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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일꾼 (롬 15:14-16)

바울 사도는 “자신이 누구인가”라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잘 알았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사명에 따라 살아간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원래 이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교회를 핍박하며 다니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완전히 그 삶이 180도로 변해서,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산 것이고요. 평생토록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5장 16절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면서, 뭐라고 표현하냐면, “나는 예수의 일꾼이다”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예수의 일꾼이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고요. 예수의 일꾼인데,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방인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런 역할을 하는 제사장이다.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이 바울 사도는, 자기가 이런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오늘 로마서를 거의 마무리해 가는 이 시점에, 내가 예수님의 일꾼으로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끝까지 살아왔던 것일까요? 어떻게 이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이런 확신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가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먼저는 예수님께서 바울 사도가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바울이 바울로 변하기 전에, 이 사람이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는 정말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바울 사도가 앞으로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이죠.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에게 들려주신 말씀인데요. 주님께서 이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에게 가서, 저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을 잘 데리고 와 가지고, 그 사람을 잘 인도해 주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아나니아가 주님께 대답을 하는 거죠. “주님, 이 사람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 줄 아시잖아요?” “이 사람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교회를 죽이기 위해서, 교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니는 사람인데, 이 사람, 내가 못 도와줍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해주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은 내가 택한 그릇이다.” 이 사람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택한 그릇이니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임금님들에게, 또한 유대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택한, 나의 그릇이니까, 가서 데려오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이죠.

아마도 바울 사도는 이 아나니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 될 거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불러주셨는가? 주님께서 왜 나를 만나주셨는가? 그냥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이런 사명을 위해서 나를 불러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런데 아마도 내가 이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런 제사장의 역할을 할 거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아마 잘 몰랐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경험을 통해서 유대인들은 복음을 잘 안 받아들이는데, 이방인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서, 바울 사도의 사역의 방향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점점점점 옮겨가기 시작하게 된 것이죠. 사도행전 13장 44절에서부터 46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누구에게로?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러 다닐 때, 이방인에게 먼저 전했겠습니까?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했겠습니까? 당연히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하는 것이죠. 말도 통하고, 자기 종족이고,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전하는 과정 가운데, 유대인들은 거부하는 겁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바울 사도의 사역의 방향이 점점점점 유대인에서 이방인에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죠. 바울 사도의 마음 가운데는 유대 종족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싶고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었었겠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꾸만 거부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바울 사도는 “안 되겠다. 이제는 이방인에게 가겠다.”라고 하면서 방향을 선회하게 되는 것이죠.


바울 사도는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여러 가지 난관들을 만납니다.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럴 때 좌절하고 실패하고 낙망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고민하는 거죠. 그 순간에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실패를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반대를 주셨을까? 왜 이러한 어려움을 만나게 해 주셨을까를 생각하면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보다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나갔을 거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전에 이 바울 사도가 아시아 지방에서, 지금의 튀르키예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었는데요. 그런데 하는 일들마다 다 막히는 겁니다. 복음을 아시아에서 전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길이 막히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 때문에 막혔는지는 사도행전에서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일이 안 되는 거예요.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 밤 꿈을 꾸게 됩니다. 꿈을 꾸게 되는데, 무슨 꿈을 꾸느냐? 저 마게도냐, 지금의 그리스 지방에 있는 곳에 있는 청년이 바울 사도를 향해서 부탁하는 겁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좀 도와주세요.” 건너와서 우리를 좀 도와달라고 하는 그 꿈을 꾼 다음에, 바울 사도는, 내가 이 아시아에서 전하지 말고, “저 유럽에 가서, 그리스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하면서,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넘어가고, 그래서 유럽으로 향하는 복음의 문이 쫙 열리게 된 이야기가 사도행전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실패를 만나면, 거기서 좌절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보면서 분석하면서, 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어느 방향으로 인도해 주시는가? 고민하는 가운데, 그의 삶을 방향을 틀어가면서,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고, 또한 유럽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바뀌어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일을 자기가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돼요. 내가 못하는 것은 안 하면 되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인데요.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부터 7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게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 사도가 심고, 물 주고, 모든 것을 다 해서, 그래서 열매까지 얻는 그 일을 모든 것을 혼자 다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나는 심는 일을 해야 되겠다. 나는 심는 일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볼로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물을 주게 하실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는, 또 어떤 사람을 통해서, 또 다른 일을 하게 하실 것이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모임이, 그 수고들이 모여서, 그 열매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사명을 철저하게 섬길 수 있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사역자들이 가져야 될 자세가 있다고 한다면, 결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결과가 날까? 이것이 열매가 맺힐까? 내가 이 정도 해가지고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결과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던질 질문은 “결과가 어떠할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이 무엇인가를 보고, 그 사명을 집중해야 되는 것이죠.


