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회개(삼상 24:16-22)

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22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사울은 다윗의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자신을 향해서 전혀 해를 가하지 않은 다윗의 모습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사울은 울면서 다윗을 불렀습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이 장면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향해서 속삭입니다, ”네 힘을 보여줘“ ”네 본때를 보여줘“ ”네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너는 무시를 당하게 될 거야. 너를 깔보게 될 거야.“ 이러한 세상의 속삭임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소리부터 치기 시작합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속설이 우리를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얕잡아 보였다간 죽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잔뜩 허세를 부리면서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칼을 빼 듭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 칼을 빼 들었던 베드로처럼, 위협이 있을 때마다 무력으로 대응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무기를 빼 들고 공격 자세를 취합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싸움을 해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상대방이 제압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차 멸망하기만 할 뿐입니다. 내가 칼을 빼 들면, 상대방이 순순히 항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칼을 빼 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저항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8-39). 다윗이 행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효과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칼이 강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칼보다 강한 것은 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펜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을 손양원 목사님은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악했던 사람이 사랑의 원자탄 앞에서 굴복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항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또 한 손에 칼을 들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해서가 아닙니다. 종종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결혼을 허락하지 못한다고 위협하고, 취직을 할 수 없다고 위협하고(오직 신자만이 취업 가능한 방식을 통해서), 거래를 끊겠다고 위협하고, 진급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곤 합니다. 이러한 방법이 최고의 전도 방법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칼이나 무력으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굴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력을 사용하고 완력을 사용해서 우리를 굴복시키려면 굴복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우리들의 마음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사랑을 간청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악을 범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당장 심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옷깃조차 자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사울은 충격 가운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7절)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20-21절). 아주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모든 게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사울의 충격과 회개는 아주 극적인 것이었지만, 이것이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면,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나섭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다윗 앞에서 참회했던 것은 순 거짓말이었던 것일까요? 전혀 진정성이 없이 거짓으로 뉘우치는 척 연기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만으로는 지금 이때 했던 회개와 참회, 그리고 약속이 진정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진정성이 없었던 쇼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이 순간만큼은 진정으로 회개했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행동에 크게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크게 뉘우치면서 울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한번 회개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포로로 잡고 있던 사울을 그냥 순순히 놓아주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사울의 마음을 충동질해서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습니다. 이러한 예가 참 많습니다.

애굽 왕 바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릴 때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번복해버립니다. 그때 애굽 왕이 거짓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한 것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정성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마음이 바뀌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이런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부흥회를 통해서 또는 수양회를 통해서 큰 은혜를 체험합니다.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각오를 다짐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닌 겁니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성령 충만의 체험을 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단번에 끝내는 경기가 아니라 기나긴 마라톤과 같습니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대소변도 가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성장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의 경우 다윗을 통해 충격을 받고 회개했다면,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성결한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이 생략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버립니다. 마치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떠나갔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눅 11:24-26). 그러면 처음 형편보다 나중이 더 심하게 됩니다.

전과자들이 어느 날 은혜를 체험했다고 해서 함부로 성직자로 세워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때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유명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코미디언, 살인자, 도둑이 변화되어 목사가 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복음을 우습게 만들고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교훈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감독의 자격을 언급하면서 새로 입교한 자를 세우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딤후 3:6). 신앙은 한 방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은 오랫동안 성숙해져야 하는 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선 줄로 생각하면 망합니다. 한번 은혜받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은혜를 기억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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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악인에게서 난다(삼상 24:8-15)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사울이 굴에서 나갔을 때, 다윗도 뒤따라 나갔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외쳤습니다. 사울의 양심을 향해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한 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사울 왕의 대적이 아닙니다. 제가 왕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사울 왕 사이를 판단하시고, 공의를 이루어주실 것을 바랄 뿐, 제가 왕을 해하지는 않겠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대적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무찌른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이 아니라, 사울을 도와 이스라엘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변의 사람들 때문이었을 수 있습니다.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라고 다윗은 물었다. 즉 사울 주변의 사람들이 다윗에 대하여 모함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모함하는 자는 사탄입니다. 문제는 사울 왕이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서, 다윗을 조력자로 보지 않고 원수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간질은 사탄의 장기입니다. 사탄은 그 옛날 하와에게 접근하여 이간질한 적이 있습니다. 사탄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신다는 것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숨기고 계시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이간질에 하와가 넘어갔습니다. 그게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살아간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한한 축복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원수처럼 생각하고 마음을 닫게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문을 닫아버리게 한 것입니다.

