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어른>이라고 하는 그 프로그램에 출연한 “좋은 연예 연구소”의 김지윤 소장이 한 말이 있는데요. 그분에 따르면 사람들이 태어난 출생 순서에 따라서, 보통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그런 특성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냐 둘째냐 막내냐에 따라 특성들이 있다고 하는데요. 첫째의 특징은 “책임감과 통제력이 강하다”라고 합니다. 동생들을 잘 챙기라고 하는 그런 부모님의 말씀을 늘 듣고 자라기 때문에, 책임감이 많이 있는, 그런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동시에 그런 책임감 때문에, 걱정과 불안한 모습도 많이 보인다고 합니다. 둘째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불공평에 예민하다고 해요. 사랑받는 막내였다가 갑자기 생긴 동생 때문에, 그래서 변화된 서열로 인해서 혼란을 겪었고, 그로 인해서 불공평에 대단히 예민한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게 둘째의 특성이라고 합니다. 막내는 어떤 것인가? 막내는 의존적이고, 그리고 첫째나 둘째보다 편안한 유연한 시절을 보내서, 또 부모님들도 막내에 대해서는 좀 관대해지기 시작해서, 보다 좀 여유롭고 또 그러면서 좀 의존적인 그런 특징을 보인다고 하고요. 외동으로 자란 아이의 경우에는, 많이 걱정들을 하는데, 오히려 외동이 여유도 있고 인간관계 속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럴듯합니까? 그럴듯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몇 째일까요? 둘째입니다. 그래서 불공평에 굉장히 예민합니다. 제가 자라면서 느꼈던 감정이 무엇이냐 하면, 저하고 제 형 하고는 2살 차이밖에 안 나요. 그런데 저하고 제 동생 하고는 3살 차이가 나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모님은 형을 형 대접하면서, 둘째와 셋째를 같이 묶어서 대우해 줘요. 그게 얼마나 불공평했는지, 늘 마음속에 불만을 가지고 살았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태어난 그 서열에 따라서, 순서에 따라서, 이런 특성들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사실 모든 사람에게는 모든 특징들이 다 나타난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첫째에게도 불공평에 대한 예민함이 있을 수 있고, 첫째에도 또한 여러 가지 의존적일 수도 있는 그런 마음들도 있겠고,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게 어떤 한 가지가 좀 강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런 면 저런 면들이 다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형제들의 갈등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가정이 있다고 한다면 이삭의 가정일 겁니다. 이삭의 가정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는데요. 누구죠? 에서와 야곱이라고 하는 쌍둥이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날 태어났지만, 조금 몇 시간, 아니 몇 분 일찍 태어났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형이 되고, 조금 늦게 태어났다고 하는 그 이유 때문에 둘째가 되어버린 참 불공평한 세상에서 살고 있던 야곱은 언제나 장자의 자리가 그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의 문화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나라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장자에 대한 그런 특권들이 좀 많이 있던 사회가 고대 근동지방의 사회였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시절에 아주 아주 먼 옛날 고대 근동 시절에 장자들에게는 유산을 두 배로 주는 그런 특징이 있었다고 그래요. 그런 법이 있었다고 그래요. 신명기 21장 15절에서 17절에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는데요.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여러 명의 아내를 두고 살았던, 그 시절에 사랑받는 아내의 아들이라고 해서 늦게 태어났는데, 그 아기를 그를 편애할 것이 아니라, 좀 사랑을 덜 받는 사람의 아들이 장자라고 할지라도, 그 장자는 장자의 대우를 해줘야 된다. 두 배의 유산을 주어야 된다라고 하는 그런 법이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그 신명기의 말씀보다 수백 년 전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니까, 후대에 만들어진 법이 적용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당시에도 장자가 가지는 특권이 굉장히 많이 있었을 거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장자를 바라보는 동생 야곱은 언제나 장자의 자리가 욕심이 났을 것 같아요. 자기랑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고, 만만해 보이는 에서가 왜 형이냐? 왜 나는 동생인가? 늘 불만이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장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그런 갈망이 그의 마음 가운데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자리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가 오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에서가 밖에 있다가 돌아오게 됐는데요. 아마도 사냥을 하느라고 몹시 지쳐 있을 것이고 배고팠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에서가 집에 돌아왔을 때, 이 야곱, 동생 야곱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형이 동생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음식을 나에게 달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좀 먹을 걸 달라고 이야기했을 때, 야곱은 잽싸게 이 기회를 잡아서 장자권을 취할 목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에게 장자라고 하는 권한을 나한테 넘겨라. 앞으로 나를 형이라고 부르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자 이 에서가 그 이야기를 듣고 까짓것 장자권, 그게 내게 무슨 소용인가? 그냥 네가 형해라. 형 하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러자 야곱이 에서에게 말을 합니다. 맹세하면서 나한테 약속해라. 그러자 맹세를 합니다. 장자권을 내게 너에게 넘겨주겠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렇게 해서 장작권이 진짜로 넘어가게 되었을까요? 