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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의 비극 (창 11:1-9)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생각되는 한 이야기를 살펴보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버리신 것이죠. 말이 서로 다르게 만들어 버렸다고 하는 그 이야기가 오늘 창세기 11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게 되자,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그 쌓던 것을 중단해 버리고, 그냥 흩어져 버린 이야기이죠.


이 세상의 언어가 몇 개나 될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가 총 몇 개 정도 될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이번에 한번 검색을 해봤어요. 그랬더니 놀랍게도 7,151개나 된다고 합니다. 깜짝 놀라셨죠? 정확한 건 아니고, 어떤 통계는 6천여 개, 어떤 통계는 한 7천여 개 나오는데, 우리가 세볼 수 없으니까, 믿거나 말거나인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엄청난 숫자의 언어가, 다른 언어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 체계로 서로 소통하는 방법이 7천여 가지나 된다고 하는 것이 정말 놀라운 것이죠.

특별히 아주 재미있는 것을 보았는데요. <파푸아 뉴기니>라고 하는 나라가 있는데 어느 나라죠? 저 남태평양에 있는 호주보다 약간 북쪽에 있는 섬나라인데, 그 <파푸아 뉴기니>라고 하는 나라에는 총 840개의 언어가 있다고 합니다. 놀랍죠? 믿거나 말거나일 것 같아요. 아무튼 그 수많은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런데 이 언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파워가 되는 것이죠. 강대국 사람들은 그 언어가 아주 하나의 무기가 되고, 하나의 파워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정말 언어 때문에, 우리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저쪽 나라 사람들은 언어를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우리는 늘 언어를 공부해야 해서, 유치원 아이들부터, 언어를 공부하느라고 고통스러움을 당하는, 그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거죠.

하지만 요즘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말 한국말을 배우려고 하는 상황이니까, 그만큼 우리나라의 그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고, 우리나라의 파워가 그만큼 강해진 거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한번 보니까, 한국말을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알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한 10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은 아닌데, 아무튼 이런 세상에서 여전히 영어가 많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요. 그래서 영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저도 미국에 처음 유학을 가게 되었을 때, 유학을 갈 수 있을 만큼의 그런 토플 성적은 나와서, 책은 읽고 그리고 쓸 수는 있었겠지만, 실제적으로 생활 언어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맥도널드에 가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이상한 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고통스러운 시절들을 겪었던 그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언어에 대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늘 생각나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이런 바벨탑 사건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는 그런 아쉬움이 있는 거죠. 물론 이 바벨탑 사건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언어가 다 탄생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아무튼 이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의 말이 통하지 않고, 대화가 단절이 되고, 의사를 잘 전달할 수 없는, 그런 어려움을 겪게 돼서, 그래서 바벨탑을 짓다가 이제 중단해 버리고 흩어지게 되었다고 하는 이 창세기 11장의 이야기를 오늘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바벨탑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질문이 하나 떠오르죠.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바벨탑을 짓는 게 왜 잘못인 것이죠? 성을 짓는다고 하는 것 건축을 하는 게 왜 잘못이에요? 도시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일까요? 도대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창세기 11장의 말씀인 것 같아요. 사람이라고 한다면 도시를 만들 수 있고, 그리고 건축물을 세울 수 있는데, 그렇게 높은 건물을 짓는 것이 그것이 죄인가? “그것이 하나님 앞에 큰 잘못인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우리가 던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이유를 좀 한번 찾아보았으면 좋겠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한번 찾아봤으면 좋겠는데, 그 문제를 찾아보려고 한다면, 이들이 바벨탑을 쌓으면서 했던 그 말, 그 바벨탑을 쌓으려고 했던, 그 동기를 먼저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 11장 4절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러니까 바벨탑을 쌓는 그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늘 높이 쌓아서, 그래서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지는 것을 좀 막아보자”라고 했던 그 동기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데요. 이게 잘못인가요? 이게 무엇이 문제인 것이죠? 아무 문제가 없어 보여요.