사울도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습니다. 다윗을 믿고 신뢰하고 다윗과 함께 나라를 세운다면, 사울 왕은 아주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으로 평가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을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을 때, 사울 왕은 나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민족이 그릴라 백성들을 침공했을 때, 사울 왕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왕이 존재하는 이유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인데,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윗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는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동지였다면, 쓰지 않아도 될 헛심을 쓴 것입니다. 실패한 왕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함께 협력해야 할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양보하고, 서로 감싸주고, 함께 가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들은 사탄의 속삭임을 듣게 됩니다. 배우자를 원수로 대하라는 속삭임을 듣습니다. 그런 속삭임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이러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우리의 대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우리의 대적이 되고 맙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가 내게로 와서 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친구로 부르면, 친구가 됩니다. 다윗은 사울의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다윗을 친구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적으로 부르게 되었을 때, 사울은 다윗으로부터 친구의 도움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도우면서 신앙생활을 같이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의 이간질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가 서로 협력하는 동역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원수처럼 생각해서 싸우게 됩니다. 성도와 성도가 함께 돕는 조력자가 되어야 하는데, 원수처럼 대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탄의 이간질이라는 점을 알아채야 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함께 돕고 협력해야 할 운명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고,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원수로 간주하면서 죽일 듯이 덤벼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수들끼리 함께 협력하면서 어시스트를 해야 하는데, 자신의 경쟁자라고 생각하게 다른 선수가 골을 넣는 것을 시기하면서 어시스트를 하지 않으면, 그 팀은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주여, 믿음의 눈을 주옵소서. 사람을 원수로 보지 않고, 동역자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나와 다른 성향을 가졌다고 해서, 나보다 너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원수로 생각하거나 싸우려 든다면 결국 함께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을 원수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죽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갚는 것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고, 결국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해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았지만, 다윗이 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다윗도 사울처럼 사울을 원수로 생각하고 사울을 죽이려 달려들었다면, 함께 망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 승자는 사탄뿐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향해서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A. J. Muste라는 사람이 한 말 중에,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There is no way to peace. Peace is the way)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 전쟁의 방법은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같이 치고받고 싸울 게 아닙니다. 칼을 들이댄 사울이 이긴 것이 아니라, 칼을 들이밀지 않은 다윗이 승리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죽이려 달려드는 사울이 아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그런 사울을 죽여버리라고 충동질하고 미워하라고 충동질하는 사탄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이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바른 싸움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윗은 시편 109편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1-4) 다윗은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원수를 갚지 않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재판관들에게 달려갈 것이 아니고, 권세자들에게 달려갈 것이 아니고, 물질을 의지할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억울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답답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악은 악인에게서 납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악인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해야 선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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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에게 찾아온 기회(삼상 24:1-7)

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블레셋과 전투를 하러 갔던 사울은 다시 돌아와 엔게디 광야에 있는 다윗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데리고 온 군사의 숫자는 3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급한 용무가 있어서 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뒤를 보러 갔다”는 표현의 원문은 “발을 가리러 갔다”입니다. 이 말은 용변을 본다는 것을 둘러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굴속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그곳은 다윗의 일행이 숨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울이 들어온 것을 본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 24:4) 다시 말하면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이니까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사울이 다윗의 굴에 들어가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겁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사울이 들어간 그곳이 다윗이 숨어 있던 곳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사람들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은, 그렇게 말할 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옷자락만 조금 베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래놓고도 다윗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하는가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사울을 죽이고 이 지긋지긋한 도망자 신세를 끝장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기름을 부으셨기에, 이번 기회에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 24:6)

다윗의 마음이 찔린 것은 자신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에 실제로 살인을 해야만 살인이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고 형제에게 노하기만 해도 살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의 다윗은 이미 산상수훈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본 것입니다.

