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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의 심판 (창 7:1-5)

지난 시간에 우리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었습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참 안타까운 이야기죠. 무엇보다도 사랑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아껴주어야 할 형이, 동생을 죽이게 되는, 그런 엄청난 비극의 이야기를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돼버렸을까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아름다운 세상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 인생이 오염되어 버린 것이죠. 우리의 마음이 타락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아담 이래로 사는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참 안타까운 일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계속해서 안타까운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들이 쭉 나열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악명 높은 한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 악명 높은 한 사람의 이름이 누군지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라멕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라멕이라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악한 사람이었는가? 얼마나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는가? 창세기 4장 23절에서 24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이것이 라멕이 한 이야기인데요. 이 라멕이라고 하는 사람은 악한 짓을 벌려놓고도, 저질러 놓고도 아주 뻔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우선 아내를 하나가 아니라, 둘씩이나 두었다고 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도 잘못이겠는데, 자신이 조금 다친 걸 가지고, 사람을 죽여버린 겁니다. 자신에게 조금 상하게 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그런 악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악한 짓을 했으면, 마음의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야 되잖아요? “아, 내가 정말 이런 악한 일을 하다니” 하면서, 정말 마음속에 그런 양심의 가책이라도 있어야 될 텐데, 오히려 이 라멕이라고 하는 사람은 더 뻔뻔한 겁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나의 상함으로 인해서,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그런 뻔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인을 향해서 베풀어 주셨던 은총마저도 조롱해 버립니다. 가인이 자기 동생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인을, 그 가인을 보호해 주시고, 가인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신 적이 있는데, 오히려 그 하나님의 은총을 조롱하면서, 모욕하면서, 가인이 가인을 해하는 자에게 7배의 벌이 있다고 한다면, 나를 위해서는 일곱 77배의 벌이 있을 거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모습들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아담의 아들 가인, 그리고 그 가인의 후손들 가운데, 라멕이라고 하는 사람이 정말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뒤에 계속해서 태어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그 뒤에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하고 선한 길을 갔을까요? 더 나쁘고 더 악한 길로 갔을까요? 후자죠. 더 악한 길로 갔습니다. 더 악한 길을 가게 되었을 때, 어느 지경까지 가게 되었는가?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 겁니다. 창세기 6장 5절에서부터 7절 말씀에 보면,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었는가에 대해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죄악이 너무나도 심해서, 하나님께서 참고 또 참고 또 참고 하시다가,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이제 하나님께서 홍수로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멸하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창세기 6장에서부터 8장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 오로지 노아라고 하는 사람만큼은, 그 사람의 가족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창세기 6장에서부터 8장 말씀까지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7장의 말씀만 읽었지만, 6장에서부터 8장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늘 말씀을 같이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는데, 이런 노아의 홍수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떠오르게 될 겁니다. 어떤 질문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과연 이러한 홍수가 세계적인 전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을까? 아니면 그곳에서만 그 지역에서만 일어난 일이었을까라고 하는 질문을 던질 수가 있었겠고요.


정말로 이런 일이 있었을까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타락을 묘사하는 내용 중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해서 네피림을 낳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고, 아들들은 누구고, 사람의 딸들은 누군가? 도대체 네피림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질 수가 있을 것이고, 또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이 과연 이렇게 좌충우돌하는 하나님인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질문들을 다 대답해 드릴 수는 없을 것 같고요.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과연 이 홍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어떠한 메시지를 발견하고,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오늘 이 시간 잠시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창세기 6장 6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사람들이 죄를 짓는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지었다고 하는 것을 한탄하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꼭 누구랑 비슷해요? 우리랑 비슷하거든요.