지난주에 읽었던 성경이 에스겔서였는데요. 지난주에도 에스겔서를 읽고, 그리고 이번 주에도 우리가 에스겔서를 읽게 되겠는데, 에스겔서의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에스겔서 3장 10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이죠.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사로잡힌 내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너는 가서 뭐 해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거예요. 전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들을까요? 안 들을까요? 그건 몰라요. 안 듣죠? 안 듣긴 안 듣는데, 안 들으니까, 전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 내가 전해도 사람들이 안 들을 거야.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아무런 열매가 맺히지 않을 거야 하면서, 포기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듣든지 안 듣든지, 네가 할 일을 하라. 그렇게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 사명자들이,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자세가 있다고 한다면, 결과가 어떠할 것인가? 어떤 열매가 맺힐 것인가? 그것을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야 되고, 그 질문에 따라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으라고 했으면 심으면 되는 것이고, 물을 주라고 했으면 물을 주면 되는 것이고, 전하라고 했으면 전하면 되는 것이고, 내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맡겨진 그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되면,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고, 모든 것은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일꾼이고, 또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많은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일꾼이고, 또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고 했지만, 나는 바울 사도가 아니에요. “나는 그 정도 사명은 안 가지고 있어요.” 하면서, 이건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셨죠? 아마 그렇게 많이들 생각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울과 같은 전문적인 사역자, 바울과 같은 전문적인 선교사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는 제사장의 역할과 같은 역할을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유효한가요?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가요? 유효합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우리가 다 전문적인 셰프가 되고 요리사가 될 수는 없어요. 그렇죠? 전문적인 셰프가 되고 요리사가 되어서, 정말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매일매일 대접하는 그런 일들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전문적인 셰프가 하는 것이고, 전문적인 요리사가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전문적인 요리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면 요리를 안 해도 되는가요? 아니요.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서 음식을 만들어야 됩니다. 피곤해도 일어나서 음식을 만들어야 되고, 우리 가족을 먹이기 위해서, 아니 내가 먹기 위해서라도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 돼요. 사 먹든지, 뭘 하든지, 아무튼 음식을 어떻게 하든, 요리를 해내야 만들어내야, 그래야 먹을 수 있는 거죠. 저도 김치찌개는 해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 의사도 아니고, 우리가 전문적인 간호사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소수의 사람들만이 전문적인 의사가 되고, 전문적인 간호사가 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병을 치유하고 간호하고 하는 일들은 우리랑 상관이 없는 일인가요? 아니요. 우리 가족 가운데 누군가 아프다고 한다면, 해열제라도 사서 먹여야 되고, 우리 가족 가운데, 누가 다쳤다고 한다면, 반창고라도 가서 붙여줘야 되고, 후시딘이라도 발라줘야 되고, 또 우리 옆에 누군가 심정지로 인해서,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못 본 체할 것이 아니라, 몰라도 어떻게 해야 돼요? 심폐소생술이라도 해야 돼요. 할 줄 압니까? 못해요? 못하지만, 옆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해줘야 돼요. 다른 사람이 없으면, 나라도 해야 돼요.

이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 바울 사도와 같은 전문 선교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다 바울 사도와 같은, 전문적인 그런 목회 사역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가르침에 의하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다 누구인가? 다 하나님의 일꾼들이오, 예수님의 일꾼들이오. 또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내는 제사장의 사명을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옆에 사람을 보고서 얘기해 줍시다. “예수님의 일꾼이십니다.” “제사장입니다.” 옆에 사람 보지 말고 나를 향해서 얘기합시다. “내가 예수님의 일꾼입니다.”

