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이번에 이사 간 구이 집에는 화단이 하나 놓여져 있는데요. 이 화단에 이 화단을 좀 아주 참 예쁘게 잘 꾸몄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이 저희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나무들만 자라고, 우리가 나무 원하는 그런 식물들만 자라고, 잡초 같은 것들은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요. 저희 집에 지금 남천이 심겨져 있는데, 그 남천만 잘 자라면 좋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화단의 바닥을 멀칭이라고 하는 걸로, 멀치로 이렇게 깔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소나무 껍질 같은 것들을 바닥에 쫙 깔아주면, 식물들이 다른 잡초들이 자라지 않고, 깔끔하게 자랄 수 있겠다 생각해서 주문을 해서 작년 겨울에 그 화단 바닥을 쫙 깔아주었습니다. 그런 것을 제가 미국에서 많이 봤었거든요. 그림 한번 보시면 저렇게 고동색으로 된 이 멀칭을 쫙 깔아주면 멋있죠? 멋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식물들만 잘 예쁘게 자랄 수 있도록 만들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멀칭을 사다가 깔아줬습니다.
금년 봄이 돼서 우리 집 화단이 어떻게 예쁘게 바뀌게 됐을까요? 현실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잔디 이런 잡초들이 안 자랄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 멀칭 사이로 다 잡초들이 다 뚫고 올라오는 겁니다. 아, 이 한 방에 해결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완전히 실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뿌릴 때 제 아내가 “아, 저거 안 될 텐데”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듯한 태도로 바라봤는데, 아, 정말 아무것도 되지 않았던 것이죠. 우리들의 생각에는 한 방에 끝내버리고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래서 무엇인가를 시도하는데, 한 방에 해결되는 것들이 참 없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문제가 올라오고 계속해서 잡초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게, 어쩌면 우리들의 현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오래간만에 출애굽기의 말씀을 읽게 되었는데요. 어쩌면 이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바로 왕이 그런 잡초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내어 보내라고 모세를 통해서 바로 왕에게 말씀해 주셨는데 바로 왕은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해 버렸습니다. 자신들이 데리고 있던 그 종들을 그 노예들을 그 60만 대군이나 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바로 왕에게 여러 가지 재앙을 보내서 그 재앙을 통해서 이 애굽 나라를 치시고 항복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나일강의 물을 피로 바꾸어 버리는 그런 재앙을 내리게 된 것이 첫 번째 재앙이죠. 나일강에서 썩은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일강의 물을 마실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나일강의 물고기들이 다 죽어가는 그런 끔찍한 상황 가운데서 바로 왕은 항복했을까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이죠.
하나님께서 두 번째 재앙으로 개구리를 온 애굽 땅에 가득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징그럽습니까? 이곳저곳에 튀어 다니는 그 개구리, 심지어 밥상 위에까지라도 튀어나오는 그런 개구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고통스러워서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면 충분히 항복할 법도 한데 바로 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재앙으로 이를 온 나라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온 땅의 이가 들끓게 만들었는데, 그 바로 왕의 신하들이 그 주술사들이 이건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역시 바로 왕은 꿈쩍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재앙으로 파리를 온 애굽 땅에 들끓게 만들었는데 그때 항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기는 하지만 멀리 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번복해 버렸고요.
가축의 가축들을 다 죽이는 그런 일들을 보냈지만 역시 바로의 마음은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종기를 나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 누구도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역시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온 나라의 우박이 떨어지게 만들었지만 역시 바로 왕은 내가 죄를 지었다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낼 것처럼 하고 그 우박을 멈추게 했지만 역시 바로 왕은 마음을 변경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여덟 번째 재앙으로 메뚜기를 보냈는데요. 모든 그 식물들을 다 갉아먹어 버립니다. 그 애굽 나라의 곡식을 남겨두지 않는 그런 엄청난 재앙이 있었을 때 이제는 다들 그만두라고 하면서 내보내자고 신하들이 이야기했지만 역시 또 번복해 버리면서 바로 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아홉 번째 재앙으로 온 세상이 흑암 가운데 갇히게 만들어 버렸지만 역시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는 것처럼 했지만 역시 보내지 않은 것이죠.
