씀하신다.(마11:28-30/마7:13-14)

바울은 구원이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은혜) 안에 있음을 믿는 굳센 확신이면서도, 그 구원이 타성에 젖지 않는 뜨겁고 진지한 삶이어야 함을 강조한다.(롬8:39/빌2:12)

시인은 여호와가 내 편이심을 믿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말했다면,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안일에 빠진 유다 왕가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의 대적임을 알려주어야 했다.(시118:6-7/렘21:13)

이사야가 현실에 절망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임을 강조했다면, 예레미야는 그릇된 선택사상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주권은 반드시 인간의 실천(참여)을 통해 역사한다고 강조한다. 곧 하나님은 인간의 참여(회개)에 따라 구원(심판)에 대한 자신의 뜻을 기꺼이 바꾸시는 분이시다.(사45:9/렘18:1-10)

시인은 하나님의 뜻을 믿는 사람은 불의한 현실에 불평하기보다 고요히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면, 다말에게 신앙이란 차단된 현실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이 부여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투쟁임을 보여준다. 다말은 그야말로 하나님나라를 향해 ‘침입한’ 사람이었느니(눅16:16), 하나님은 그런 다말의 주체적인 행동을 높이보시고 그의 자녀를 통해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가신다.(마1:3) 이처럼 신앙이란 고요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위험을 무릅쓴 투쟁이기도 하다.(시편37편/창38장)

2.3. 셋째, 대립하는 구절들을 복음전파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은 오직 ‘복음에 참여하는 데 있다.’(고전9:23) “성경해석은 백과사전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혁하는 능력에 있다. 성경해석이란 성경텍스트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새로운 독자들에게서 현실화하는 작업이다.”(티슬턴) 사실 모든 성경의 저자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과 씨름했으니, 이 같은 복음실천이야말로 성경해석의 목표다.

그런 뜻에서 말씀의 모순(대립)은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펼쳐진 복음실천의 모습이다. “성경의 불일치와 비일관성은 더 깊은 진리를 가리키기 위해 하나님이 의도한 것이다. 불일치와 비일관성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문이 얼마나 심오한지 알려주는 신호이다.”(바턴) 둘은 문자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동일한 하나님의 진리로서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 선포에 성실했음을 드러내는 표이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여성 안수 문제에서 쟁점 되는 바울의 유명한 구절들을 살펴보자.

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3b-40)

3.1. 첫째, 대립하는 말씀에서 보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 말씀은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딤전2:11-15)는 말씀과 함께 여성안수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붙드는 핵심구절이다. 이 말씀은 과연 무슨 뜻일까? 바울은 분명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으며”,(고전14:34)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하라”(딤전2:12)고 말한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기도(예언)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단지 ‘머리에 무엇(수건)을 쓰고’ 하라고 권면한다.(고전11:5) 또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14:35)고 말하지만, (늙은) 여자에게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라”(디도2:3-4)고 말한다. 여기서 가르침은 교회에서 공적 활동을 말한다.

이런 대립(모순)은 다음에서도 이어진다. 바울은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다”(딤전2:13-14)는 창조와 범죄의 순서를 들어 여성의 종속성을 말한다. 하지만 바울의 신학에서 과연 창조와 범죄의 ‘순서’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일 수 있을까? 오히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다”(고전11:12)는 말을 보면 창조순서는 큰 의미가 없다. 범죄의 순서도 보자. 바울은 구원의 원리를 설명하기에 앞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힘주어 말하며 “인간은 모두 죄 아래 있기에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다”는 범죄의 보편성을 길게 설명한다(롬1:18-3:20). 이렇게 볼 때 범죄의 순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처럼 창조(또는 범죄)의 순서는 결코 불변적이거나 절대적인 의미를 지닐 수 없다.

바울은 “율법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고전14:34)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범죄한 여자에게 하신 말씀, “너(여자)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창3:16)이라는 말씀에서 온 것인데, 이 말씀 또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3:28)라는 사실과 대립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속량의 은총을 통해 이제 어떤 차별도 없음을 밝힌다. 나아가 바울은 ‘(율법으로 인해) 죄가 더해지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 범죄를 뒤덮고 남아서 넘친다’(롬5:20)고 선언한다.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 곧 구속의 현실은 창조의 옛 질서를 넘어서고 타락의 질서를 깨뜨려버린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복음의 보편성과 충만함을 강조하는 바울에게 여성과 남성의 창조순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에게 누가 먼저 타락했는가가 왜 중요한가? 복음 안에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은 이제부터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한다.(고후5:16,17)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교회의 최종 질서를 결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다. 여성의 위치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의 신학이다.