하지만 우리가 이전에 살펴보았던 말씀을 한번 살펴본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우리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 9장 1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이 말씀이 예전에 누구에게 해주었던 말과 똑같다고 그랬죠?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말과 똑같아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사명을 준 겁니다. 그들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신 거예요. 그 해야 할 일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이 세상에 생육하고 번성해서 다 퍼져서, 온 땅을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다스리고,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나라로 만들어가라고 하는 그런 사명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었던 것이고요. 노아의 홍수로 인해서 온 세상이 다 망해버리고, 이제 새로운 재창조가 이루어졌을 때, 노아와 그 식구들을 향해서 해주셨던 그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온 땅에 충만하게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만들어가라고 하는 그런 사명이 그 새로 남겨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창세기 11장에 나와 있는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그 사명을 망각해 버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는 온 땅에 흩어져서 온 땅을 정복하고 온 땅을 잘 만들라고, 온 세상을 잘 하나님의 그 땅으로 기경하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이 사람들은 흩어지는 게 싫었던 거예요. 멀리 나가는 게 싫었던 거예요. 왜? 그냥 자기들끼리 모여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 모여 있으려고 그랬을까요? 그리고 왜 모여 있는데, 왜 높은 탑을 지으려고 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홍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이죠. 그 옛날 노아 시절에 홍수로 인해서 온 세상이 멸망했었던 그 사건이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트라우마로 남아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잘 살다가, 우리도 홍수로 인해서 죽으면 어떡하냐? 홍수가 닥쳐서 우리가 망해버리면 어떡하는가? 우리가 뿔뿔이 흩어져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보다, 우리가 함께 모여야 되고, 벽돌을 굽고 탑을 쌓아서, 그래서 하늘 꼭대기까지 올려서,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바벨탑을 쌓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논리이고 생각이었던 것이죠.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가득 깔려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 다시는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으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아 이제는 망하지 않겠구나. 우리가 저기 가서 사명을 감당해도, 우리가 저기 가서 온 세상을 정복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물에 빠져서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가지고 감당해 나가는 것이, 그게 우리들이 가져야 될 마음의 자세일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나님을 믿지 못한 거예요. 혹시 홍수로 인해서 우리가 죽으면 어떡하는가? 그러면 우리를 살려줄 것이 무엇인가? 바벨탑을 지어서 하늘 꼭대기까지 쌓아 올려서, 그 위에 피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그 사명을 망각해 버리고, 그냥 그 자리에서 탑만 쌓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지금 이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고 있는데 그 바벨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종의 우상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눈, 코, 입, 귀, 손 발이 있는 그런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 절하는 게 우상이 아니라, 물론 그게 우상이겠지만, 그것만이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것에 우리가 소망을 거는 것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것이죠. 우리를 살릴 수 없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고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것에 우리의 소망을 거는 게 그게 바로 우상이 되는 것이죠. 지금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우상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줄 것이 무엇인가? 탑을 쌓고 그 탑이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탑이 우리를 안전하게 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바벨탑이라고 하는 우상을 쌓아놓고 있는 것이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들이 다 있어요. 그 사명들은 다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내보내신 것이 아니라, 다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게 당연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그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어요. 내가 이런 사명을 따라 살다가, 내가 망해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이렇게 살다가, 결국 내가 빈털터리가 되면 어떡하지? 이러다가 내가 손해 보는 거 아닌가? 나의 안전과 행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사명을 포기해 버리고, 나 자신의 안전과 행복만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쌓아갑니까? 돈이라고 하는 바벨탑을 쌓아가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 무엇인가? 돈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생각해서 돈이라고 하는 바벨탑을 쌓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바벨탑을 쌓아갑니까? 명예라고 하는 바벨탑을 쌓아가는 겁니다. 정치라고 하는 바벨탑을 쌓기도 하고, 관계라고 하는 바벨탑을 쌓기도 하고, 성공이라고 하는 바벨탑을 쌓아가면서, 이것이 나를 살리고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안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더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우리가 이 바벨탑 사건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제일 처음에 갖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잘못이지? 건물을 짓겠다는데, 탑을 쌓는다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잘못일까? 이게 아무런 잘못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성공의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죠. 우리를 살릴 거라고 생각되는 헛된 망상에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으면서, 이것이 문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만의 바벨탑을 쌓아가는데, 결국 그 바벨탑이 우리를 건져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갉아먹어버리고, 우리를 피폐하게 만들어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좀 추상적으로 추상적으로 말씀을 드렸는데, 가장 쉬운 예를 하나 든다고 한다면, 누가 바벨탑을 쌓아갔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볼 때는 강도 만난 사람의 옆을 지나간, 그냥 지나쳐버린 제사장과 레이윈들이야말로 자신만의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옆을 지나간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죠?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고 살려줘야 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강도 만난 사람의 옆을 지나가게 만드신 것은 그냥 우연히, 어쩌다 보니까, 지나가게 만드신 것이 아니에요. 우리로 하여금 그 옆을 지나가게 만드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가진 것으로, 우리의 시간으로, 우리의 열정으로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그 강도 만난 사람의 옆으로 지나가게 하신 것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이 제사장이라고 하는 사람은 레위라고 하는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서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돕다가는 나도 강도 만날 위험이 있는 겁니다. 불안한 겁니다. 안전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겁이 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빨리 피하고 마는 겁니다. 제사장과 레위는 그 강도 맞는 사람을 피합니다. 왜 피합니까? 내가 가진 돈으로 이 사람을 도와주면 그 돈을 가지고 내 행복을 위해서,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것을 못 쓰게 되니까, 그러니까 내 안전이 무너지고 내 행복이 무너질까 두려워서, 그 강도 맞는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사람은 그냥 지나칩니다. 왜 그냥 지나칩니까? 내가 시간을 내서 그 사람을 도와준다고 한다면 우리 가족을 위해서 쓸 시간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불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안전에 바벨탑, 우리 자신의 행복에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이런 불안한 마음을 내버리고, 하나님께서 다시는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던 그 약속을 믿고, 이제는 우리가 그 약속을 믿고, 어디에 가서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온 세상에 퍼져서 주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그런 담대한 믿음이 있어야 했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한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가 망하는 게 아니라, 그게 바로 행복의 길이고, 그게 바로 기쁨의 길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주신 이유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바벨탑을 쌓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와 이 사람들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흩어버리셨어요?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흩어버리신 것이죠. 여기서 주목해 볼 게 있다고 한다면 물로 심판하지 않았다고 하는 점입니다. 왜 물로 심판하지 않으셨죠? 나쁜 짓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 않은데 왜 물로 심판하지 않으셨죠? 약속했으니까. That’s so simple. 간단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어요. 악한 죄인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물로 심판하지 않으신 거예요. 대신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사람들의 말을 혼잡하게 만들어 버리신 거죠. 알아듣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게 만드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서로 대화가 안 되게 만든 거예요. 그래서 벽돌 달라고 하는데 물을 주고 서로 대화가 안 되지 않으니까, 서로 진행이 안 되는 것이죠. 요즘 우리 집에서도 대화가 안 됩니다. 제 아내가 이거 달라고 그러면, 저는 이거 가져오고, 그런데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고 대화가 되지 않는 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골탕 먹이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영어 공부하다가 죽으라고 그렇게 만들어 버리신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모든 선택은 그것이 우리들에게 나빠 보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사실은 우리들에게 은혜로운 선택이라고 믿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게 나쁜 것만이 아니라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이제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그 바벨탑을 쌓는 일을 중단해 버리고 만 겁니다.