이런 재앙 가운데 하나만 당해도 이런 제안 가운데 하나만 당해도 항복할 것 같은데, 그런데 끝까지 버티고 항복하는 것 같았지만, 또 버티고 또 변경하면서 결국 마지막에 장자가 죽어 나가야만 그때서야 항복하는 그 이야기를 보게 되면서, 정말 참 끈질기구나. 한 방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끈질기구나. 이 문제라고 하는 것, 이 악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이 출애굽기의 말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닫고 또 깨닫게 되는 것이죠.
장자의 재앙으로 인해서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결국 해방되어서 가나안 땅으로 출발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또 끝이었나요? 그게 끝이 아닌 겁니다. 또다시 애굽 왕 바로는 군대를 다시 이끌고 추격하는 겁니다. 추격하면서 결국 이 이스라엘 민족을 막아 세우기 위해서 또 쫓아오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마치 무엇과 같은가? 좀비와 같아요. 영화를 보면 좀비 영화 같은 것들이 있는데, 좀비 영화 같은 것은 현실성이 없는 영화잖아요? 이런 좀비들이 나타나서 막 총으로 쏴도 안 죽고 그 무엇을 해도 또다시 살아나서 자꾸만 괴롭히는 그런 좀비 영화 같은 것이 전혀 비현실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에 빠져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마치 그런 좀비 영화와 같은 그런 상황에 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를 해결한 것 같은데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문제들 이렇게 하면 해결됐을 것 같은데,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그런 문제들을 계속 겪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좀비와 함께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과 똑같은 현상을 그런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좀비 영화를 보면서도 그렇게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라고 하는 것, 이 세상의 악의 실체들은 정말 끈질겨서 그것을 한꺼번에 한 방에 해결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어렵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선한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조그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너무나도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옳은 일을 할 때에는 조그마한 장애물이 있어도 포기해 버리고 조그마 난관이 부딪혀도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금세금세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많은 것이죠. 성경 읽기만 해도 그래요. 지금 열심히 성경 읽도록 해 나가고 있는데, 보니까 몇몇 분들은 포기하신 분도 있어요. 왜 포기했는가? 피곤해서. 하루 못 읽게 되니까 포기하는 거예요. 조금 여러 가지 좀 늦었다고 해서 포기해 버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바쁘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이 자꾸만 나타나게 되는 것이, 정말 선한 일이라고 한다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되는데, 오히려 그러한 선한 일을 하는 것에는 너무나도 쉽게 포기해 버리는 거죠.
“내가 사랑을 베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의 결심을 했으면서도, 그러나 조금만 어 어려움이 생기면, 시간이 좀 늦었네. 아니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여러 가지 장애물이 조금만 나타나도, 우리가 하려고 했던 그 선한 일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게 우리 인생들의 모습인데, 그런데 악인들은 도무지 포기를 모르는 겁니다. 악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악을 저지르고, 악은 우리들 앞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문제는 계속해서 나타나는 그래서 정말 끈질긴 것이 악의 속성이고 문제의 속성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죠.