그게 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고대 근동지방에서, 성경을 보면 그 성경에 있는 그 내용을 보면, 맹세하는 것은 마치 법적인 효과 효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정말로 장자권을 동생에게 넘긴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야곱은 왜 장자권을 갖고 싶어 했겠습니까? 그 장자권이 가지고 있는 그 권한 그것이 너무나도 부러웠기 때문일 것 같아요. 장자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유산을 두 배로 받을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날로 생각한다면 어떤 주식회사에 경영권을 얻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주식회사가 있다고 한다면, 많은 주식을 가지고 있을 때, 대주주가 되어서 경영권을 내가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당시 장자권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권한이고 엄청난 그런 파워였기 때문에, 그 장자권을 갖고 싶은 마음이 동생 야곱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반해서, 형 에서는 장자권에 대해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쉽게 넘겨버린 겁니다. 창세기 25장 34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표현합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팥죽이라고 번역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팥죽 아닙니다. 그 당시 그 지역에서 먹던 그 음식을 만들어서, 붉은 음식을 만들어서,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에서는 그 장자라고 하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가볍게 생각한 겁니다. 장자의 명분이라고 번역했지만 장자의 권리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장자의 권리 그게 뭐 밥 먹여주나? 장자가 된다는 게, 그게 무슨 의미인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아니하면서, 쉽게 그것을 포기해 버린 것이죠. 왜? 무엇 앞에서? 배고픔 때문에. 지금 당장 내 코가 석 자고, 지금 당장 배고프니까, 장자권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나는 배불리 먹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장자의 명분 장자의 권한을 자기 동생에게 넘겨버린 것이죠.
그랬을까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이 누구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게 됩니까? 야곱을 통해서 이어지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주시면서 약속해 주셨던 그 놀라운 축복, 아브라함아,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고, 너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할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아브라함에게 해주셨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이삭에게서 그다음에 누구에게로 가야 정상입니까? 에서에게로 가야 되는 거예요. 에서를 통해서 큰 민족이 이루어져야 그게 정상적인 거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놀랍게도 에서는 에돔 민족이 되어 버렸고, 하나님의 은혜의, 그 축복이 어떤 라인을 통해서 이어지게 되었는가? 그 장자권을 갈망했던 야곱이라고 하는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이어지게 되었고, 야곱의 12 아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 되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이 장자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자라고 하는 것은 특권이고 권한이지만, 그러나 특권과 권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의무와 사명도 있는 것이죠. 장자가 해야 될 일이 있어요. 우리나라의 장자들은 어떤 사명이 있었습니까? 우리 큰딸에게도 늘 제 아내가 이야기했어요. “엄마 아빠 나갔을 때, 네가 엄마야.” 그러니까, 이 아이가 너무나도 많은 그 부담감을 가지고, “내가 왜 얘를 돌봐야 돼?” “내가 왜 언니로서, 이 모든 책임을 내가 져야 돼?” 하면서 굉장히 싫어했던 것 같아요. 그 장자, 맏이가 되었다고 하는 것에 그 부담감을 그냥 떨쳐버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맏이라고 하는 사명, 의무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축복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에서는 그 사명도 버린 것이고, 축복도 함께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나름대로의 자리가 있습니다. 장자면 장자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독특하게 주신 자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아빠라고 하는 자리에 있습니까? 엄마라고 하는 자리에 있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 내에서 나는 어떤 직분의 자리에 있습니까? 회사에서 나는 어떤 직분의 자리에 있습니까? 이 사회에서 내가 서 있는 그 위치가 어느 위치에 있습니까?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있게 하신 자리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까,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리로 우리를 그 자리에 있게 만들어 주신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질문을 던져야 하고, 늘 묵상해야 되고 고민해야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지금의 나처럼 만드셨는가를 늘 질문해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왜 이 모양, 이 모습으로 만드셨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인가를 주셨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것을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런 위치에 있게 하셨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 위치에 있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 사명을 가지고, 이 자리에 있게 하셨는가?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사명을 늘 마음속에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가? 