다윗의 이 말씀은 목사님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보통 목사님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종이니까, 목사님에게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한국 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이 정당하지 않은 것은 해석학적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목사님을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나 왕이나 선지자와 같은 기름부음을 받은 직분으로 볼 수 없습니다. 목사님을 기름부음 받은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잘못된 표현이고, 좋게 봐주면 성직의 길을 간다는 점에서 비유적으로 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따라서 목사님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성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일 경우에도 감싸고 돌면서 우리가 대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범죄가 있다면 징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고전 5:12-13).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꾸로 합니다. 교회 밖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잘못을 비난하면서, 교회 안의 범죄에 대해서는 온정주의로 감싸고 돕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에서 먼 행태일 뿐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다 제사장들입니다(벧전 2:9).

다윗은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을 이유를 찾았습니다. 사울을 보면서는 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원수를 갚지 않아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므이의 경우는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원수를 갚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이 경우에는 다른 이유를 찾아서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원수를 갚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어떤 특정 부류에게만 잘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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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사람과 믿음의 사람(삼상 23:21-29)

21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22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23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24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25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27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29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십 사람들이 다윗에 대해서 밀고하였을 때, 사울 왕은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삼상 23:21)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아주 종교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의 표현 속에는 늘 하나님이 들어가 있고, 종교적인 표현들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삼상 23:21)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표현은 사울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신다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고, 하나님의 통치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참된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차이였습니다. 야고보서 2:19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사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성경책을 들고 있기도 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예배의 자리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 사람이 진실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정치인들은 크리스천들을 의식하여 자신이 참된 중생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참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보다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터넷 시대이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어제 내가 무엇을 먹었고, 어디를 다녀왔는지도 저 멀리 타국에 사는 사람조차도 알 수 있게 개방됩니다. 하지만 나에 대해서 아무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자녀들은 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내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무엇을 전공했는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사랑합니다. 참된 믿음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의 표현 속에는 신앙적인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사울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빠져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삼상 23:21)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사울은 자기에게 우호적인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에게 우호적이면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고, 자기에게 우호적이지 않으면 저주를 쏟아놓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사람입니다. 이 점이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입니다. 다윗은 판단의 기준이 자신에게 우호적인가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와서 사울을 죽였다고 보고했을 때, 다윗은 그를 향하여 진노하였습니다(삼하 1:14). 판단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에게 유리한 이야기만을 좋아하고, 진심어린 충고와 신앙적인 권면은 듣기 싫어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중심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닐뿐더러, 사울처럼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내가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울도 한 일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한 일입니다. 제사장들도 한 일이고, 가룟 유다도 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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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의지할 것인가(삼상 23:19-20)

19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20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다윗이 십이라는 지역에 도피하였을 때, 그곳 사람들이 그 사실을 사울에게 알렸습니다.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시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특징인데, 이들은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사울 왕에게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갈렙 족속이었고, 유다 지파와는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곳으로 숨어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울에게 밀고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다윗의 삶 가운데 자주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41편과 69편에서 한탄하는 시를 쓴 바 있습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시 69:8) 한 마디로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진실로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1-2)

우리는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신뢰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물론 사람을 항상 의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믿고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며, 오직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 118:8-9)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나, 돈 좀 있는 사람들을 믿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해서 출동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지켜주셨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마침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바람에 사울은 물러서야 했습니다(삼상 23:27).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3-5)

다윗은 자신이 믿었던 십 사람들에 의해 밀고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한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의 자리에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이 고백은 다윗의 고백이자, 예수님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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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의 위로(삼상 23:15-18)