그럴 때 이런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요? 이런 모습 가운데서, 아무리 악이 끈질기다 할지라도, 문제가 끈질기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래도 악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하나님의 그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있습니다. 바로 왕이 그렇게 악랄하게 끈질기게 그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지 않고 그래서 끈질기게 잡초처럼 그렇게 대응했지만, 그래서 바로 왕이 승리했는가? 우리가 출애굽기의 말씀을 읽으면서 발견해야 될 것이 그거예요. 정말 끈질기구나. 정말 끈질기구나. 포기할 줄 모르는구나. 악은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저렇게 반항하는구나 하는 그런 현실을 맞이하게 될 때, 정말 우리가 주눅이 들고 우리가 더 이상 못하겠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출애굽기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될 것은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서 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구나. 그 바로 왕이 아무리 반발하고 아무리 그 길을 막아서고, 그런 모든 것들로 그렇게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 악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의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악이 판치는 것 같은 상황을 우리들은 너무나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세계 속에서 우리들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아니면 이 나라에 돌아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정말 선은 늘 무너지는 것 같아요. 의로운 사람들은 늘 망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악한 사람들은 악의 카르텔들은 너무나도 굳건하고 너무나도 강 해서 도무지 그 악의 카르텔을 깰 수가 없고, 악한 사람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우리들에게 없는 것처럼 보여서 낙심될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바로 왕과 같은 포악한 사람이 아무리 끈질기게 또다시 방해하고 또다시 방해하고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나 같은 힘없는 사람이 도무지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내가 대응할 만한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절망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선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2편 1절에서부터 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이 세상의 악한 사람들이 바로 왕이 모세를 향해서 거부하면서 힘을 자랑하는 것 같고, 그래서 그들이 승리하는 것 같고, 악이 승리하는 것 같고, 이 세상의 모든 부리가 판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실 거라고 하는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질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의 길에, 선한 길 위에 굳건하게 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말씀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그것은 실망할 일이 아니에요. 지금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정말 최선을 다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아요. 도무지 한 발자국도 진전되는 것 같지 않아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꽉 막혀서 도무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우리의 그 간절한 소망대로 되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꽉 막혀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넘어질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옛날 바로를 꺾으시고 결국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시는 그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 악한 것들을 물리치시고 선한 길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실 거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포기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믿음의 길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나 혼자 남았다고 생각되더라도 포기하지 않아야 하고, 아무리 해도 도무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내가 물리칠 힘이 없고, 해결할 힘이 없고,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길 수 없을 것처럼 생각되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항상 무엇을 기억해야 됩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해야 하는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못 박히셔서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죽음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그 어떠한 소망도 다 빼앗아가 버리는 것이죠.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는 겁니다. 죽음 앞에서는 도무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을 다 빼앗아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셨어요.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산 소망이 되어 주신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그 어떠한 절망의 상황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좌절하고 무너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포기하지 아니하며, 믿음으로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실 것을 믿고 기도하는 가운데 선한 일에 내게 주어진 그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정말 악이 끈질긴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결국 이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가 이런 모세의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내어 보내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그때마다 계속해서 거부해 버리고, 그 어떠한 기적을 보이고, 그 어떠한 재앙을 내려도 꿈쩍도 하지 않고 자꾸만 변개하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모세야, 바로가 설마 이럴 줄 몰랐다. 이 정도 하면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텐데, 바로가 끈질기네. 내 생각이면 이거 한 방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왜 안 되지?” 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셨을까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오늘 출애굽기 11장 9절과 10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몰랐다. 이럴 줄 몰랐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그렇게 만드셨다고 하는 거예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셔서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지 아니하게 만든 것이 바로가 하나님보다 더 강력해서 하나님을 능가하는 어떤 더 파워가 더 큰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거부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고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그렇게 완악하게 만든 거야. 내보내지 않도록 만든 거야. 하나님께서 그 바로의 마음을 주장해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죠. 만일 이 표현이 문자 그대로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정말 하나님은 나쁜 하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악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 이 표현의 말씀인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어느 성경의 한 구절만 읽을 것이 아니라, 성경 다른 곳에 나와 있는 표현들도 똑같이 다 함께 고려하면서 성경 전체에서 우리들을 향해서 가르쳐주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진지하게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되는데요. 