우리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늘 무엇인가를 해놓고 후회하는 게 우리들의 모습인 거죠. 어 여러분들을 많이 후회해 보셨습니까? 저는 많은 후회가 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후회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가장 크게 후회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을 기를 때 내가 실수했던 것, 그때 아이들을 좀 더 사랑해주지 못했고, 그때 아이들에게 좀 더 자상하게 해주지 못했고, 그때 아이들과 좀 더 놀아주지 못했고 했던 그 모든 것들이 늘 후회스러웠어요. 내가 그러지 않았어야 되는데, 왜 그랬을까? 늘 후회하면서 사는 게 어쩌면 우리 인생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창세기 6장에서부터 8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도 어쩌면 사람과 비슷해 보여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만들어 놓은 다음에, 그리고 사람들을 잘 만들어 놓았는데, 그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죄를 짓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는 것 같은, 내가 괜히 사람을 지었나? “내가 괜히 세상을 창조했나?”라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과연 하나님이 우리가 믿고 신뢰할 만한 하나님인가? 과연 이렇게 좌충우돌하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어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표현이 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렇게 좌충우돌하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고 아끼신다고 하는 의미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죠. 우리 자녀들이 만일 잘못된 길로 간다고 하면 부모님들의 마음이 어떨까요? 정말 아프죠? 우리 아이가 좀 잘 됐으면 좋겠는데, 우리 아이가 좀 늘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우리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나쁜 사람들과 어울려서 지내고, 그리고 여러 가지 잘못된 일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요. 그때 부모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들어요? 슬픈 마음이 드는 거죠. 이 아이가 왜 이러는가? 왜 이렇게 잘못된 길로 가는가? 하면서, 부모의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을 겁니다. 그럴 때 부모님이 할 수 있는 말이 뭐예요? 아이고 내가 이러려고 배 아파서 아기를 낳았나? 아마 그런 말을 할 거예요. 근데 그 말은 후회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이 아이가 잘 됐으면 좋겠는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는데, 속 썩이는 그 아이를 보면서, 이 아이가 왜 이렇게 잘못된 길로 가는가? 하면서 애통해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지, 그 아이를 잘못 낳았다. 그런 의미의 표현이 아닌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면 슬퍼하십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 악한,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애통해하셨다고 하는, 이 모습을 오늘 우리가 묵상하면서, 하나님은 지금 오늘 나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애통해하실까? 그것을 생각하며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지. 하나님께서 애통해하는 그런 삶을 살면 안 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의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실까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그 말씀대로 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걸어간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시기와 질투가 가득하고 분노가 가득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과 싸우며 살고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애통해하시는 것이죠. 왜 애통해야 할까요? 이러다간 우리가 망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산다고 한다면, 우리의 길들이 행복의 길로 가게 되겠지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며 성내며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살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에는 망하는 길로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그 앞길을 바라보시게 될 때, 애통해하며 슬퍼하실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죠.

따라서 오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내가 지금 오늘 하는 모든 생각이나 행동이나 결정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나님을 애통하게 할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선택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심판이 아니에요. 심판은 어떻게 하죠? 누군가 파울을 범하면 옐로카드 꺼내는 겁니다. 아주 심각한 파울을 범하면 레드카드 꺼내서 퇴장시켜 버리죠. 아무런 마음의 감정의 동요가 없어요. 그냥 잘못하면 옐로카드, 더 심하면 레드카드 그냥 내버리는 거죠. 왜 심판은 그런 감정을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미건조하게 행한 대로 그대로 내는 것이 심판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죄악을 저지르면 그냥 심판해 버리고 끝내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될까 봐 걱정해야 하면서 불안해하면서,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선한 길로 인도하길 원하시는, 우리 부모님과 같은 그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살기를 결단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인류가 타락해 버려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홍수로 이 세상을 심판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죄가 쌓이고 하나님을 반역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건가요? 아니면 언젠가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인가요? 최후의 심판이 있는 것이죠. 물론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 악을 저지르면서도 사람들은 아무런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요. 악을 저질러 봤는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이 되거든요. 나쁜 짓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더 나쁜 짓을 더 많이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에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냥 몰라서 심판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이유가 뭐예요?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심판하지 않는 것이거든요.


베드로후서 3장 8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갔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들이 드러나리로다.” 하나님은 그냥 심판해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참고 계시는 거예요. 어떻게 참고 계셔요? 부모님처럼 참고 계시는 거예요. 심판을 하셔야 되는데 심판하는 걸 자꾸만 연기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왜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이 잘못하면 어떻게 해요? 너 새 탈 동안에 빨리 와 안 오면 혼낼 거야 그런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근데 우리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요. 자 그러면 카운트 다운을 시작합니다. 카운 카운트를 하는 거죠. “셋 할 동안에 빨리 와” 하나, 둘, 그리고 셋 합니까? 셋 하는 게 아니고, 하나, 둘, 둘 반, 그래요. 왜? 부모님의 목적은 혼내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빨리 오라고, 빨리 돌이켜서 오라고 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셋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둘 반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셋 하려고 하다가 “둘 반의 반” 그래요. 왜? 기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천년을 기다리신 다음에, 이제 더 이상 못 참겠다 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천년을 기다렸지만, 하루같이, “이제 겨우 하루 참은 거야” 하면서, 또 다른 천년을 또 기다리고 계시고, 또 다른 천년을 기다리시며, 우리 모두가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세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빨리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런 삶을 사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옳은 것이지, 기다려도 내가 죄를 지어도 아무런 심판이 없네. 괜찮네. 괜찮네 하면서, 그냥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거구나 하면서, 계속 안일하게 회개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망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이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없어지는 거죠. 예? 아니에요.