그 사명을 날마다 날마다 묵상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태어나게 하신, 장자가 되게 하신 그 사명을 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귀찮게 여겼고, 가볍게 여기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아니한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있게 하신 그곳, 그곳은 아무런 의미 없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는 내가 나이가 많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이제는 내가 사람들에게 더 이상 해줄 게 없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지금 나로 하여금 그 자리에 있게 만드신 것은 그 나름대로의 사명이 있어서 그 자리에 있게 해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고 목사님 나 이제 더 이상 더 이상 살기 싫고 하나님 나를 빨리 천국에 들여다 보내줬으면 좋겠어요.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그 자리에 있게 하신 이 나이를 먹고 이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거예요. 내가 있는 바로 그 자리, 내가 서 있는 그곳이 왜 내가 그곳에 서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시기 때문에 나를 그 사명의 자리로 인도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힘든 사람 옆에 내가 서서, 왜 내가 저 사람을 늘 도와줘야만 하고, 왜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해야 되나? 아픈 사람 옆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내가 왜 이래야 되는가?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진 자녀들을 기르는 부모님이라고 한다면, 내가 왜 이 자녀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 자녀를 제일 잘 돌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을, 그 아이의 엄마 아빠로 만들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나로 하여금 왜 이 남자 옆에 짝 지어주셨나? 왜 나로 하여금 이 여자의 짝으로 나를 만들어 주셨는가?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가장 적합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 사람 옆에 붙여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명의 자리는 그냥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모든 것을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자리에 있게 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사명을 믿음으로 잘 고민하는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어떤 사명입니까? 그냥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명이 아니라, 사실은 축복의 자리예요. 믿습니까? 그게 행복의 자리예요. 그게 내가 그 사명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고, 내가 그 사명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길이고, 내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이 그게 바로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하도록 만들어준 그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해주신 비유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강도 만난 사람의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고, 레위인이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고, 사마리아인이 그 옆을 지나가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강도 만난 사람의 옆을 지나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다가 길을 가다가 재수가 없어서 그 옆을 지나가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도와주라고 그 사람의 옆으로 그 발걸음을 인도하신 거예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가장 앞장섰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인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왜 자기를 그 사람 옆으로 지나가게 해 주셨는지를 망각해 버렸어요. 그리고 그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냥 외면하면서 지나가 버린 것이죠. 마치 무엇과 같아요? 에서가 장자권을 가볍게 여긴 것과 마찬가지로, 제사장과 레위는 그 강도 만난 사람의 옆을 그냥 지나쳐버리고 만 것이죠.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도 그 옆을 그냥 지나칠 수 있었지만,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 사람 옆으로 지나가게 만드셨을까 도와주라고 지나가게 하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 재물을 주셨을까? 그 사람을 도와주라고 재물을 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시간을 주셨을까? 그 사람을 위해서 수고하라고 시간을 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나귀를 주셨을까? 그 사람을 태우고 가라고 나귀를 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모든 것,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있게 하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사람을 돕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행복이요, 기쁨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룻기에 보면 룻이라고 하는 여인이 나오는데요. 모암 여인인데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남편이 죽어서 그래서 이제 과부가 되었을 때 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된 여인이 룻이라고 하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룻이라고 하는 여인을 여인을 다시 결혼해 주어야 될 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좀 잘 이해가 안 되는 옛날에 법이 있었는데, 그 법이 무엇이냐 하면, 형사취수라고 하는 제도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형수가 남편이 죽었을 때, 형이 죽게 되면 동생이 형 대신에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해서 결혼하고, 그래서 형을 위해서 자식을 낳아주게 되는 법이 형사취수 제도예요. 