15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18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나단은 다윗을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던 반면, 요나단은 아주 쉽게 다윗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울의 군사들이 오면 다윗이 몸을 숨겨 피했을 것이지만, 요나단이 나타나면 부하들을 시켜서 잘 모셔오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든 요나단이 쉽게 다윗을 만날 수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울은 다윗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삼상 23:14).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그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는 말씀(롬 8:31)은 진리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사실상 사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은 요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요나단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말을 듣고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친구는 이런 때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적지 않게 위험한 일을 만나고, 무서운 일들을 경험하면서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때 믿음의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옆에서 따뜻한 말을 해주고 용기를 북돋우어주면서 믿음의 길을 가게 만들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미 요나단과 다윗은 구약 시대의 작은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것은 믿음의 동역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다시 만나서 언약을 맺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었습니다(삼상 23:18). 그들이 맺은 구체적인 언약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사무엘상 20:14-15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이미 맺었던 언약인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이 시점에 다시 언약을 맺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전에 맺었던 언약이 잘못되었거나 미비해서가 아닙니다. 시효가 지나버려서도 아니고, 잊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다시 그때 맺었던 언약을 기억하면서 재확인하고 감사하고 즐기고 확신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마치 부부가 결혼 서약을 하고 결혼을 했지만, 살면서 틈틈이 장미꽃이라도 사들고 가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의 약속을 한번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재확인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나단과 다윗은 이미 예전에 언약을 맺었지만, 다시 언약을 맺으면서 적지 않은 힘과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예전에 다윗과 요나단이 언약을 맺었었는데, 다윗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속에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과연 요나단은 나의 편일까? 이런 질문이 솟아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요나단이 와서 다시 언약을 갱신하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요나단은 이 순간에 아버지를 선택하지 않고 다윗을 선택하였습니다. 요나단의 언약은 여전히 유효했던 것입니다. 이런 요나단과 같은 친구를 둔 다윗은 정말 행운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서 약속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구원의 약속입니다. 하지만 그 약속을 받기에 너무나도 부족한 모습을 사람들이 보여주었습니다. 인간 편에서 자꾸만 약속은 파기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다시 재확인시켜주셨습니다.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언약의 약속을 지키는 것을 가리켜 의롭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롬 1:17). 그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이단 중에는 한 번 회개하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으며, 또다시 회개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우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기 전까지는 또 넘어지고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옛날 다윗과 요나단이 언약을 다시 맺으면서 우정을 재확인했듯이, 우리는 십자가 앞에 다시 나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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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추격과 하나님의 보호(삼상 23:6-14)

6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 7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8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9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 하는 음모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10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1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12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13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했다는 소식은 사울에게 바로 전해졌습니다. 사울은 이 소식을 듣자 너무 좋아했습니다. 숨어지내던 다윗의 행방이 묘연했는데, 다윗을 찾게 되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일라는 성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문만 걸어 잠그면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때야말로 다윗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의 이 말은 정말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편이 아니라 다윗의 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잘 따른 사람은 다윗이지 사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자의 입에서 가장 신앙적인 것 같은 어투가 튀어나온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 대한 증오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일라가 블레셋의 침공을 당했다는 소식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던 사울이, 다윗을 죽이는 일에는 군대를 동원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앙의 모습뿐인 사울이 불신앙적인 일을 하면서 신앙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신앙적인 말과 표현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적인 표현을 써서 말을 한다는 것이 결코 그 사람이 신앙적인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신앙적인 표현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등등 신앙적인 표현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언급하고, 신앙적인 표현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앙적인 사람이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표현을 잘 쓰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에게 영적인 권위가 있는 것처럼 위장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파워를 행사하려는 사람들일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신앙적인 표현으로 포장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울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잡으러 다니다가 굴에 들어간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굴이 하필이면 다윗과 그의 용사들이 숨어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때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 24:4) 또한 사울이 진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다윗과 아비새가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사울은 그때 보초도 없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아비새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삼상 26:8)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사울을 내 손에 붙이셨도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런 태도는 사울의 태도와는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불신앙적인 사울은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끌어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에게 하나님이란 자신을 위해 봉사해주어야 하는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야말로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 풀려나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일이 잘 풀린 경우는 요나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하여 욥바로 갔는데, 거기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욘 1:3) 하지만 그렇게 일이 잘 풀린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는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당시에는 에봇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다윗과 600명의 용사들은 무사히 사울을 피하여 도망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엄청난 인원을 동원하였지만, 다윗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울은 다시 회개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면 곰곰이 묵상해보아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다윗을 넘겨주지 않으시는지 고민해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런 기회마저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다시 다윗과 사울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 앞에 더 엎드렸습니까? 그리고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왜 원수가 판을 치게 내버려 두십니까?” 하나님 앞에 매어달렸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다윗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응답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는 그 관계를 보여주는 수단이며 척도일 뿐이기에, 그런 상황에서 엎드렸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관계여서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그냥 무덤덤합니다. 재수 없었다고만 생각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앞에 따지지도 않습니다. 사실 따질 수 있는 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기회를 준 것 같은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 판명이 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따졌어야 합니다. 그렇게 따지다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음을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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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상의 왕, 실질적인 왕(삼상 23:1-5)