3.2. 둘째, 성경의 맥락에서 보자,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교회 안에 ‘예언과 기도’로 혼란이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기도는 공적 기도이며 예언은 오늘로 말하면 말씀을 풀어내는 설교와 같다. 성령의 역사로 이런 은사가 성도들에게 임했는데, 일부 여성들이 예배 중에 수건을 벗고 예언과 기도를 했다. 당시 결혼한 여성들은 머리에 (정절과 순결의 상징인) 수건을 써야 했다. 여자는 배우자(남편)의 영예인데, 여자가 머리에 쓴 수건을 벗는 것은 남편을 부끄럽게 하고 남편의 공적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지금 이런 여성들 때문에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고 이로 인해 사회로부터 나쁜 평을 듣게 되었다. 바울은 이 일에 반대하여 여자는 관습을 따라 기도와 예언할 때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말한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고전11:13)

고린도전서 14장의 문맥도 보라.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힘입어 방언과 예언을 했는데 지금 이 방언과 예언으로 교회예배가 혼란스러워졌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14:33)이시기에 방언은 통역자가 있을 때만, 예언은 질서 있게 행해야 한다. 특히 지금 여성들이 ‘예언’에 대해 교회 안의 남성들과 토론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남성과 토론하는 것은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었으니, 때로 성적 유혹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바울은 (결혼한) 여성이 공적 모임(교회)에서 다른 남성들과 토론하는 것을 금하면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14:35)”이라고 말한다. 만약 이 문제를 방치할 경우 교회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14:34)는 이 구절은 여자들로 교회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침묵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는데 어찌 침묵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단지 ‘질서를 지키면서 예언(방언)을 하라’는 말이다. 곧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질서를 지켜야하듯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sigao).”(14:33b-34a) ‘만일 (방언하다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sigao,28)’, ‘만일 (예언하다가)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잠잠해야 하듯이(sigao,30)’, 여자들도 질서를 지켜 잠잠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예언(기도, 방언)하거나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금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14:39-40)가 그의 뜻이다.

바울의 생각은 이러하다 : 여성들이여.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아무렇게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 여러분이 문제의 장본인이기에 교회의 질서를 위해 예언(기도, 방언)을 금할 수밖에 없다. 나는 ‘현재로서는’ 여성이 가르치거나 남자를 다스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3.3. 셋째, 복음 선포의 관점에서 보자.

왜 바울은 지금 여성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지금 여성들의 행동이 복음전파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의 과도한 발언과 주장이 교회를 어지럽혀 하나님의 복음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방언보다 예언을 높이 평가한 이유도 보라.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14:23) 이처럼 그가 예언을 방언보다 높이 평가한 것은 교리적 판단이라기보다 복음전파의 유익 때문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고전11장)도 보자.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표지였다. 그것은 그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이 주는 자유와 평등을 깨달은 일부 여성들은 그 틀을 벗어나려 했다. 수건을 벗는 것이 대표적인 일이었다. 이 행동은 여전히 그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낯선 풍경이었고, 사람들로 교회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는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3:17)고 선언한 바울이 복음의 자유와 평등을 거부했을 리 없다. 단지 바울은 지금 여성들의 과도한 행동 때문에 복음전파의 길이 막히는 것을 염려한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딤전2:11-15)는 말씀도 보자. 지금 일부 여자들이 거짓 교사들의 부추김을 받아 가정생활과 사회풍속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에베소교회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거짓 교사들은(딤전1:3)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와 터무니없는 변론을 일삼았다.(1:3,4)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을 먹지 말라고 가르쳤으며(딤전4:3)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딤후2:18)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을 부인하는(딤후3:5) 이들은 심지어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딤전6:5) 특히 어리석은 부인들을 유혹하여 그릇된 가르침을 전파했으니,(딤후3:6-7) ‘땋은 머리와 금과 진주나 값진 옷‘을 장식한 부유층 여성들이 그 대상이었다.(딤전2:9) 이 여성들은 지식에 대한 욕구가 강해서 늘 공부하지만 끝내 참된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며,(딤후3:7) 건전한 교훈을 받기보다는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는 선생을 따랐다.(딤후4:3) 이 여성들은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고(딤전5:8) 집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말로(5:13)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렸다.(6:4) 그런데 지금 이 여성들이 공동체 안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여 남자들을 가르치고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2:12)

이것은 막 싹이 돋아나는 초기기독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바울은 교회를 지켜야 했다. 그는 이 작은 공동체가 시대와 마찰을 일으켜 공공질서와 풍습을 훼손하는 비밀스런 종파 중의 하나라고 오해받을까 염려했다. 그는 복음의 길이 이 일로 가로막히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3.4. 언제나 복음전파와 교회의 유익이 중심이다.

바울을 비롯한 성경의 저자들이 취한 교훈(행동)의 기준은 그것이 복음전파에 얼마나 유익한가였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을 자격이 있으나 교회의 유익을 위해 포기했으며(고전9장),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능히 먹을 수 있으나 형제를 실족할 가능성이 있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전8:13)고 다짐한다. 고전7장을 보자. 여기서 바울은 믿지 않는 부부에게는 이혼하지 말 것을, 혼인하지 않는 남녀에게는 독신을, 약혼녀와 과부에 대해서는 그냥 지낼 것을 권한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오직 “아내(남편) 된 자여 네가 남편(아내)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7:16)라는 복음전파의 가능성 때문이다. 바울은 말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빌1:20) 베드로의 권면도 같은 이유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다.”(벧전3:1) 이것이 성경의 한결같은 관점이다.