오늘날에는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게 있었어요. 왜 그런 법이 있었을까요? 그 당시에 여성 혼자 고대 근동 지방에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기 때문에 그래요. 그 당시의 삶 자체가 가족을 이루어야 되고, 그래서 거기서 먹고살 수 있는 그런 사회였기 때문에 과부가 되면 그 과부가 된 여인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동생이 결혼을 해서 먹을 것을 책임져주고, 그리고 그 가정을 이루게 만들어주는 그런 법이 과거에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룻이라고 하는 사람이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가장 순번에 따라서 제1번 친족이 룻과 결혼을 해야 되고, 룻의 가정의 여러 가지 그 재물들을 재산들을 회복시켜 줘야 되는 그런 사명이 제1번 제일 가까운 친족에게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보아스라고 하는 남자가 이 룻이라고 하는 여인을 사랑하는데, 그 1번 친족에 비해서 2번 2번이에요. 순서 순번이 그러니까 이 보아스가 2번 순번이기 때문에 1번 순번에게 가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룻이라고 하는 여인이 있는데, 당신이 순번에 따라서 이 여인을 거두고, 이 여인을 위해서 가정을 일으켜주고, 재산을 다시 회복시켜 주는 그 일을 해야 될 텐데 “당신이 하겠습니까?”라고 물은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하겠다고 했을까요? 안 하겠다고 했을까요? 안 하겠다고 한 겁니다. 룻기 4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이 사람의 이름은 이름조차 기록이 안 됐어요. 누군지 몰라요.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부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이 룻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의무를 다하고, 그래서 룻을 거두어 주고, 그 가정을 일으켜줄 책임이 있는 1번 순서를 맡은 사람이 “나는 못하겠다”라고 발뺌을 한 거예요. 왜? 손해 볼까 봐. 재산에 손해를 보고, 여러 가지 손해 볼 것이 두려워서, 그 사명을 피해서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누가 그 사명을 취합니까? 보아스라고 하는 사람이 룻을 거두어 드리게 되는 것이죠. 그 결과 그 보아스는 어떠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메시아의 라인 가운데 들어오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된 것이 이 보아스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다윗 왕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고요. 이 보아스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메시아가 탄생되게 되는 놀라운 그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이 보아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됩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 우리가 늘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왜 이 자리에 넣어 주셨을까를 늘 질문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025년이 시작됐습니다. 2025년도에 우리가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예상치 못한 놀라운 사명을 우리들에게 주실 때가 있어요. 우리로 하여금 만나게 하는 사람, 우리로 하여금 있게 하신 그 자리, 우리로 하여금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사명들을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될 때, 아이고 힘들어 아이고 고통스러워하면서 회피하고 도망갈 게 아니라 에서처럼 까짓것 장자권 난 필요 없다고 하면서 도망치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라고 한다면 아멘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알의 밀이 있다고 한다면 그 밀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땅에 떨어져 썩어서 수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죠. 그 수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미리 먼저 땅에 떨어져 썩어져야 하는 사명이 있듯이, 사명의 무거움만 보고 도망 다닐 것이 아니라, 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있게 하신 바로 그 자리에서 순종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의 면류관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2025년 한 해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갑자기 맡겨주시거나,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그 사명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 그 축복, 그 능력들을 우리 모두를 받아들여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사명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 못 박혀 피를 흘려야 되면은 그 놀라운 그 책임의 중압감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피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셨어요. 너무나도 힘들어서 하나님 내가 이거 못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이거 피하면 안 됩니까? 그렇게 기도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었을 때,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고백하며 우리 위하여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게 되었을 때 우리 모두가 구원받게 되었고, 바로 그 주님의 그 능력 때문에 그 주님의 헌신 때문에 우리 모두가 구원받게 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언제 어느 자리에 서 있든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사명의 길이 축복의 길이오, 축복의 길이 사명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