1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던 다윗은 그일라를 블레셋 사람들이 노략질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이상한 것은 현재 이스라엘의 왕은 아직 사울입니다. 그런데 그일라가 노략질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울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망자 신세인 다윗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사울이 왕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다윗이 이미 왕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잡기 위해서는 군사를 동원하여 그일라로 갑니다. 하지만 그일라가 블레셋의 침공을 받았다는 소식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뒤틀어진 영성은 살리는 일보다는 죽이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 중에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 있고, 사울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데 관심이 있지만, 사울과 같은 사람은 죽이고, 깎아내리고, 약점을 비난하고, 공격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사울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처럼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면, 결국 자기 주변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고, 자신이 광야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 “내가 왜 이 광야 한가운데 서 있는가” 자문할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광야 한가운데 서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주변을 향해서 칼을 휘둘렀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비난하였지만, 정작 죽게 된 것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런 상황에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우리 주변에 사랑의 물을 뿌려야 합니다. 그러면,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처럼 보이는 곳에서 다시 풀이 돋아나고, 주변이 푸른 초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도망자이지만, 이미 실질적인 왕의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에게 왕의 마음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런 다윗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일라를 돕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다윗을 말렸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이러한 이들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사울에게 발각되었고, 사울 왕이 군사들을 이끌고 그일라까지 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이 일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과 용사들은 움츠러들지 않았습니다. 그일라로 갔고, 그들을 구원하였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그냥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참 안 됐네” 하면서 동정만 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 왕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하면서, 사울 왕을 비난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달려갔습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확인하자 지체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다윗이 달려간 것은 자신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골리앗을 죽이고 블레셋 군인 200명을 무찌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믿은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다윗이 달려간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인이 되었을 때는, 위험한 일인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항상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하여 우리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간구하는 것이 기도하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제목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 욕심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신 있기 때문에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우리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에 나를 쳐서 복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다윗과 같은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는 “내 코가 석 자인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최우선 관심사는 내가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을 돕고, 선교를 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은 아직 그럴만한 여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집안이 조금 안정되면, 교회라도 좀 건실해지면, 나중에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해서 이웃들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곳에 있게 하신 이유는 바로 그일라 사람들이 곤란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돕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 옆을 지나가게 된다면, 그 사람을 돕게 하려고 우리를 그 옆으로 지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외면하고 맙니다. 강도 만난 자를 돕기에는 내가 할 일이 더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어서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망설여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이상,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위기에 처한 자들을 도와준 분이 또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인류가 죄로 인하여 멸망하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저 하늘 보좌에서 그냥 남의 이야기 듣듯이 한가로이 흘려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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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있으라(삼상 22:20-23)

20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21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알리매 22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23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

사울 왕은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아무 힘이 없는 제사장과 그 친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헤롯의 모습과 아주 유사합니다. 헤롯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 탄생했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적이 아니라, 사울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동지로 여겼다면 큰 축복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울 왕은 다윗을 적으로 간주해버렸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인류 가운데에는 헤롯 왕도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참 왕이신 주님을 영접했다면 헤롯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적으로 삼아버렸습니다.