지난주 지지난주에서 여름 성경학교를 하고 수련회를 하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어요. 왜냐하면 우리 선생님들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열정을 다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가지고, 정말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어요. 전문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어서, 이 일만 하시는 분들이 아니라, 다른 전문 직업이 있어요. 자기 일이 있고, 돌봐야 될 자기 가정이 있고, 일해야 될 직장이 있고, 그런데 연차 내고 와서 수고하고, 애쓰고, 우리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정말 최선을 다하는 그런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하고 감동이 되는지 너무나도 고마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다 제사장과 같은 그런 역할을 해야 될 텐데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말 중요한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생명을 살리는 것이죠.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그 비유의 내용 가운데,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다고 한다면, 내가 의사가 아니라도, 지나가면서 그 사람을 위해서 치료해 주고 상처를 감싸주고, 그리고 그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 포도주를 붓고 하면서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어쩌면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큰 강도 만난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강도 만난 것이죠. 주님을 알지 못해서 죽어가는 심령들, 하나님을 몰라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인도하는 그 일이야말로, 영적인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아주 귀중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예수님의 일꾼으로서 제사장의 사명을 어떻게 하면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르치고 선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해가지고는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라고 한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떠들고 외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그래서 오히려 복음에 거부감을 들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예수의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내가 예수님의 일꾼이다”라고 하는 그런 자의식을 가지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이다”라고 하는, 그런 자의식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그런 의식을 가지고 대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왜 만나요? 우리가 직장에서 사람을 만나든지, 어디에서 사람을 만나든지, 그 모든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까? 그 사람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거예요. 오늘 내가 진료하는 가운데 환자들이 우리 병원에 찾아온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서, 그래서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역할들을 전체를 다 할 수는 없어도, 나는 심거나, 나는 물을 주고, 나는 그 조그마한 역할을 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시는 거죠.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한다면 그 아이들을 내가 왜 만납니까? 내가 그 아이들 전체를 다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그 모든 일들을 다 인도해서, 열매를 보게 하는 데까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심는 조그마한 일, 내가 물을 주는 조그마한 일을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리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해서, 그래서 예수의 향기를 맡게 만드는, 그 조그마한 일을 하라고 예수님께서 그 아이들을 우리에게 붙여주시는 거죠.