오늘 이 표현의 말씀은 그러니까 바로가 행동하는 그 행동의 모든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고 하나님이 사실은 그런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그런 표현은 아닙니다. 성경 다른 곳에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야고보서 1장 13절에서 15절의 말씀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가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의 말씀은 어떤 말씀이에요? 내가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한다면 어떤 사람이 악한 일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선한 일을 하고 싶지만 하나님이 일부러 나로 하여금 나쁜 마음을 갖게 만들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시켜서 내가 할 수 없이 악을 행하고 있다”라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게 야고보서 1장의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지만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주장하고 계시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실 내가 행하는 모든 나쁜 짓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킨 거야.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거라고 그렇게 변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오로지 정말 우리들의 우리가 나쁜 짓을 한다고 한다면 악한 일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욕심 때문에 나의 잘못 때문에 내 악한 품성 때문에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지, 그 책임과 핑계를 하나님 앞에 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이 오늘 읽은 출애굽기의 말씀에서는 무슨 얘기 하냐면, 야고보서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말씀과 같은 말씀을 해주고 싶은 거예요. 아무리 그런데 이렇게 출애굽기에서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속수무책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들려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악인이 판을 치고 있지만,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지 않고 있고 악한 일을 계속하고 좀비처럼 계속 반발하면서 그렇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전혀 컨트롤하지 못해서 그냥 악이 마음대로 판을 치는 것을 하나님께서 전혀 어떤 이렇게 손도 쓰지 못하는 그런 무능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들려주시기 위해서,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실 거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좀 위험한 표현이지만 이런 위험한 표현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언어가 그것을 다 담아내기에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면서 그런 하나님이 속수무책으로 안 당한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표현법으로 약간의 위험한 표현을 출애굽기에서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좀 어느 정도 이해하도록 표현한다고 한다면 예방주사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면역 주사 예방주사에 비유할 수가 있는 것이죠. 의사가 환자들 우리들에게 면역 주사를 줍니다. 예방 주사를 주는데 예방주사라고 하는 게 뭡니까? 면역 주사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몸에 바이러스를 집어넣는 거예요. 나쁜 것을 집어넣는 거예요. 대상 포진 면역 주사 맞으셨나요? 대상포진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대상포진 면역 주사라고 하는 게 뭡니까? 바리스텔라 조스터 바이러스라고 하는 것을 집어넣는 거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 균이 우리들의 몸속에 들어가는데 힘을 약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우리가 백혈구가 싸울 수 있는 그런 힘을 기르게 만드는 그 의사가 우리들의 육신을 완전히 망가지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컨트롤하는 가운데 우리들의 몸에 균을 집어넣는 거죠.
그래서 그 바이러스가 우리를 괴롭게 할 수 있어요. 코로나 주사 맞게 되면 코로나 증상을 겪는 것 같은 그런 아픔을 느낄 수가 있고 우리들의 면역 주사가 우리들의 마음 몸속에 들어오게 됐을 때 우리가 고통을 느낄 수 있어요. 독감 주사를 맞으면 독감을 앓는 것처럼 그런 증상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 하지만 거기에는 목적이 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그 의사가 원하는 그런 방향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바로의 악한 마음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목적을 이루어 나가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아 그 어떠한 것들을 보면서, 정말 잡초처럼 좀비처럼 나타나는 그것들을 보면서 절망해 버릴 것이 아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도 이것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덕 컨트롤 하나님의 통제 아래서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소망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말씀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입니까? 아닙니까?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근데 새로운 피조물이면은 좀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더 이상의 고통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여전히 우리들의 삶에는 아픔이 많아요. 부활의 몸을 입고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까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좋겠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는 고난 끝 행복 시작이면 좋겠는데 우리들의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모세가 바로 앞에 있는 것과 같은 현실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 그래서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방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싸움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하기 때문인 것이죠.
제가 처음 신학교 문을 두드리면서 제 마음 가운데는 하나의 소망이 있었어요. 우리 전도사님이 다니는 학교에 내가 입학하게 되면서 정말 내가 많은 영향을 받았던 그 전도사님 정말 그 전도사님을 볼 때마다 너무나도 참 좋으신 분이고 너무나도 제가 존경할 만한 분이었는데, 그 전도사님이 다니는 학교에 내가 이렇게 입학을 하게 되면서 나도 전도사님처럼 이렇게 정말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곳에 가면 정말 정말 좋은 분들이 다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에 살다가 내가 신학교 안에 들어가니까, “뭔가 대단하겠다”라고 야무진 꿈을 갖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는데, 그 생각이 깨어지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기도 똑같구나. 세상과 똑같구나”라고 하는 것을 쉽게 발견한 것이죠.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여전히 이 바로와 같이 우리 앞에 도전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죠. 모세가 바로 앞에 갔을 때 여러 가지 재앙으로도 꿈쩍하지 않고 또다시 드러나는 것처럼 끈질기게 나타나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럴 때 좌절하고 실망하고 넘어질 게 아니라 믿음의 길을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나아가는 우리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보면서 우리 자녀들의 마음속에 바로가 들어 있는 것 같은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해 나가면서 바로가 우리들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 가운데 우리를 막아서는 것들이 우리 앞에 많이 놓여져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가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구하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