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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사람과 믿음의 사람(삼상 23:21-29)

21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22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23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24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25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27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29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십 사람들이 다윗에 대해서 밀고하였을 때, 사울 왕은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삼상 23:21)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아주 종교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의 표현 속에는 늘 하나님이 들어가 있고, 종교적인 표현들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삼상 23:21)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표현은 사울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신다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고, 하나님의 통치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참된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차이였습니다. 야고보서 2:19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사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성경책을 들고 있기도 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예배의 자리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 사람이 진실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정치인들은 크리스천들을 의식하여 자신이 참된 중생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참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보다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터넷 시대이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어제 내가 무엇을 먹었고, 어디를 다녀왔는지도 저 멀리 타국에 사는 사람조차도 알 수 있게 개방됩니다. 하지만 나에 대해서 아무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자녀들은 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내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무엇을 전공했는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사랑합니다. 참된 믿음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의 표현 속에는 신앙적인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사울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빠져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삼상 23:21)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사울은 자기에게 우호적인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에게 우호적이면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고, 자기에게 우호적이지 않으면 저주를 쏟아놓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사람입니다. 이 점이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입니다. 다윗은 판단의 기준이 자신에게 우호적인가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와서 사울을 죽였다고 보고했을 때, 다윗은 그를 향하여 진노하였습니다(삼하 1:14). 판단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에게 유리한 이야기만을 좋아하고, 진심어린 충고와 신앙적인 권면은 듣기 싫어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중심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닐뿐더러, 사울처럼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내가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울도 한 일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한 일입니다. 제사장들도 한 일이고, 가룟 유다도 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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