우리 가게로 사람들이 온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이 왜 우리에게 옵니까? 내가 누구를 만난다고 한다면, 왜 그 사람들을 주님께서 만나게 해 주셨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다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맡겨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전도 대상자고,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양이고, 그냥 만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위한 제사장 역할을 하라고 만나게 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아마 우리 한국 사람들이 잘못 가지고 있는 생각이 있다고 한다면 “손님은 왕”이라고 하는 생각이에요. 손님은 왕이라고 하는 생각은 비즈니스를 하시는 분들이 손님을 그만큼 극진하게 대접하게 했다고 아는 그런 마음의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지, 우리 손님들이 어느 가게를 이용하거나 식당을 이용하거나, 내가 왕처럼 그렇게 거만하게 행동하고 갑질을 해도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나온 이야기가 결코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도 손님이 왕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으로, 내가 가는 곳에서 갑질을 해대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을 주면서, 그렇게 이 사람들을 우리의 종 부리듯이 갑질을 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렇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손님이 왕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떤 왕이 되어야 됩니까? 섬기는 왕이 돼야 되죠.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떤 왕이 돼야 돼요? 섬기는 왕, 섬기는 제사장과 같은 것이 돼야 되는 거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5절에서부터 28절 말씀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주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왕으로서 군림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드려,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서, 섬기는 종으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처럼, 오늘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떤 마음으로 만나야 되는가? 내가 이 사람을 위해서 섬길 것이 무엇인가? 내가 저 사람의 마음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의 발을 씻어줄 수 있을까?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리가 갑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종의 모습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려고 하는, 그런 제사장의 역할들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주에 제가 한문철 tv를 봤는데요. 참 안타까운 내용을 하나 봤습니다. 한문철 tv 아시죠? 몇 대 몇? 자동차 사고 전문 채널인데, 어떤 에피소드가 나왔냐면, 가다가 서 있는 차를 살짝 비켜가면서 부딪힌 사고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가만히 서 있는 차를 뒤에서 비껴서, 옆으로 이동하다가 살짝 박았으면, 몇 대 몇? 100대 빵입니다. 뒤에 있는 사람이 무조건 잘못, 친 사람이 무조건 잘못한 거죠. 그런데 그 앞에서, 피해를 당한 차에서 엄마 아빠 아기들 둘이 나와 있는데 그 사람들이 전부 다, 다 입원을 했대요. 살짝 부딪혔는데, 그래 가지고 며칠씩 입원해 가지고, 한 사람당 한 200만 원씩 해가지고, 엄청난. 그거 하는데, 가해자가 “이건 아니지 않으냐”라고 그러면서, 막 해가지고, 1년 동안 그 문제 가지고 씨름해서, 결국 입원한 사람들에게 돈을 안 줘도 되는 판결을 얻어냈다고 해서 나온 영상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어요. 그렇게 입원했던 4인 가족이 누구였는가? 교회 수련회에 갔던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이 어떻게 승소는 승리를 땄는가? 그 사람들의 그 사람들이 입은 옷을 보니까 교회 수련회 가는 옷을 티셔츠를 입고 있더래요. 그 교회에 찾아가서 사진을 봤더니, 수련회 가서 제트보트 타고 열심히 뛰어노는 그 행사를 다 끝낸 다음에, 입원해서 돈을 받아내려고 한, 그것을 다 증거로 제출해서, 이 사람들에게 완전히 승소하고, 소송 비용까지 그 사람들한테 다 물리게 하고, 병원비도 안 물어주게 됐다고 하는, 그런 에피소드가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고 또, 우리 성도들 중에 누가 사고를 쳤구나.”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당해봤기 때문에, 아마 “나도 이번에 한번 해보자”라고 했을지 모르겠어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곳인가? 거룩하고 정말 멋있고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가 아니라, 사실은 병원에 모인 사람들은, 건강해지고 싶은 환자들이 모인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깨끗하고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변화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영적인 환자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은 그 tv를 보면서, 아마 교회는 저 순 위선자들만 가득 차 있는 곳이고, 그러면서 복음 전도에 엄청난 방해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이 돼서,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이었죠.


어쩌면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들은 사탄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갑질을 해대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하고, 이기적으로 탐욕적으로 행동하면서, 그래서 저 사람 때문에 교회를 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들게 만드는, 그런 사탄의 제사장처럼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실 예수님께서 오셔야만 했던 것이죠. 우리가 다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기회가 주어지면 실수할 수밖에 없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들 구제불능인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런 것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성도들이 이렇게 사탄의 제사장 노릇을 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도무지 이제는 교회를 가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사탄의 제사장처럼, 사람들을 교회로 오는 것을 막아버리는 일을 하면서 살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교회 다니고 싶다” 하는, 그런 선한 제사장의 역할들을 감당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사장처럼 행동해야 되는 거죠.

우리가 누구를 만납니까? 우리 가족들에게도 선한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우리 아내에게 우리 남편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사랑으로 대해줘야 돼요. 섬기는 종으로서 대해줘야 돼요. 주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우리 가족을 향해서 나쁘게 행동하고 악하게 행동하고 잘못된 행동을 할 게 아니라,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기적으로 탐욕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제사장의 역할이 내게 주어져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제사장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이 시간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되돌아보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예수의 일꾼인가? 나는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사탄의 제사장인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정말 힘들게 만드는 그런 악한 일을 내가 하고 있는가 내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오늘 바울 사도가 고백한 것처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오,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개로 인도하는 제사장의 삶을 살았다고 하는 그런 고백처럼, 오늘 우리들의 모든 삶이 제사장의 역할들을 잘 감당해 나가는 우리가 전문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전문적인 선교사, 전문적인 복음 사역자는 아니더라도 내게 주어진 그 분야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 그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람들의 가운데 제사장의 역할들을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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