우리는 흔히 하는 이야기로 우리가 마음이 통해야 된다. 서로 하나가 되어야 된다. 마음이 맞아야 되고, 서로가 단결해야 된다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는 게 좋은 것인가요? 어떤 것인가요? 좋은 거예요? 하나가 되는 게 나빠요? 좋은 거예요! 좋은 거예요. 우리가 하나가 되고 일치하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늘 기도했던 그때 마지막 순간에 기도했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이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해 주옵소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셨어요.

그런데 하나가 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이야기는 전제가 있어요. 그 전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일이 선한 일일 때, 하나 됨이 아름다운 것이고, 그 목적하는 바가 좋은 일일 때, 하나 됨이 정말 좋은 것이 되는 것이지, 언제는 나쁜 일이 되겠습니까? 의도하는 바가 나쁜 일이면, 하나 되는 것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언제 마음이 통해야 되는가? 선한 일에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되는 것이지, 악한 일에는 마음이 통하지 않는 게 훨씬 더 나은 거예요.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는 일에 한마음이 되어버렸어요. 너무나도 안타까운 한 마음인 것이죠.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아먹는 일에 한마음이 든 거예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말하는 데 한마음이 든 거예요. 하나가 되는 게 무조건 다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가 되기 전에 먼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과연 이것이 선한 일인가?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인가? 과연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실 만한 일인가? 만일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 나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인가? 그 질문을 던진 다음에,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이라고 한다면, 하나가 되는 것이 당연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에요.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욕하고 비난하고 그리고 악을 행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우리가 무엇이 마음이 맞아야 되는가? 모든 일에 마음이 맞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인가 판단하며, 과연 그것이 기뻐할 만한 일이라고 할 때 우리의 마음이 합해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 말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친구 따라 아무 데나 가면 되죠? 됩니까? 아니요. 친구가 좋은 데 가자고 하면, 가야 돼요. 친구가 선한 일에 가자고 하면 가야 돼요. 하지만 친구가 악을 행하자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말자고 한다고 하면, 그 말은 마음을 같이 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잠언서 1장 10절에서부터 16절의 말씀에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스올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항상 멈추어 서서 질문을 던져봐야 돼요. 과연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인가? 미워하고 시기하고 욕하고 가르고 욕하는 그런 일에 우리가 동조할 것인가? 아니면 감싸주고 사랑을 베풀고, 선을 베풀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선한 일에 우리가 함께할 것인가? 말씀 사경회에도 함께 할 것인가? 따져보고 선한 일이라고 한다면 함께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막으며 예수님 이 길을 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앞길을 가로막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음을 함께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맞추었습니다. 내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주여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한다면 모든 뜻이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어서 결국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그 십자가 위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예식을 거행하게 될 텐데, 이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깊이 묵상하며 저희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신 그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들의 삶도 되돌아보는 귀하고 복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지금 나는 누구와 마음을 맞추고 있는가?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인가? 과연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 예수님께서 나와 같은 상황에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일을 하셨겠는가? 질문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가 주님의 뜻에 맞추어 가는 그런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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