지난 시간에 지난번에 제가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건강해 보이나요? 건강해 보이지만 요 근래 제 가슴에 무슨 증상이 느껴졌냐면 가슴이 쪼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잠자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이 좀 쪼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예배 시간에 앞으로 나오기 위해서 앉아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쪼이는 느낌이 오는 거예요. “아무 문제없겠죠”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조치를 안 하면 어떻게 돼요? 큰일 나는 겁니다. 심근경색이 와서 죽을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겁쟁이잖아요. 다른 데는 병원 안 가는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맡았어요. 그랬더니 혈관을 쫙 보면서 초음파로 찍어보면서 혈관을 보더니만 혈관이 좀 혈관에 뭐가 좀 끼어가네요. 지금 심전도 검사해 보니까 괜찮은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형술 한번 해봅시다 해서 다음 약속을 하고 돌아왔는데요. 제 마음에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하면서, 검사도 하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다고 한다면, 괜찮을 거야 했으니까, 계속 괜찮겠죠? 아니에요. 내가 없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고, 우리의 혈관 속에 계속해서 무엇인가가 끼기 시작하고, 그래서 혈관이 좁아지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에 마비가 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뚫어줘야 되고 그것을 해결해야 되고 약도 먹어야 돼요. 지금 약을 받아와서 콜레스테롤 약을 매일 먹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어제 안 먹었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잘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혀 건드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모든 비유들이 대부분은 다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한 비유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나 열 처녀의 비유나 그물의 비유나 불의한 청지기 비유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나 예수님께서 해주신 대부분의 비유의 말씀이 무엇이냐면 너희가 지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그냥 안심하고 있지 마라. 어느 날이 다가온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날이 다가오니 그날을 기억하면서 지금 무엇을 해라. 지금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게 예수님의 말씀의 가르침인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홍수가 내려서 120일 만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고 물로 온 세상을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해 주셨을 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그냥 일상을 그대로 살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그냥 살다가 결국 홍수가 내리는 날 다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 노아는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방주를 만들기 시작한 거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방주를 만들어서 방주에 넣을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그 방주에 그 가족이 모두가 드러나게 되어서 그래서 그 노아와 그 가족은 홍수가 일어났을 때에도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나서 그래서 구원을 받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어려웠을 겁니다. 왜 어려워요? 지금은 비 한 방울 안 떨어지는 시기에 방주를 만들라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순종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또 그 방주를 어디다 만들어라? 산꼭대기에다 만들어라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 방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하던 모든 일들 가운데서 대부분의 많은 시간을 거기에 투자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만들기가 어려운 겁니다.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방주를 만들었을 때, 그래서 온 세상이 망하는 그 순간에 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사는 이 삶은 그저 홍수 전에 사람들의 삶처럼 아무 문제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우리의 혈관이 자꾸만 자꾸만 좁아지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심장마비가 오고 갑자기 심근경색이 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악이 계속해서 쌓아져 가다 보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우리가 설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노아와 그 가족은 무엇 때문에 살았습니까? 방주에 들어가서 살은 것이죠. 홍수가 내렸을 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박태환처럼 수영을 잘하면 살아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아무리 수영을 잘해도 살아날 수가 없어요. 오늘 우리의 삶이 정말 거룩하고 정말 진실하게 살고 선하게 사는 노력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기준 앞에는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영을 잘해도 홍수가 나면 속수무책인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거룩하게 살고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그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의 더러운 모습들이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래서 우리들에게 누가 필요합니까?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는 방주가 필요한 거예요.

그 옛날 노아와 그 식구들이 방주 속에 들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방주 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고 신뢰하며 예수님의 방주 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영원한 구원의 능력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우리들의 삶을 그냥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살다가 망하는 그런 길로가 아니라 노아가 그 옛날 방주를 준비하며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주님 앞에 온전히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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