사울이 아히멜렉 제사장과 그 모든 친족을 죽이는 그 상황에서 살아남아 다윗에게로 도망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비아달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다윗에게 온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울이 다스리는 나라에 제사장이 존재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울에게서 제사장이 떠나고 다윗에게 와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점점 다윗은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왕의 모습을 갖추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다윗 주변으로 400명의 용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나중에 그 숫자는 600명으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이제 제사장까지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에봇을 가지고 다윗에게로 합류하였습니다.

반면 사울 왕 주변에는 사람들이 떠납니다. 그래서 사울은 한탄한 바 있습니다.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삼상 22:7-8) 다윗에게는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의 물을 떠다 주는 심복들이 있었지만, 사울 왕에게는 그런 충신들이 다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을 품고 가야 하는데, 적대시하게 될 때 제사장은 그를 떠나버린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사울 왕은 신접한 여인에게나 찾아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사람 사이의 관계도 바르게 세워집니다. 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사람과의 관계도 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자만이 이웃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경우,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자 결국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돌변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게 된 후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비아달을 통해서 다윗은 도엑이라는 사람이 제사장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다윗의 반응은 시편 52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는 도엑에 대한 분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결국 감사와 결단으로 끝납니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시 52:9) 이 표현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도엑이 제사장을 죽이는 황당하고 참담한 일이 벌어졌는데, 왜 다윗은 감사하는 표현을 하는 것일까요? 악이 판을 치는 것 같은 상황에서 감사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악인의 결국과 의인의 결국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것을 다 볼 수는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보면서 감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도엑만 바라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사람만 바라보면 감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비아달에게 함께 있자고 제안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삼상 22:23) 결국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피해 있으면서 다윗을 위한 제사장으로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있는 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우리가 피할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재물도 권력도 우리를 보호해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 피하는 것만이 살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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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히멜렉의 처형(삼상 22:11-19)

11 왕이 사람을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12 사울이 이르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13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에게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냐 하니 14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15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하건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16 왕이 이르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17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18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19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사울은 도엑의 말을 듣고 아히멜렉과 그의 가족 85명을 심문하였습니다. 아히멜렉이 다윗과 함께 공모하여 반역을 꾀한 것으로 몰아부쳤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정당하게 항변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의 충실한 신하이며, 사위이며, 호위대장이며, 지금까지 다윗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한 것은 계속해왔던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처형해버리라고 말했습니다.

사울 왕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만났을 때 신고했기를 기대했습니다. 사울의 종교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임무란 곤경에 처하고 갈급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왕을 호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전을 그저 국가의 전통을 보존하는 사당(祠堂) 정도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만 간주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나와서 회개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은혜를 받고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곳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고 자랑하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목회자에게서는 그러한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울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사울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왕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충신이 아니라, 잘못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어야 충신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상관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친구가 하는 모든 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간다면 말리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죄악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길을 막아야 사랑입니다. 이런 점에서 적어도 이 군인들은 제대로 된 군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도엑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군인들의 항명으로 체면이 구겨진 사울의 편에 서서 순식간에 85명을 죽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잘 찾아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유대인 전체가 곤란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도엑도 그랬을 것입니다. 정당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악을 행하기란 어렵기 때문입니다.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신하의 당연한 도리라는 논리를 댔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설득시켰을 것입니다. 긴급수배 1호인 다윗을 신고하지 않는 제사장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정당화 작업을 거쳤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은 사울과 도엑에게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욕망의 장소였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성직자란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약 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셔서 분노한 것이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는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으셨습니다. 욕망의 도구가 되어버린 성전 대신에, 참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길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울이나 도엑과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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