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4:27

4:27 Καὶ  ἐπὶ  τούτῳ  ἦλθαν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καὶ  ⸀ἐθαύμαζον  ὅτι  μετὰ  γυναικὸς  ἐλάλει·  οὐδεὶς  μέντοι  εἶπεν·  Τί  ζητεῖς;  ἢ  τί  λαλεῖς  μετ’  αὐτῆς;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여인과 함께 대화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하지만 아무도 “무엇을 원하십니까?” 또는 “왜 이 여인과 함께 말씀을 나누십니까?” 묻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 제자들이 돌아왔다(Καὶ  ἐπὶ  τούτῳ  ἦλθαν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이들은 먹을 것을 사러 마을로 갔었다(cf. 4:7). 아마도 그 목적을 성취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유대인들로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에 적지 않게 놀랐다(καὶ  ἐθαύμαζον).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기 때문이다(ὅτι  μετὰ  γυναικὸς  ἐλάλει).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는 것은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반복이 심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앗수르가 주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을 정복한 이후, 이들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합족이었는데, 요한 힐카누스는 그리심 산에 있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전을 파괴하는 등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반목이 심했다. 유대인들은 굳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친근하게 대화를 하시는 모습은 적지 않게 당황스럽게 만들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지 않았다. “무엇을 원하십니까?“(Τί  ζητεῖς;)라는 질문은 예수님께서 이 여인과 대화를 하는 것을 통해서 어떤 목적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다시 다른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왜 이 여인과 함께 말씀을 나누십니까?“(τί  λαλεῖς  μετ’  αὐτῆς). 이 질문은 유대인들이라면 당연히 나올 법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록되지 않았다. 아마 뒤에서 수근거리기만 했을 것 같다. 그들은 제자들이었지만 아직 예수님의 전체적인 계획과 목적을 충분히 다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 사마리아 여인의 표정과 대화하는 내용을 통해서 그 여인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감히 질문을 던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요 4:26 주해 +++ 요 4:28 주해

요 4:26

4:26 λέγει  αὐτῇ  ὁ  Ἰησοῦς·  Ἐγώ  εἰμι,  ὁ  λαλῶν  σοι.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바로 내가 그 메시야이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의 질문 답변을 하셨다(λέγει  αὐτῇ  ὁ  Ἰησοῦς). 수가성 여인이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메시야가 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올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릴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혹시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야인가를 묻는 질문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1

단호하고 분명하게 예수님은 답변을 하셨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즉 너에게 지금 말하고 있는 바로 내가 네가 언급한 바로 그 메시야이다(Ἐγώ  εἰμι,  ὁ  λαλῶν  σοι). 동사 εἰμι의 보어는 생략되어 있지만, 문맥상 그 생략된 보어가 메시야(Μεσσίας)라는 것은 분명하다. 주어를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헬라어인데, 여기에서 주어 ἐγώ를 굳이 사용함으로써 다른 그 누구가 아닌 바로 “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 4장에서는 대화가 더 이상 기록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cf. 요 20:30-31). 다만 요한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하게 된 것만을 요약으로 제시하고 있다.

요 4:25 주해 +++ 요 4:27 주해

--[註]---------------------------
  1. 요 4:25 주해 참조[]

요 4:25

4:25 λέγει  αὐτῷ  ἡ  γυνή  Οἶδα  ὅτι  Μεσσίας  ἔρχεται,  ὁ  λεγόμενος  χριστός  ὅταν  ἔλθῃ  ἐκεῖνος  ἀναγγελεῖ  ἡμῖν ἅπαντα 그 여인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메시야가 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올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릴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갑자기 메시야를 생각했다. 그래서 “메시야가 온다고 알고 있다“(Οἶδα  ὅτι  Μεσσίας  ἔρχεται,  ὁ  λεγόμενος  χριστός)말했다(λέγει  αὐτῷ  ἡ  γυνή). 메시야는 히브리어로 기름을 부은 자라는 뜻이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한다(ὁ  λεγόμενος  χριστός). 구약 시대에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서 임직하였는데, 구약 시대에 등장하는 그런 메시야들은 한결같이 부족하고 흠이 있는 메시야들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런 부족하고 흠이 있는 메시야를 넘어서는 완전한 메시야가 오기를 기대하였다.

그 메시야가 오면 모든 것을 알릴 것이다(ὅταν  ἔλθῃ  ἐκεῖνος  ἀναγγελεῖ  ἡμῖν ἅπαντα)는 말은 현재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전제하고서 하는 말이다. 사사기 시대처럼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주장과 사마리아인들의 주장이 서로 배치되고,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혼란스러울 뿐이다. 메시야가 모든 것을 알린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정보를 전달한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바른 길인지를 제대로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상태에서 주는 대답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아는 상태에서 주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수가 성 여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한 바른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의 주장은 서로 상반된 주장이었는데, 단순히 자신이 어느 출신이라는 것에 의해서만 동조를 받게 되는 주장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해주실 때, 수가성 여인은 마지막 때에 와서 바른 길을 제시해줄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생각해낸 것이다. “메시야가 와서 모든 것을 알릴 것이라고 했는데, 혹시 내 앞에 서 있는 바로 이 분이 메시야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여인의 마음속에 솟아올랐고, 그래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즉 이 말은 “혹시 당신이 바로 그 메시야가 아닙니까?”라고 묻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요 4:24 주해 +++ 요 4:26 주해