여성에 대한 바울의 기록에서 대립하는 말씀들을 찾고, 그 말씀이 주어진 각각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자. 그리고 대립하는 말씀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펼쳐진 복음실천이었음을 기억하자.

4. 초기 기독교시대 여성참여.

4.1. 로마서 16장을 보자.

바울은 이 서신의 전달자로 여성사역자 뵈뵈를 파송한다(추천한다). 그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diakonos)이고 바울의 ‘보호자’(prostatis)였다. 사도행전 7장을 볼 때, 집사(diakonos)는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역도 했다. 특히 “고대사회에서 편지의 전달자는 수신자들에게 발신자를 대신하여 편지의 내용까지 설명하는 책임을 지녔다. 바울은 이 중요한 편지인 로마서를 자신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자로 뵈뵈를 선정했다. 그것은 뵈뵈가 로마서를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신학·목회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고 능히 추측할 수 있다.”(최갑종)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뵈뵈를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부탁한다. 이는 고린도교회가 디모데를 젊다고 소홀히 여길까 염려했듯이(딤전4:12), 로마교회가 뵈뵈를 여성이라고 가볍게 대하지 말고 ‘교회의 지도자’로서 존경심을 갖고 대하라는 뜻이리라.

바울은 긴 인사문에서 그가 아는 인물을 로마교회에 소개하면서 7명의 여성을 소개한다. 이들은 다른 남성들과 같이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브리스길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동역자(sunergos)’다. 그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힘썼다. 그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등장하는데 언제나 이름이 남편보다 앞에 나올 정도로(고전16:19 예외) 복음전파에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그 밖에 마리아는 (남편으로 보이는 안그로니고와 함께) 로마교회를 위해 많이 수고한 여성이다. 유니아(Iounia)는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을 뿐 아니라 “사도들 가운데서도 뛰어난 사람이다.” 곧 사도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4.2. 여성들이 자신들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했다.

당시 문화에서 여성은 공공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교회는 여성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이 제공한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몇몇 가정교회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 집의 안주인 이름이 나와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집(고전16:19), 라오디게아의 눔바의 집(골4;15), 바울과 함께 복음에 힘쓰던 저 여인들(빌4:3)이 그들이다. 특히 빌립보 지역에서 루디아가 세운 교회를 보라.(행16:13-15) 당시 유대인들의 법에는 여자들만 모이는 공동체나 회당을 만들 수 없었다. 공동체를 이루려면 적어도 남자 열 명이 있어야 했다. 남자 숫자가 부족한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기에 여자들은 기도하기 위해 도시 밖에서 모였다. 바울은 유대관습을 어기고 빌립보 여자들의 모임에 참여했으며 그것을 기초로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처럼 복음을 품고 사는 바울에게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남녀 차별(구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런 법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4.3. 성령은 여성들을 차별 없이 복음에 참여하게 했다.

누가는 요엘서를 인용하여 성령이 남녀 차별 없이 임했음을 노래한다.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으리라.”(행2:17-18) 앞서 살핀 것처럼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여성들이 교회의 예언(기도, 방언)에 참여했으며, 바울은 이들의 예언(공적 기도)활동을 보장했다.(고전11장) 유대인의 율법과 세속의 풍습은 여성들의 참여를 꺼렸지만 바울은 여성들의 참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단지 바울은 여성들이 예언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쓸 것을 명령한다. 곧 바울은 순서를 지키지 않고 예언하거나, 통역할 적절한 기회를 주지 않고 방언하여 혼란을 초래하는 여자들을(남자들도 함께) 책망할 뿐이다.(고전14장) 그의 주요 관심은 여자들의 예언을 금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혼란을 바로잡아 교회 질서를 지키는 일이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행10:47) 이방인이란 장벽 앞에서 망설이던 베드로가 성령의 임재를 보며 그 벽을 넘어섰듯이, 사실 성령의 역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교회공동체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한 여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가르친 일을 보자. 아볼로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유대인으로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다. 이것을 본 브리스길라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일렀다.(행18:24-26) 이것은 여성이 교회에서 공적으로 가르친 좋은 사례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니라.”(갈3:28) 이것은 당시 세례에서 사용된 공식 문구이다. 여기 하나님의 은총인 세례를 통해 죄로 인한 인간 사이의 분열과 갈등이 극복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선언이다. 하나님나라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과 차별이 사라진다. 물론 그 일은 당시에는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그 일의 온전한 성취는 미래의 일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그 일을 선취(先取)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일에 실제로 참여한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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