요 4:22

4:22 ὑμεῖς  προσκυνεῖτε  ὃ  οὐκ  οἴδατε,  ἡμεῖς  προσκυνοῦμεν  ὃ  οἴδαμεν,  ὅτι  ἡ  σωτηρία  ἐκ  τῶν  Ἰουδαίων  ἐστίν·  너희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나,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구원이 유대인들 중에서 나온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과 종교는 헛된 것이었다.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예배하였다. 마치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놓고 축제를 벌였던 것과 같다(출 32:1-6).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사마리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는 것(ὑμεῖς  προσκυνεῖτε  ὃ  οὐκ  οἴδατε)이라고 하셨다.

반면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ἡμεῖς  προσκυνοῦμεν  ὃ  οἴδαμεν)고 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유대인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문맥적으로는 후자가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교와 사마리아교 사이의 차이점에 주목하였고, 그것에 대하여 질문하였던 수가성의 여인에게 해주셨던 예수님의 답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제대로 예배를 드렸다고 예수님께서 인정해주신 것일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을 뒤엎은 것(요 2:13-17)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내걸었지만 사실은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것을 예배한다는 표현은 제대로 알고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시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제대로 알지못하고 헛된 예배를 드리는 모든 자들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된다.

그런데 구원은 유대인들 중에서 나온다(ἡ  σωτηρία  ἐκ  τῶν  Ἰουδαίων  ἐστίν). 이 표현은 유대인 가운데서 구원자가 나올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한 아들의 약속은 잊혀진 것이 아니라, 결국 인류를 구원할 한 구원자가 아브라함의 씨에서부터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나온다. 그분은 바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이시다.

요 4:21 +++ 요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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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4:24

4:24 πνεῦμα  ὁ  θεός,  καὶ  τοὺς  προσκυνοῦντας  αὐτὸν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δεῖ  προσκυνεῖν.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를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이 영(πνεῦμα  ὁ  θεός)이시라는 것은 어느 장소에 국한되어 있는 제한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영이 아니기 때문에 이곳에 있으면 저곳에 있을 수 없다. 반면 하나님은 육신이 아니라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동시에 계실 수 있는 분이다. 이걸 가리켜 하나님의 편재성(omnipresence)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그 하나님이 그리심 산에만 계신다고 착각을 했고, 그래서 그리심 산에서 드려지는 예배만이 참된 예배라고 생각했었다. 또한 유대인들도 그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받으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들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 잘못된 생각이었다.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δεῖ  προσκυνεῖν)는 것은 장소에 국한되는 하나님이라 생각하지 말고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든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심 산에서이든지 예루살렘에서이든지, 하나님이 계신곳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잘못된 예배일 수밖에 없다.

참된 예배의 반대는 이사야서 1:10-17에서 볼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왔고 정확하게 율법의 요구대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재물을 헛된 제물이라고 하셨고, 가증히 여긴다고 하셨다(사 1:13).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서 예배를 드려도 괜찮다. 예배당이 아닌 곳에서 예배를 드려도 괜찮다. 무슨 요일, 무슨 날짜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이다.

요 4:23 주해 +++ 요 4:25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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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4:23

– 이국진

4:23 ἀλλὰ  ἔρχεται  ὥρα  καὶ  νῦν  ἐστιν,  ὅτε  οἱ  ἀληθινοὶ  προσκυνηταὶ  προσκυνήσουσιν  τῷ  πατρὶ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καὶ  γὰρ  ὁ  πατὴρ  τοιούτους  ζητεῖ  τοὺς  προσκυνοῦντας  αὐτόν·  그러나 때가 온다. 진실되이 예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그런 때가. 그 때가 바로 지금이다. 아버지는 자기를 예배하는 이런 사람들을 찾으신다.

과거에는 무지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했지만, 그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아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은 예배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가인의 제사(창 4:5), 사울의 제사(삼상 13:8-15),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사 1:11-14)가 그것이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도 모두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면서 장소를 고집하였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바른 예배일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셨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그런 때가 올 것이다(ἔρχεται  ὥρα …  ὅτε  οἱ  ἀληθινοὶ  προσκυνηταὶ  προσκυνήσουσιν  τῷ  πατρὶ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아니 이미 그런 때가 왔다. 바로 지금이 그런 때(νῦν  ἐστιν)이다. 이 표현은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는 것처럼, 그렇게 예배하는 때가 왔다, 즉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이제는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참조: 고후 6:2). 이제는 너희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다(καὶ  γὰρ  ὁ  πατὴρ  τοιούτους  ζητεῖ  τοὺς  προσκυνοῦντας  αὐτόν).

요 4:22 +++ 요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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